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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2화)
第一章 과거(過去)(2)


“어리석군. 끄끄, 어리석어.”
눈사태가 멈춘 절곡 위로 괴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하게 어둠에 동화된 괴인은 그 어둠 속에서 자청색의 빛을 뿜으며 발밑에 존재하는 절곡을 내려다보았다. 우물 모양으로 사방이 꽉 막힌 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은 모습이 절곡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결코 마제란 이름을 가진 사내조차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아니, 빠져나오기 이전 그가 살아 있는지조차 괴인에겐 의문이었다. 처음부터 멀리서 두 남녀의 대결을 숨어 지켜보던 괴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마제의 행동을 비웃을 수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는 마제가 살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겠지. 그 누가 뭐라 해도 칠백 년간 강호를 속박한 마제이니 필시 살아 있을 테지! 허나 아무리 마제라 해도 이곳을 빠져나오기는 힘들 터. 끌끌, 그렇다고 내가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내릴 수도 없으니……. 난제(難題)로다, 난제야!”
입은 난제라 말하나 입술은 웃고 있었다.
즐거웠기에.
자신의 목표인 마제가 곤경에 처한 것이 괴인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마제가 살아야 했기에 괴인은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렸다.
“기다려라. 내 너의 집에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을 알려 주겠다. 그들이라면 너를 구해 낼 수 있을 터. 크크, 하지만 너를 구하기까진 긴 시간이 되겠지. 신강에서 길림성까진 먼 길이 될 테니……. 허나 너라면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을 테지. 그 누가 뭐라 해도 마제의 근본인 천마(天魔)의 피가 널 죽게 만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크크크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괴인.
그의 음침한 웃음이 천산 위로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도 괴인과 더불어 사라져, 이내 어둠이 내린 천산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

꿈.
여인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사부를 보았다.
천애고아였던 자신을 거둬 주고 무공까지 가르쳐 준 사부를.
여전히 사부는 차갑지만 인자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지난날의 강인함 따윈 없었다.
단지 죽어 가는 나약한 인간의 힘없는 눈빛 사이로 강한 염원의 빛을 발할 뿐이다.
“삼백 년 전, 당시 빙궁의 삼대 궁주께선 전설이 된 마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의 정점에 선 채 모든 것이 비밀에 감추어진 마제를 그분은 순수한 무인으로서 꺾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무의 정점에 서고자 한 그분의 마음이 절대자라 칭해지는 마제를 꺾고픈 욕심을 불러일으킨 것이겠지. 후훗, 하지만 세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채, 마제를 본궁이 위치한 이곳 천산으로 불러 펼쳐진 대결은 허무하게도 그분의 패배였다. 그 패배의 증표로 마제는 본궁의 신물인 빙혼을 가져갔으며, 그는 언제든 다시 도전을 받아 주겠노라 말했다. 또한 자신을 꺾는다면 본궁의 신물을 돌려주겠노라 약조한 것이다. 허나 삼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누구도 마제를 꺾을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역대 궁주 모두가 새로이 마제란 명호를 갖고 강호에 나온 그들에게 패배하고 만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 빙궁은 신물을 잃고 점차 세가 약해져, 오십 년 전 본궁을 쳐들어온 화천궁(火天宮)에 의해 결국 멸문해야만 했다. 겨우 나만이 당시 궁주였던 내 아버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감히 신강의 제일세력인 화천궁에 복수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복수를 하기엔 나 혼자만의 힘은 너무도 나약했던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빙혼을 되찾는 것뿐. 빙혼의 힘이라면 능히 화천궁에 복수를 꿈꾸고, 또한 망해 버린 빙궁을 다시 세울 수 있을 터. 허나 난 빙혼을 되찾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 가고 있다. 이제는 나를 대신해 네가 빙혼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제부터는 네가 빙궁의 새로운 주인이며, 앞으로 강호에 또다시 나타날 마제를 꺾어 그의 손에서 빙혼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약조해 줄 수 있겠느냐? 삼백 년간 이어져 온 빙궁의 염원을 풀어 주겠노라고, 나와 약조해 줄 수 있겠느냐? 빙혼을 되찾아 화천궁을 멸하고 다시 이 땅 위에 빙궁을 세우겠노라, 나와 약조해 주겠느냐?”
울고 있다.
이미 한 번 지나온 과거를 꿈에서 맞닥뜨린 여인은 울고 있다.
죽어 가는 사부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말을 전해 들으며, 그녀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겠노라고.
사부의 말대로 빙혼을 되찾아 이 땅 위에 다시 빙궁을 세우겠노라고 여인은 울면서 약속했다.

“……!”
차가운 감촉이 뺨 위로 느껴지며, 눈을 떴다.
꿈속에서 흘린 눈물이 현세의 그녀를 깨운 것이다. 아직도 마음속 슬픔이 가시지 않은 듯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자소청은 쓴 미소를 그렸다. 그토록 약조하고 또 약조했건만, 자신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파 고통을 자아내니 결국 질끈 두 눈을 감은 그녀의 입에선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은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메마른 두 눈을 떠 보았다.
“…….”
눈을 뜬 그녀의 시선을 한 줄기 빛이 마주했다.
어둠이 걷히고, 희미한 빛이 절곡 아래의 분지 속으로 찾아든 것이다.
세상 밑의 또 다른 세상 속으로 찾아든 빛은 비록 약했으나 그 빛을 받은 채 누운 여인의 입가론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이 아닌 허무함이 가득 찬 미소였다.
‘끝났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라도 난 끝났다.’
내력이 모이지 않는다.
마제와의 격돌 이후 연속된 강한 충격에 단전이 파괴됐는지 단 한 올의 내기도 모을 수 없었다. 운기요상(運氣療傷)으로 가슴에 느껴지는 답답한 고통을 치료하려 했으나 내상을 치료하기는커녕 내기를 끌어 모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사실이 여인에게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말하니, 자소청은 허무한 미소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
다시금 시간이 흐른다.
등에서부터 전해지는 차가운 대지의 기운을 느끼며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이 무기력하게 누운 채 자소청은 시간만을 흘려보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론 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 준 사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갑지만 인자한 성품을 갖고 있던 사내.
그 사내가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혜를 갚기 위해 무공에만 열중했으며, 그녀는 얼마 못 가 자신의 사저이자 사부의 딸이었던 지운화마저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사부는 죽으며 설혼심결(雪魂心潔)의 기운과 함께 궁주 직을 맡긴 것이다.
삼백 년 전 잃어버린 빙궁의 신물, 빙혼을 되찾으란 당부와 더불어.
‘설혼심결?!’
문득, 과거를 회상하던 자소청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던 설혼심결의 기운을 생각해 낸 것이다. 빙궁의 빙백신공(氷魄神功)과는 관계없는, 역대 궁주에게만 전해지는 기운이 바로 설혼심결이다. 그것은 오직 빙궁의 신물인 빙혼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기운이었다.
무공과는 상관없는 마음의 법(法).
설혼심결의 기운은 주인 된 자의 마음에 그 영향을 주어 순수함을 갖게 해 준다. 고민이 없는, 그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순수하게 추구할 수 있으며, 또한 거짓됨이 없는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가 없는 순수함을 가진 자야말로 빙혼의 주인이 될 수 있기에 설혼심결의 기운은 항상 빙궁의 궁주만이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설혼심결이 무공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 그 본질은 세상에 퍼진 정기(正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자소청이 원한다면 마음에 담긴 설혼심결의 기운을 무(無)에서 유(有)로 형성화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미약한 기운이긴 하나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확인코자 결심한 자소청은 곧 단전혈(丹田穴)에 설혼심결의 정기를 형성화했다.
순간.
“……!”
다시 한 번 절망을 느꼈다.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건 이미 사라진 단전과 상관없이 멋대로 기혈이 뒤엉킨 내부의 상황이었다. 처참하다 할 정도로 제멋대로 뒤엉킨 기혈은 육신에도 영향을 주어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있는 힘조차 주지 않았다.
오직 고통만을 안겨 주는 내부의 상처에 자소청은 쓰디쓴 미소를 그리며 설혼심결의 기운을 다시 유에서 무로 돌려야만 했다.
‘말 그대로 끝이구나.’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그녀 자신은 얼마 못 가 죽고 말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뒤엉킨 기혈이 서로 충돌해 그 여파로 오장육부가 갈가리 찢겨 나가야만 한다. 하나 기이하게도 뒤엉킨 기혈이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한 채 아직 그녀의 목숨을 연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균형도 얼마 못 가 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그녀가 이승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이다.
“전…… 죽겠죠?”
문득 쓴 미소를 그린 자소청이 힘들게 입을 열어 말했다.
보이지 않는 사내, 자신을 구했을 마제란 인물을 향해…….
과연 그녀의 짐작이 옳았음인지,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후 무뚝뚝한 사내의 음성이 그녀의 귀로 흘러들었다.
“아마도.”
“후훗, 당신한테는 미안하단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군요. 힘들게 절 구하셨을 텐데 그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니…….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
진심이다.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여인 자소청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구해 준 마제란 인물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또한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미안해 하고 있다. 선대에 얽힌 염원을 잊고, 한 인간으로서의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에 마제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늘만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자소청의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내비칠 뿐이다. 여전히 백면귀(白面鬼)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백발 사내의 모습에 자소청은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마제는 붉은 유리알을 통해 지켜봤으며, 잠시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마제가 얼굴에 쓴 가면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있다.”
“……?!”
단순한 한마디.
그 말에 여인의 눈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사내의 말 때문이 아닌 가면 속에서 드러난 사내의 얼굴 때문이었다.
상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
칠백 년간 강호를 속박해 왔던 존재의 얼굴은 자소청이 짐작했던 강인함과는 다른, 오히려 유약함을 담고 있었다. 벗은 가면과 더불어 백발에서 흑발로 변하는 사내의 기이한 머리색 아래로 자리한 얼굴은 무인(武人)이라기보다 학사(學士)란 표현이 옳아 자소청에게 의아함을 던져 준 것이다. 그러나 두 눈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어, 그제야 본정신을 차린 여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사내를 마주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요?”
“역천대법(逆天大法).”
“……?”
의아함이 인다.
들어 본 적도 없는 방법을 제시한 마제의 말에 자소청이 눈빛으로 의문을 제기하니, 마제는 다시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보였다.
“역천대법을 이용해 내 몸의 내기를 네 육신에 주입한다면, 내 기운이 너의 뒤엉킨 기혈들을 강제로 제압해 서로 간의 충돌이 없게 만들어 줄 것이다. 본시 역천대법은 시전자의 내기로 피시술자를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드는 사악한 술법. 그러나 난 네 육신의 이지를 빼앗지 않고 자유를 주겠다. 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고, 네 스스로의 의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허나 비록 자유를 준다 해도 그 시간은 정해져 있다.”
“정해져 있다면?”
“일 년. 일 년이 지나면 네 몸에 깃든 내 내기는 자연스레 소멸하고, 넌 지금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죽겠지. 그런 네 육신에 다시 역천대법을 시전할 순 없다. 본시 역천대법 자체가 하늘을 거스르는 사공이기에 그것을 다시 시전한다면 네 정신은 소멸하고, 육신 역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
답이 없었다.
마제로부터 모든 설명을 전해 들은 자소청은 고민하는 듯 답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사내 마제는 기다려 주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두 남녀 사이로 미묘한 침묵과 더불어 시간이 흘렀다. 지루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후, 다시금 자소청이 마제를 바라보았다.
“일 년이라도 좋아요, 살 수 있다면. 하지만 그전에 당신께 제가 살려는 이유를 말해 주고 싶어요. 그 이유를 듣고 나서 절 살릴지 말지 결정해 주세요.”
“…….”
“남은 일 년의 시간 동안 전 당신께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또한 은혜를 갚으면서 당신을 유혹하겠어요. 제가 죽기 전 당신의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당신의 아이를 낳을 거예요. 빙궁의 후손인 제 피를 이은 그 아이가 커서 본궁의 신물인 빙혼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의 선조가 가져간 빙혼의 주인이 그 아이가 된다면, 제가 죽은 후에 사부님을 뵐 면목이 그나마 설 테니까요. 어때요? 제 편의에 따라 이런 생각을 갖고, 순수하게 절 살리고자 하는 당신의 은혜를 이용하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이런 나를 살려 주실 건가요?”
“…….”
뻔뻔하다 해야 하는가, 솔직하다 해야 하는가?
마음속 생각을 숨기지 않고 모두 토해 내는 자소청의 말에 일순 마제의 눈엔 어이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이상한 여인.’
자소청을 바라보는 마제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소청은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의 결정이 무엇이 되었든 결코 원망하지 않겠다고 눈으로 말하며.
피식.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자소청의 미소에 마제 역시 흐릿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금 굳은 얼굴로 돌아온 마제는 여전히 웃고 있는 자소청을 힘이 깃든 눈으로 주시했다.
“지난 칠백 년간 마제란 이름을 이은 자들은 결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금의 마제인 나 이학(李鶴) 역시 마찬가지이다!”
“…….”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학이라 밝힌 사내는 자소청의 말을 승부로 받아들였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자소청의 입에서 역시 결의 어린 말이 흘러나왔다.
“무공으론 졌지만, 이번엔 당신을 이기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