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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3화)
第一章 과거(過去)(3)


한 달이 지났다.
사매인 자소청이 빙혼을 되찾겠다며 천산에서 마제와 대결한 후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천산 아래에서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던 여인은 결국 기다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결국 너 또한 실패한 것이냐? 내가 무엇 때문에 네게 궁주 직을 맡겼다 생각하느냐? 그건 너를 믿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외인인 너를 자질만 보고 빙궁의 제자로 받아들였듯, 나 또한 너의 힘을 믿기에 궁주 직을 넘긴 것이다. 그런데 넌…… 결국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그 누군가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이 목소리에 담겨 여인의 몸을 떨게 만든다. 지운화란 이름을 가진 여인은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의 사매를 찾아보았으나 결국 그녀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곧 한 달이 흘러도 소식은커녕 나타나지 않는 사매 자소청의 행적과 어우러져 지운화로 하여금 두 가지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마제와의 대결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패한 후 도망쳤거나…….
어느 쪽이든 결국 자소청이 마제에게 패한 것만은 틀림없다.
또한 그 단 하나의 사실은 자소청에 대한 실망감으로 변해, 지운화가 가졌던 기대감을 배신감으로 변화시켰다.
“만약 네가 나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도망간 것이라면 난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마제와의 대결에서 사매 네가 살아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부질없는 다짐이다.
오랜 세월 자소청과 친자매처럼 함께했기에 그녀의 성정이 어떤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제에게 패했더라도 자소청은 아마 웃으며 돌아와 졌다고 솔직하게 자신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지운화의 추측 중 전자인 그녀가 죽었음을 의미했다.
하나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지운화는 애써 부질없는 다짐으로 불안감을 지우며 중원으로 향했다.
언제나 익숙했던 패배였기에.
지난 삼백 년간 이어져 온 마제와 빙궁의 궁주가 펼치는 대결에서 항상 패해 왔던 빙궁의 후손 지운화는 새로운 궁주가 될 인물을 찾아 중원으로 향한 것이다.
그 언젠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올, 새로운 마제를 상대할 인재를 찾아…….

***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지 못한다.
일부러 지나가는 날을 세지 않았기에 지금이 몇 월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따스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공기의 변화에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추측할 뿐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될 만큼 많은 시간이…….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둘만의 세상을 보내고 있는 자소청과 이학의 하루는 단순했다. 우선 이학은 제법 넓은 분지의 중앙에 자리한 작은 못에서 고기를 낚는다. 다행히도 지하수로가 뚫린 못의 깊이는 생각 외로 깊어, 그 속에는 각종 물고기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학이 차가운 물길에 직접 몸을 담가 물고기를 낚아 올리면, 자소청은 그것을 이용해 요리를 했다. 요리라 해 보아야 분지 안에 있는 메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화섭자를 이용해 불을 붙인 후, 물고기를 그 불에 구워 낼 뿐이다. 그리고 그 단순한 요리로 아침 식사를 끝낸 두 남녀는 말없이 서로의 할 일을 한다.
이학은 언제나 그래 왔듯 이 분지를 빠져나갈 길이 있는지 찾아보고, 자소청은 처음 이학이 발견해 자신들의 거처로 삼은 동굴 안을 청소한다. 동굴이라 해 보아야 그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았으나 두 남녀가 지내기엔 더없이 적당한 곳이었다. 특히나 무공을 잃은 자소청에겐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 주는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못에 사는 물고기를 노리고 날아든 독수리를 잡아 그 털을 이용해 만든 비로 잠자리에 묻은 흙을 쓸어 낸다. 두 남녀의 잠자리는 같은 동굴 안이지만 그 거리가 떨어져 있어, 자소청은 먼저 이학의 자리를 청소한 후 자신의 자리를 마저 끝낸다. 어두운 동굴 안을 조심조심 내디뎌 잠자리로 쓰고 있는 평평한 바닥을 모두 쓸어 낸 자소청이 다시 동굴 밖으로 모습을 보이면, 언제나 그곳엔 나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묵묵히 선 사내 이학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한 이학이 선 채 이제 막 동굴 밖으로 나오는 자소청을 마주한다. 단지 다른 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학의 닫혀 있던 말문이 열려 자소청에게 향했다는 것이다.
“따라와라.”
“……?!”
그동안 자신과는 필요에 의한 말을 빼고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다. 그 사내가 입을 열어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에 기뻐 여인이 방긋 웃어 보이니, 사내는 여인의 미소가 당황스러운 듯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여인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 사내를 자소청은 웃는 얼굴로 뒤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스무 그루가 넘는 나무가 자리한 분지의 동쪽 끝으로 이동한 사내는 이내 작은 숲 안으로 얼마 들어서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의 앞으론 몇백 년은 묵었을 거목이 밑동만을 남긴 채 모습을 드러냈으며, 사내의 허리쯤에 오는 나무의 속은 테두리를 빼곤 날카로운 검에 의해 잘려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속에는 오늘 아침 절곡의 빙벽에서 잘라 낸 얼음덩이가 빛을 뿜고 있었으며, 이학은 자신이 미리 옮겨 놓은 얼음 덩어리에 두 손을 갖다 댄 채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켰다.
츠으으으.
사내의 양손에서 이는 열기에 얼음덩이는 금세 물로 화했으며, 그 물은 계속된 사내의 삼매진화에 의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로 변했다. 처음부터 사내 이학의 의미 모를 행동을 지켜보던 자소청의 눈으론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만큼 사내 이학이 보여 준 한 수는 절정의 경지에 들어섰던 자소청마저 쉽게 펼칠 수 없는 상승의 경지였던 것이다. 그런 여인의 놀람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끝낸 이학은 몸을 돌려 자소청을 바라보았다.
“앞으론 한밤중에 몰래 나가 차가운 물속에서 몸을 씻어 낼 필요가 없다.”
“……?!”
비록 무뚝뚝한 말이지만, 그 속엔 자신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한밤중 사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못으로 나가 몸을 씻어 내던 자신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이렇게 따뜻한 물에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그 사실에 고마움과 더불어 부끄러움이 인 자소청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물들어 무표정하던 사내 이학의 입가에 미소를 자아냈다.
“보, 본 건가요?”
“…….”
이상한 여인이다.
직접 보지 않아도 기척만으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을 떠나 지난날 자신을 유혹하겠다던 여인의 말을 생각하자면, 그녀는 오히려 벌거벗은 육신을 자신에게 보여 줘야만 한다. 그것이 건장한 사내를 유혹하기엔 가장 쉬운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혹시나 자신이 그녀의 몸을 봤을까 걱정하며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미소를 그린 사내 이학은 닫혀 있던 말문을 열었다.
“날 유혹하려 했던 게 아니던가?”
“물론 하고 있어요. 언제나, 언제나 당신을 유혹하고 있어요. 절 좋아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이지, 억지를 피워 당신을 유혹할 생각은 없어요.”
“있는 그대로?”
문득 깨달아졌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가.
실제로 지난 시간 동안 눈앞의 여인은 그 어떤 유혹 어린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평소의 자신을 보여 준 것이다. 또한 그 모습은 처음 이학이 천산에서 보았던, 차가우면서도 강한 면모가 아닌 소녀와도 같은 발랄함과 해맑은 미소였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본모습이리라.
“어째서지? 네 목적은 날 유혹해 아이를 낳으려던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응당 육신을 이용해 유혹하는 방법이 제일 쉬울 터. 그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네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라……. 어려울 텐데.”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게 됐는걸요.”
“……?!”
일순 뜻하지 않은 고백에 이학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 들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자소청은 고개를 숙인 탓에 볼 수 없었으며, 그녀는 단지 수줍은 듯 미소를 그린 채 땅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호감이었어요. 제 생명을 구해 준 당신께 고마움과 호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보기보단 무섭지 않은 당신이었기에 당신을 유혹해 아이를 낳겠단 결심을 했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에 대한 제 호감이 좀 더 당신이란 사람을 자세히 바라보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알게 됐죠. 비록 무표정한 얼굴에 말은 차갑지만, 당신의 행동에서…… 사실은 당신이 자상한 분이란 걸. 그리고 그것을 애써 차가운 얼굴과 말로 숨기는 당신이 부끄럼쟁이란 것도, 후훗. 그것을 알게 된 후 점점 더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당신이 좋아해 주길 원했어요. 제가 좋아하게 된 분이 제 본연의 모습을 좋아해 주길…….”
“바보 같은!”
차갑게 몸을 돌렸다.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없는 여인의 진실 된 말에 사내는 차갑게 몸을 돌린 채 여인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저벅저벅 땅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멀어지는 사내의 모습이 다시금 고개를 든 여인의 눈으로 비쳐 들었다. 비록 지금의 저 모습이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임을 알고 있음에도 여인은 마음속에서 이는 처연한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결국 눈물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힘들게 자신의 본마음을 고백했건만, 사내는 그에 대한 답변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울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걸로 됐다고…….
“후훗, 그래. 이걸로 된 거야. 오히려 그가 날 좋아해 주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 날 좋아하게 된다면, 내가 죽은 후 그는 슬퍼할 테니까.”
분명 슬퍼할 것이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만큼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죽은 후 분명 슬퍼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태로 만족을 느끼려 했다. 그가 슬퍼하지 않도록…….
“비록 그가 날 좋아해 주지 않는다 해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은 분명 내게 행복일 테니.”
스스로를 위로하던 여인 자소청은 애써 밝은 미소를 그리며 사내가 만들어 준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입고 있던 빛바랜 의복을 벗어 우윳빛 나신을 물속에 담근 여인은 이내 그 물속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느낌이 마치 사내 이학의 감추어진 성정과 같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호감이라…….”
차가운 바위 위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왠지 모르게 숲에서 보았던 여인의 표정과 말이 사내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이렇게 사색에 잠기게 만든 것이다. 또한 그 생각은 여인과 보냈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만드니,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미소를 그려야만 했다. 자신과는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던 여인의 모습이 그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것이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화난 듯 이마를 찡그리는 그 모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사내 이학은 문득 스스로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모르겠다.
자소청이란 여인의 표정을 이렇게 마음속에 새긴 게 언제부터인지.
아니, 알고 있다.
처음부터.
자신은 처음부터 그녀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당황한 사내 이학의 뇌리 속으로 처음 천산에서 보았던, 차갑지만 맑은 눈망울을 가진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던가. 그랬던 것인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어째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 절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는지.
“처음부터 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녀보다도 내가 먼저…….”
어이없는 자신의 마음에 다시 한 번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사내 이학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 여인이 있을 숲으로 향했다.

“이번 승부는 처음부터 내가 이길 수 없는 승부였다.”
“…….”
목욕을 끝내고 숲에서 나온 여인을 향한 사내의 첫마디였다.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몸을 돌리고, 여인의 눈으론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닌 기쁨이었다.
사내의 말.
그 속에 감추어진 뜻을 알 수 있었기에…….
사내의 마음이 자신과 같음을 안 여인은 앞서 걷기 시작한 사내를 향해 성큼성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뇌리엔 앞으로 있을 이별에 대한 걱정보단 지금의 행복만이 떠올랐다.
‘잊자.’
지금만은 모든 걸 잊자.
‘앞일에 대한 모든 걸.’
다가올 영원한 이별조차 잊고 지금만을 생각하자.
‘그래, 이렇게 그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을 소중히 기억하자.’
덥석, 사내의 팔을 용기 내 움켜잡은 여인이 미소 지었다.
밝게,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그 미소를 바라보는 사내 역시 한 줄기 미소를 그려 보였다.
영원히,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며…….

***

고통 어린 여인의 비명이 동굴 안을 메아리쳤다.
그 끔찍한 비명성은 절곡의 어둠이 걷히고 빛이 찾아든 후에야 겨우 그쳤으며, 멈춘 여인의 비명을 대신하듯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절곡 안으로 흘러 퍼졌다.
두 남녀만이 살고 있던 절곡 안.
그 안에 새 생명이 태어났음을 알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른 채 언제까지 계속돼, 부부의 연을 맺은 이학과 자소청의 입가로 미소를 자아냈다.
행복이란 이름의 미소를…….

랑(狼)이라 이름 붙인 사내아이가 태어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다. 또한 그 시간의 흐름은 두 남녀의 얼굴 위로 자연스레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별의 시간.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느낀 이학은 앉아 있는 자신의 품에 안겨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의 뒤에서 슬픈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것은 제대로 먹지 못해 잘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는 자소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남녀가 다가올 이별을 슬퍼하며 침묵을 지키는 동굴 안에서 아기는 부모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잠이 든 듯 옅은 숨소리를 흘려보냈다. 그 숨소리를 전해 듣던 자소청의 눈가로 결심의 빛이 어린 것은 순간이었다. 결심의 빛과 동시에 자소청의 손에서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와 아기의 몸속으로 흘러들었으나 이학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을 향해 고개 돌린 여인의 말에서 그녀가 무언가를 했음을 알 수 있었을 뿐.
“방금 랑이에게 설혼심결의 기운을 전수했어요. 본시 설혼심결은 빙혼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공법으로, 그 주인 된 자에게 번뇌가 없는 순수함을 갖게 해 줘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순수하게 추구할 수 있는……. 만약 설혼심결의 기운을 가진 자가 선이라면 순수한 선(善)이, 만약 악이라면 순수한 악(惡)이 되게 해 주죠. 하지만 아기에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어요. 아기의 마음은 백지와 같아, 그 마음속에 깃든 설혼심결의 기운은 랑이를 악도 선도 아닌 순수한 백지 상태로 자라게 할 거예요.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전 알 수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지켜봐 줘요. 이 아이가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아이가 당신이 인정할 만큼 강해지면 처음 약조대로 빙혼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래야만 제가 죽은 후에도 사부님과 선조들을 뵐 면목이 설 테니.”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가슴에 편안히 얼굴을 기댄 여인 자소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절 걱정하지 말아요. 저보단 당신과 우리의 아이를 걱정해 주세요. 제가 죽은 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몰라도 아이는 곧 죽고 말 거예요. 그러니 제발 아이와 함께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 주세요.”
“걱정 마시오. 내 약조하리다. 결코 랑이를 죽게 하지 않겠다고. 당신이 지금껏 살았다는 증거인 랑이를 내 목숨을 걸고 살릴 것이오. 그리고 당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만큼 이 아이를 강하게 키우겠소. 그 어떤 누구보다도, 나보다 더 강하게 키워 당신이 저승에서 웃으며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겠소.”
“고마워요. 당신에겐 그저 고맙단 말밖에는 할 수 없어요. 그것이 너무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울고 있었다.
여인은 사내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이별을 고하는 여인의 울음 섞인 말에 사내는 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그녀가 편해질 수 있도록.
사내는 여인을 따스하게 안아 주며 눈을 감았다.
지금 느껴지는 여인의 온기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