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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25화)
第九章 출관(出關)(4)


어스름한 새벽녘의 빛이 방 안을 비췄다.
그 빛과 함께 침상 위에 정좌한 사내의 몸 주위론 붉은 기운이 맴돌아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마치 붉은 뱀처럼 적발 사내의 몸을 빙글빙글 똬리를 튼 채 움직이던 기운은 이내 사내의 의지에 따라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며 어제저녁부터 감겨 있던 두 눈을 뜨게 만들어 주었다.
“……!”
한순간 강한 신광이 사내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지간에 사라지고, 이내 무거운 눈빛으로 돌아온 사내 백우는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긴 한숨을 토해 내야만 했다.
“후우……. 아직인가?”
몸 안에 응어리진 뇌전마공의 기운이 아직 남아 일부 혈을 막고 있었다. 그 기운을 완벽히 걷어 내지 못한 채 운기요상에 이어 운기조식을 끝낸 백우는 쓴 미소를 입가에 띠어 보여야만 했다.
서무영이란 사내를 떠올리며…….
“결국 신념(信念)인가?”
신념이다.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서무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 믿음이 이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서무영의 예측을 벗어난 힘을 갖게 해 준 것이다.
뇌벽장을 맞은 순간, 백우 자신은 서무영에게 있어 쓰러져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 상대였다. 뇌벽장뿐만이 아니다. 폭렬장과 격돌했을 때도 앞이 아닌 그 자리에서 멈춰 섰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지 않고 덮쳐든 자신의 이해치 못할 행동이 결국 서무영의 몸을 굳게 만들고, 중한 내상을 입은 자신에게 오히려 승리를 안겨 준 것이다.
신념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결국 그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만약 다음에 또 싸우게 된다면 그때는 어제의 차이가 메워져 있을 것이다.
이기는 것이 당연한, 그 생각을 갖지 않은 서무영은 어제의 그보다 강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러나…….
‘결코 지지 않는다.’
한 번 이겼기 때문에 생긴 자만이 아니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질 수 없다는 굳은 다짐.
그 다짐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가슴에 품은 채 백우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신의 체구를 일으킨 백우는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혈귀도를 허리 뒤로 비스듬히 찬 채 닫혀 있던 방문을 열어 보였다.
덜컹.
“……?!”
오늘의 결승전을 준비하기 위해 연무관으로 향하려던 백우는 방문을 연 후 몸이 굳어 들고 말았다.
여인.
새벽녘의 빛무리 속에 자리한 여인은 앞마루에 턱을 괸 채 앉아 희미한 안개가 깔린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피곤한 듯 두 눈을 살짝 내리감은 채 눈앞의 전경(全景)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뒤에서 들려온 사내의 기척에 가만히 자신의 옆자리를 두들겨 보였다.
“앉아.”
“…….”
새벽의 고요함을 깨지 않으려는 듯 낮게 흘러나온 여인의 말에 사내 역시 조용히 그녀 곁에 다가가 앉았다. 그런 그의 코로는 찬바람을 타고 여인의 향기가 흘러드니, 그 향긋함에 기분이 좋아진 듯 사내는 웃으며 입을 열어 보였다.
“뭐야, 시합도 하기 전에 먼저 적지 탐색인가? 하여간 잔머리 하나는 잘 굴린다니까.”
“몸은 좀 어때?”
반응조차 없었다.
자신의 농엔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직 질문만을 던졌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잠시 당황한 백우였으나 그 당황을 감추고자 크게 웃으며 답했다.
“하핫, 당연히 괜찮지!”
“피, 거짓말.”
“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람 소리를 내며 살짝 눈을 흘기는 그녀의 시선에 왜 이리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단지 그녀가 자신의 거짓말을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새벽빛에 감싸인 그녀의 표정.
아마도 그 표정이 불현듯 사랑스럽게 느껴진 까닭이리라.
‘으으, 안아 주고 싶다!’
강한 바람.
그 바람은 단지 공허한 마음속 외침만으로 끝이 났다.
가냘픈 그녀의 어깨를 부여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백우는 행여나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 두려워 조심스레 물었다.
“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어째서긴. 넌 거짓말할 때 항상 눈동자가 커지잖아.”
“…….”
천연덕스런 그녀의 답에 결국 백우는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 자신도 몰랐던 버릇을 그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쳇, 둔한 주제에 그런 건 또 잘도 알아채네.’
사랑스럽던 모습은 사라지고 얄미움만이 자리해 마음속으로 투덜거려 보았다. 그런 그의 귀로 나지막한 소음이 들려오니, 이내 앉아 있던 신형을 일으켜 세운 자인영이 사내 백우의 앞으로 돌아서며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외상은 눈에 보이지만, 내상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위험한 거야. 만약 내상을 완벽히 치유치 않고 그대로 놔뒀다간 후에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알 수 없다고. 그러니 오늘 하루는 어제 입은 내상을 치료하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해.”
“그게 무슨 뜻이지? 설마 나 보고 오늘 시합을 포기하라는 건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들어 올려진 사내의 얼굴은 굳어 여인을 향하니, 오히려 여인은 안색을 풀며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시합? 무슨 시합? 아하, 오늘 결승전 말이지?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오늘 결승전은 펼쳐지지 않을 테니까.”
파앗!
거칠게 몸을 일으켜 세운 사내가 여인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부여잡고 무서운 얼굴이 되어 외쳤다.
“무슨 소리야? 똑바로 말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야. 어제 준결승전에서 내가 이겼고, 결승전에 올라갈 내가 오늘의 경기를 포기한다 미리 말했으니, 결국 오늘 시합은 펼쳐지지 않는단 뜻이야. 축하해, 대주가 된 것을.”
“너, 날 바보 취급할 셈이야!”
기뻐하지 않았다.
대주가 된 것에 기뻐하지 않고 화를 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자인영은 침착한 눈으로 붉게 달아오른 백우의 얼굴을 마주했다.
“대체 왜? 왜 그랬지?! 날 생각해서 했다는 그따위 소리 하기만 해 봐! 널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너야말로 날 바보 취급하지 마! 널 위해서라고? 후훗, 웃기지 마. 내가 오늘 시합을 포기한 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라고!”
순간 성난 백우의 멱살을 부여잡은 채 오히려 그의 얼굴을 자신의 코앞까지 끌어당긴 자인영이 소나기 같은 말을 퍼부었다.
“잘 들어 둬! 혹시라도 네가 오해할까 봐 말해 두는데, 난 처음부터 대주가 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고! 너도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 봐. 대주란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건 바로 책임자의 자리라고.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골치 아픈 자리가 바로 대주란 자리란 말이야! 사소한 결정부터 시작해 크나큰 결단까지, 또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한 책임까지 물어야 하는 자리가 바로 대주란 걸 너 또한 알 텐데? 그런 골치 아픈 자리에 왜 내가 힘들게 너와 싸워 앉아야 하지? 웃기지 마. 그런 자리, 차라리 내 쪽에서 사양하겠어!”
“…….”
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입술까지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온 여인의 말에 사내 백우는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말도 말이었지만 무엇보다 눈앞에 다가온 여인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혼란케 한 것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못마땅했던 백우는 순간 인상을 찌푸린 채 소리쳤다.
“그럼 대체 왜 힘들게 결승전까지 올라간 거지?! 애초 대주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싸워 올 필요도 없었잖아!”
“바보.”
백우의 멱살을 놓으며 여인이 그로부터 멀어졌다. 뒷걸음질 치는 여인의 행동에 따라 사라지는 그녀의 체취가 못내 아쉬운 사내였으나 그런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뒤로 물러난 자인영은 걸음을 멈춘 채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쯧쯧, 그러니까 네가 바보라는 거야. 생각 좀 하라고, 생각 좀. 부대주란 자리가 뭐니? 대주란 한 명을 빼고는 아랫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리가 바로 부대주란 말이지. 더군다나 대주인 네 곁에서 내 의견을 전달할 수도 있고, 또 그 의견이 설사 잘못되더라도 책임은 내가 아닌 결정을 내린 너한테 있다, 이거 아니겠어. 속된 말로 날로 먹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부대주라, 이거지.”
“이, 이 불여우 같은 계집애가.”
결국 뒤에서 자신을 이용해 먹겠다는 소리였다.
대주에 앉은 자신이란 방패막이를 이용해 편히 뒤에 숨어 부대주란 자리를 마음껏 즐기겠다는 그녀의 말에 백우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화는 사라지고 대신 허탈감만이 자리해야 했다.
그녀다운, 어찌 보면 지극히 그녀다운 선택이다. 그 선택에 더 이상 반박할 기력조차 잃은 백우가 허무히 마루 위에 주저앉으며 손을 휘저었다.
“가라, 가. 혹시라도 날 위해서 일부러 기권했다 생각한 내가 미친놈이다.”
“…….”
귀찮은 듯 손을 휘젓는 사내를 말없이 미소 그린 얼굴로 바라봤다. 미리 준비해 둔 말이 효과를 발휘했음을 안 여인은 사내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나직이 말을 내뱉으며…….
“몸조리 잘해야 돼. 내상이 도지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
조그마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백우의 눈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는 여인에게 향했다.
그녀의 말에 감추어진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그녀가 던진 말들이 자신을 위한 것이란 걸. 그러나 그것을 알았다 해도 여인을 향해 무어라 말을 던지진 못했다. 이제 와 화를 낼 기력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여인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이다.
‘흠, 이거 조금은 날 친구 이상으로 봐 준다 생각해도 되는 건가?’
왠지 그런 것도 같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친구로서 이 정도 걱정은 당연하다 생각되면서도 어찌 보면 친구로선 지나친 걱정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도 품어 보는 백우였다. 그 애매모호한 생각 속으로 문득 어제 자신을 바래다주던 초유랑의 말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다.
“자, 잠깐!”
“……?!”
갑작스런 사내의 부름에 여인의 걸음이 멈췄다.
멈춰 선 걸음과 동시에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는 자인영의 시선에 사내 백우는 긴장한 안색이 되어 입을 열었다.
“흐음, 그, 그러니까 그게…… 내 분명 어제 유랑이한테 듣기론 너와 서무영 그자가 이상하리만치 친해 보인다던데.”
“뭐야, 그게 궁금했던 거야?”
혹시나 또다시 화를 내며 승부를 하자고는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자인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백우의 질문에 맥 빠진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찔끔한 표정이 되어 백우는 소리쳤다.
“구, 궁금하지 않아! 흠, 궁금하진 않지만, 그래도 뭐 네가 얘기해 준다면 들어 줄 용의도 있지.”
“호오, 그래? 이거 어쩌지, 난 얘기하고픈 맘이 없는데. 뭐, 굳이 궁금하지 않다니 말 안 해도 되겠네. 그럼.”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잔뜩 약만 올리고 사라지려는 여인의 행동에 결국 백우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크으, 궁금하다, 궁금해. 그래, 궁금해 죽겠으니까 어서 빨리 말해 봐!”
“어머, 왜 그리 열을 내실까. 이상하네, 후훗. 뭐, 정히 알고 싶다면 말 못할 것도 없지. 굳이 그와 내 관계를 표현하자면 그래, 정혼자라고나 할까.”
“컥!”
주화입마가 찾아온 듯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답에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낀 백우가 흥분해 소리쳤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정혼자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너 설마 정혼자가 있으면서도 랑이에게 흑심을 품었단 말이야!”
“흑심이라니? 내 순수한 첫사랑을 흑심이라니?! 흥, 내 말 똑똑히 들어. 난 정혼자라고는 안 했어. 단지 정혼자라고나 할까라고 답했을 뿐이라고. 어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으휴.”
“이런 젠장! 그따위 알아들을 수 없는 표현 쓰지 말고 똑바로 말해 봐!”
“더 이상 뭘 어떻게 설명하란 말이야? 정히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무영이한테 물어보든가. 난 더 이상 네 말상대 해 주기 싫으니까, 잘 있으라고.”
“야!”
무정해도 이리 무정할 수 없었다.
짜증이 난 듯 인상을 찡그린 여인은 이내 무정하게도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잔뜩 궁금증만을 유발시킨 채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백우는 허망한 눈이 되어 바라봐야만 했다.
‘겨우 랑이한테서 멀어졌다 싶었더니 이번엔 서무영 그 자식이냐?!’
완전히 모습을 감춘 자인영과 겹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른한 눈빛만을 간직한 사내. 사내 서무영의 얼굴을 떠올린 백우는 곧 자신의 마음속에 새로운 다짐 한 가지를 부여해야만 했다.

‘어제는 조금 멋있더니, 오늘은 왜 그리 밉상이람.’
마치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가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안개 속을 걸어 나가는 자인영은 자신과 서무영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어보던 백우의 태도에 기가 질려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흥분해 물어 오는 그의 태도 자체가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마치 무영이를 질투라도?!’
질투다.
아무리 봐도 백우의 아까 전 모습은 질투하던 사내의 모습이었다. 여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내의 모습을 백우의 행동에서 떠올린 자인영은 이내 그 생각을 부정했다.
‘후훗, 웬 질투? 그건 마치 우가 날 좋아하는 것 같잖아. 에이, 그럴 리 없지.’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 하나의 선을 그어 지금의 생각을 부정했으나 여인의 입가엔 마음속 부정과는 달리 한 줄기 미소가 걸려 백우를 떠올렸다. 항상 짓궂기만 한 그였지만, 어제처럼 가끔은 멋있는 모습도 보여 주던 백우였다.
그런 백우의 모습을 떠올린 자인영의 입가론 여전히 미소가 걸려 사라질 줄 몰랐다.

***

저벅.
긴 통로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
그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한 사내가 어둠 속을 나아갔다.
사내의 발걸음엔 주저함이 없었다. 거칠 게 없다는 듯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이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내의 손에는 흰 검집에 꽂힌 한 자루 검만이 자리해, 사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추듯 희미한 청광을 발했다.
삼 년.
오늘로써 정확히 이곳 비동에 들어온 지 삼 년이 되었다. 그 삼 년이란 시간이 끝난 지금, 사내는 그저 담담히 자신이 삼 년 전 왔던 길을 되짚어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검병에 장식된 백룡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광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던 사내의 걸음이 멈췄다.
아주 잠시 걸음을 멈춘 사내의 두 눈에 인공의 빛이 아닌 자연의 빛무리가 쏟아져 내리는 동굴의 입구가 비쳐 드니, 이내 멈춰 있던 걸음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 그 쏟아지는 빛 속으로 사내의 신형을 이끌었다.
“신 흑풍대가 마제를 뵈옵니다!”
“…….”
쏟아지는 태양빛 아래로 선 사내를 백팔 명의 남녀가 꿇어 엎드린 채 맞이했다. 하나같이 검은 무복에 흑의 피풍의로 어깨를 감싼 채 그 얼굴마저 검은 죽립으로 가린 이들의 환영에 사내 이랑은 말이 없었다.
천마비동을 나온 지금.
정식으로 마제란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곧 이학의 뒤를 이어 그가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을 자격을 얻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궁주의 자격을 뜻하는 마제란 칭호를 얻었음에도 기쁨이 없었다. 단지 삼 년 만에 쬐는 태양빛을 만끽하려는 듯, 두 눈을 감은 채 맑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보였다.
“…….”
편했다.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가 그저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그 편안함을 잠시 마음속에 담은 사내의 두 눈이 다시 떠지며, 그 속에서 드러난 고요한 시선은 이내 백팔 명의 남녀 중 맨 앞에 무릎 꿇은 한 사내에게 향했다.
“백우.”
“하명하소서!”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언제나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이들을.
백우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 선 자인영과 초유랑 역시 진작 알아본 이랑이었다. 또한 그들 중 백우가 자신의 예상을 넘어 흑풍대의 제일 서열인 대주가 되었음을 깨달은 이랑의 입가엔 처음으로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와 더불어 명을 기다리고 있는 백우를 응시한 채, 이랑은 너무도 당연하게 첫 번째 명령을 하달했다.
“따르라.”
파앗.
한 마디 말과 더불어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옷자락을 가볍게 휘날리며 내딛는 그의 첫 번째 걸음에 꿇어 엎드려 있던 흑풍대가 마치 파도가 갈리듯 좌우로 벌어졌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좌우로 갈린 사람들 속으로 천천히 이랑이 나아가니, 이내 이랑과 마찬가지로 흐릿한 미소를 그린 백우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런 두 사내의 듬직한 등을 웃음 띤 눈으로 바라보던 자인영이 곧 백우의 뒤로 다가와 서니, 그녀의 뒤로는 흑풍대 이조의 조장을 맡은 초유랑이 일조 조장인 서무영과 함께 나란히 선 채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죽립 아래로 감추어졌던 초유랑의 얼굴엔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여전히 나른한 눈빛으로 흘끗 바라본 서무영은 이내 그 자신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줄기 미소를 그려 보였다.
강호(江湖).
이제 곧 나아갈 강호는 천마궁에 봉인된 그 자신들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길이 될 것이기에.


<『천마도행』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