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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
그림자 전설 1권(1화)
서(序)(1)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상상을 해 봤을 것이다.
―만약 세상에 나와 똑같은 대역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위험하거나, 어렵거나, 혹은 귀찮은 일들을 맡길 수 있으며, 심지어 날 대신해 죽음마저 감수할 수 있는 대역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림자를 거느린 ‘나’라는 존재는 정말 행복할 것이다. 인내와 노력은 사전에만 나오는 말이 될 것이고, ‘나’는 그저 달콤한 열매만 향유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될까?
―만약 내가 누군가의 대역이 된다면 어떨까? 위험하거나, 어렵거나, 귀찮은 일만 대신하고, 아무리 크나큰 성공을 거둬도 그것은 이내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되며,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면 어떨까?
누군가의 그림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행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그리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게 된 순간, 그는 그림자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이 반대의 상황에 관한 것이다.
그림자 무사!
지금 여기, 운명적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1장 운명의 시작(1)
1.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벌써 수십 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잠깐 내 과거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내 출생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우선 난 내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랐고, 또 내가 어떻게 이 도시의 뒷골목으로 흘러왔는지도 몰랐다.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왕초’라 불리던 수염투성이의 중년인, 툭하면 터지던 그의 거친 욕설과 가혹한 구타, 그리고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장바닥을 떠돌며 구걸한 것이 전부였다.
―난 누구일까? 난 어째서 태어났을 때부터 비렁뱅이가 되어야 했을까?
솔직히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궤변론자가 당장 중요한 것은 살아온 과거가 아니라 살아갈 오늘이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의 내게 있어 출생에 대한 고민들은 그저 한낱 사치에 불과했다.
아! 우연과 운명을 들먹이며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사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그다지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날도 여느 겨울날처럼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나는 여느 때처럼 얇은 누더기만 걸친 채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고, 구걸 또한 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은 인심으로 인해 여느 때처럼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
왕초는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특히 힘없는 약자에게 있어 세상은 더없이 무자비하고 비열한 곳이다!”
그의 말마따나 세상은 힘없는 거지 아이에게 절대 그 따스함을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회색의 무심한 발걸음으로 내 곁으로 스쳐 지나갔고, 어쩌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라도 경멸에 찬 표정으로 이내 날 외면했다.
그렇게 추위와 굶주림이 절정에 달한 저녁 무렵.
‘따뜻한 국수 한 그릇만 먹고 싶다!’
난 연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시장 한복판의 국수집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힘이 없었고, 너무도 허기가 진 탓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소득도 없는 주제에 호랑이보다 무서운 ‘왕초’가 기다리고 있는 움막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우연인지, 혹은 운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만남이 시작된 것은.
다그닥! 다그닥!
네 마리의 붉은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난폭하게 달려왔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색 마차!
“으악! 갑자기 이게 뭐야?”
당연히 시장통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섰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둔 좌판들은 사방으로 깨지거나 흩어졌고, 몇몇 아낙과 아이들은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때, 누구보다 크게 놀란 것은 바로 나였다. 때마침 시장 한복판을 서성이고 있었던 탓에, 마차는 나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던 것이다.
피할 수 없었다. 마차가 워낙 빠르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굶주린 탓에 피할 힘이 없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 질끈 눈을 감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을 감은 뒤,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
사람들의 비명도 그쳤고, 오히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야, 이 미친놈아!”
정면에서 종이 울리는 것처럼 요란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뭐지? 내가 아직 안 죽은 건가?’
그제야 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말의 입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급히 옆으로 방향을 틀어 내 앞에서 간신히 멈춘 커다란 마차였고, 이어서 마부석의 성난 아저씨와 어느새 주위로 몰려든 낯익은 시장 사람들이 보였다.
“이, 미친 거지새끼야!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마차가 오는 게 안 보여?”
마부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부었다.
“아, 저…….”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차라리 이때 도망쳤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후, 마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냐?”
제법 점잖은 척했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의 목소리.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당사자인 나와 꼬마는 물론, 이어서 마차에서 내린 붉은 비단옷의 단정한 중년인, 그리고 주위에 모여든 구경꾼들도 모두 깜짝 놀란 것이다.
“아!”
“어라? 설마?”
모두는 나와 꼬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찬찬히 살피다가, 점점 황당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그 의심은 보면 볼수록 이내 감탄으로 변했고, 감탄은 다시 황당함으로 변했다.
꼬마의 나이는 여덟아홉 살 정도. 키는 이제 겨우 어른의 허리에 올 정도였고, 특히 큰 눈과 둥근 입술이 인상적인 귀여운 외모였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 꼬마의 외모가 황당하게도 나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물론 맨 처음 마부가 내게 욕을 퍼부었듯이, 녀석과 나는 언뜻 보기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녀석은 귀하게 자란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난 땟국이 질질 흐르는 시커먼 거지의 몰골이었다.
녀석은 옷차림도 깔끔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있었지만, 난 형체를 알 수 없는 회색의 누더기를 입고 머리도 산발이 되어 있었다.
또한 체격만 하더라도 난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녀석보다 조금 작아 왜소했고, 얼굴에는 살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언뜻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이목구비를 찬찬히 하나씩 뜯어보면 녀석과 나는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똑같았다.
“너, 누구냐?”
이윽고 꼬마 녀석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날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저, 저기…….”
우물쭈물. 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내 이름 따윈 관심사가 아닌 것 같았다.
녀석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날 바라보다가, 잠시 후 함께 마차에서 내렸던 중년인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아버지! 오늘은 내 아홉 번째 생일이니까, 시장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신다고 약속했지요?”
“그래. 우리 휘(輝)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마. 허허!”
중년인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도 난 지금의 이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장차 어떤 일들이 펼쳐질 것이며, 내 운명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녀석은 날 바라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나, 저놈 사줘요! 저놈이 갖고 싶어요!”
아버지라는 중년인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아니, 중년인만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 얼마냐? 얼마면 내 부하가 될래?”
아버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녀석이 날 가리키며 물었다.
만약 이때 내가 도망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혹은 죽어도 싫다고 거절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난 종종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가정일 뿐. 잠시 머뭇거리다가, 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 국수 한 그릇이요.”
장차 ‘그림자’라고 불리는 내 운명이 국수 한 그릇에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림자 전설 1권(1화)
서(序)(1)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상상을 해 봤을 것이다.
―만약 세상에 나와 똑같은 대역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위험하거나, 어렵거나, 혹은 귀찮은 일들을 맡길 수 있으며, 심지어 날 대신해 죽음마저 감수할 수 있는 대역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림자를 거느린 ‘나’라는 존재는 정말 행복할 것이다. 인내와 노력은 사전에만 나오는 말이 될 것이고, ‘나’는 그저 달콤한 열매만 향유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될까?
―만약 내가 누군가의 대역이 된다면 어떨까? 위험하거나, 어렵거나, 귀찮은 일만 대신하고, 아무리 크나큰 성공을 거둬도 그것은 이내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되며,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면 어떨까?
누군가의 그림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행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그리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게 된 순간, 그는 그림자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이 반대의 상황에 관한 것이다.
그림자 무사!
지금 여기, 운명적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1장 운명의 시작(1)
1.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벌써 수십 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잠깐 내 과거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내 출생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우선 난 내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랐고, 또 내가 어떻게 이 도시의 뒷골목으로 흘러왔는지도 몰랐다.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왕초’라 불리던 수염투성이의 중년인, 툭하면 터지던 그의 거친 욕설과 가혹한 구타, 그리고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장바닥을 떠돌며 구걸한 것이 전부였다.
―난 누구일까? 난 어째서 태어났을 때부터 비렁뱅이가 되어야 했을까?
솔직히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궤변론자가 당장 중요한 것은 살아온 과거가 아니라 살아갈 오늘이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의 내게 있어 출생에 대한 고민들은 그저 한낱 사치에 불과했다.
아! 우연과 운명을 들먹이며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사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그다지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날도 여느 겨울날처럼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나는 여느 때처럼 얇은 누더기만 걸친 채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고, 구걸 또한 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은 인심으로 인해 여느 때처럼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
왕초는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특히 힘없는 약자에게 있어 세상은 더없이 무자비하고 비열한 곳이다!”
그의 말마따나 세상은 힘없는 거지 아이에게 절대 그 따스함을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회색의 무심한 발걸음으로 내 곁으로 스쳐 지나갔고, 어쩌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라도 경멸에 찬 표정으로 이내 날 외면했다.
그렇게 추위와 굶주림이 절정에 달한 저녁 무렵.
‘따뜻한 국수 한 그릇만 먹고 싶다!’
난 연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시장 한복판의 국수집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힘이 없었고, 너무도 허기가 진 탓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소득도 없는 주제에 호랑이보다 무서운 ‘왕초’가 기다리고 있는 움막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우연인지, 혹은 운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만남이 시작된 것은.
다그닥! 다그닥!
네 마리의 붉은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난폭하게 달려왔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색 마차!
“으악! 갑자기 이게 뭐야?”
당연히 시장통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섰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둔 좌판들은 사방으로 깨지거나 흩어졌고, 몇몇 아낙과 아이들은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때, 누구보다 크게 놀란 것은 바로 나였다. 때마침 시장 한복판을 서성이고 있었던 탓에, 마차는 나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던 것이다.
피할 수 없었다. 마차가 워낙 빠르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굶주린 탓에 피할 힘이 없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 질끈 눈을 감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을 감은 뒤,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
사람들의 비명도 그쳤고, 오히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야, 이 미친놈아!”
정면에서 종이 울리는 것처럼 요란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뭐지? 내가 아직 안 죽은 건가?’
그제야 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말의 입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급히 옆으로 방향을 틀어 내 앞에서 간신히 멈춘 커다란 마차였고, 이어서 마부석의 성난 아저씨와 어느새 주위로 몰려든 낯익은 시장 사람들이 보였다.
“이, 미친 거지새끼야!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마차가 오는 게 안 보여?”
마부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부었다.
“아, 저…….”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차라리 이때 도망쳤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후, 마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냐?”
제법 점잖은 척했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의 목소리.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당사자인 나와 꼬마는 물론, 이어서 마차에서 내린 붉은 비단옷의 단정한 중년인, 그리고 주위에 모여든 구경꾼들도 모두 깜짝 놀란 것이다.
“아!”
“어라? 설마?”
모두는 나와 꼬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찬찬히 살피다가, 점점 황당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그 의심은 보면 볼수록 이내 감탄으로 변했고, 감탄은 다시 황당함으로 변했다.
꼬마의 나이는 여덟아홉 살 정도. 키는 이제 겨우 어른의 허리에 올 정도였고, 특히 큰 눈과 둥근 입술이 인상적인 귀여운 외모였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 꼬마의 외모가 황당하게도 나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물론 맨 처음 마부가 내게 욕을 퍼부었듯이, 녀석과 나는 언뜻 보기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녀석은 귀하게 자란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난 땟국이 질질 흐르는 시커먼 거지의 몰골이었다.
녀석은 옷차림도 깔끔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있었지만, 난 형체를 알 수 없는 회색의 누더기를 입고 머리도 산발이 되어 있었다.
또한 체격만 하더라도 난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녀석보다 조금 작아 왜소했고, 얼굴에는 살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언뜻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이목구비를 찬찬히 하나씩 뜯어보면 녀석과 나는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똑같았다.
“너, 누구냐?”
이윽고 꼬마 녀석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날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저, 저기…….”
우물쭈물. 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내 이름 따윈 관심사가 아닌 것 같았다.
녀석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날 바라보다가, 잠시 후 함께 마차에서 내렸던 중년인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아버지! 오늘은 내 아홉 번째 생일이니까, 시장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신다고 약속했지요?”
“그래. 우리 휘(輝)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마. 허허!”
중년인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도 난 지금의 이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장차 어떤 일들이 펼쳐질 것이며, 내 운명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녀석은 날 바라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나, 저놈 사줘요! 저놈이 갖고 싶어요!”
아버지라는 중년인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아니, 중년인만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 얼마냐? 얼마면 내 부하가 될래?”
아버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녀석이 날 가리키며 물었다.
만약 이때 내가 도망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혹은 죽어도 싫다고 거절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난 종종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가정일 뿐. 잠시 머뭇거리다가, 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 국수 한 그릇이요.”
장차 ‘그림자’라고 불리는 내 운명이 국수 한 그릇에 결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