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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2화)
제1장 운명의 시작(2)
2.
“요즘 낙양에서 제일 잘나가는 무가(武家)는 어디요?”
만약 당신이 낙양에서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필시 침을 튀기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 명색이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라면서 그것도 모르오? 그야 당연히 무림 사대가문 중에서도 최고를 다툰다는 화씨(華氏)세가 아니요? 우선 가주인 천인검(天仁劍) 화진(華眞)은 일검(一劍)으로 산과 바다를 가른다는 천하제일의 검객이자, 중후한 인품으로 세간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대협이시오. 또한 화씨 가문의 자랑인 육대검협(六大劍俠)은 개개인이 능히 일문(一門)을 세우고도 남을 고수들이며, 그 외에도 기라성 같은 수많은 고수들이 화씨 가문을 따르고 있소. 최근엔 검의 본가를 자처하는 무당파(武當派)에서도 한 수 양보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니…… 이 정도면 화씨 가문이야말로 낙양은 물론이고, 당금 무림에서도 제일 잘나가는 무가가 아니겠소?”
더 이상의 긴말이 필요 없는 검중 제일가, 낙양 화씨 가문!
낙양의 북쪽 외곽에 위치한 화씨의 장원은 과연 무림의 명문가답게 크고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일단 저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현판은 고풍스런 서체로 ‘검중 제일가(劍中 第一家)’라고 위풍당당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폭이 무려 사 장에 달하는 거대한 정문이 있었고, 이어서 좌우로 끝없이 길게 뻗은 높은 담벼락은 언뜻 작은 요새를 연상시켰다.
여기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반인들은 당연히 그 위세에 눌려 주눅이 들 것이다.
하지만 화씨의 위세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무사들의 삼엄한 경비를 통과해 정문을 지나면, 내부는 이보다 더 대단했다.
곳곳에 수많은 고수들이 매복해 있는 것은 물론, 우선 장원의 북쪽에는 여섯 채의 별채는 사층 높이로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건물 사이사이 솟아 있는 각종 장식과 조형물들은 모두 당대(唐代)의 고풍스런 양식이었으며, 게다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미로처럼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자칫하다가는 장원 내에서도 길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화려함과 품격을 동시에 갖춘 용담호혈(龍膽虎穴)!
이것이 바로 화씨 가문이 자랑하는 ‘화검장(華劍牆)’이자, 시장의 거지 꼬마가 앞으로 생활하게 될 곳이었다.
휘라는 소가주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에 들어선 직후, 거지 꼬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방에 가서 약속한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수!
맨 처음 밝혔던 대가를 받은 것이다.
당연히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거지 꼬마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세 그릇을 해치웠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국수를 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수를 씹지도 않고 물을 마시듯 목구멍으로 넘겼다.
“휘유!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정말 잘 먹는구나!”
휘라는 꼬마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배를 채운 다음은 목욕이었다.
본래 거지에게 있어 한겨울에 목욕이란 단어는 사치였다.
그것도 뜨거운 물을 사용한다던가, 젊은 시녀의 시중을 받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거지 꼬마는 목욕을 하는 한 시진 내내 얼굴을 붉히고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원치 않는 목욕 다음은 그나마 수월한 이발이었다. 이발은 남자 하인이 담당한 덕분에 그나마 부끄러움이 덜했다.
하지만 소가주가 특별히 자신과 같은 모양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주문했기 때문에, 거지 꼬마로서는 역시나 난생처음으로 머리를 단정히 자르고 비단 끈으로 깔끔하게 뒤로 묶어야만 했다.
마지막은 의복이었다. 사실 의복은 거지 꼬마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이자, 동시에 가장 나쁜 것이었다.
우선 안감에 솜이 들어가 있고, 겉은 부드러운 붉은 비단옷이라는 점에서는 더없이 좋았다.
게다가 소가주가 평소 입던 옷을 주었기 때문에, 크기도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그러나 비단이 워낙 귀한 물건이고, 또 난생처음으로 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지 꼬마로서는 오히려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소가주의 눈으로 보기에 이런 의식주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거지 꼬마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들이었다.
부드러운 비단옷은 오히려 답답하기만 했고, 머리끈이나 신발 등은 그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특히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것은 방금 전까지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시진에 걸쳐 이런 치장을 마쳤을 때, 거지 꼬마를 업신여기던 시종들은 모두 깜짝 놀라야만 했다.
환골탈퇴(換骨脫退)!
거지 꼬마의 변신은 단순히 단정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소주인인 휘라는 꼬마와 더욱 똑같아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처음의 초라한 행색과 대비되어 완전히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무래도 잘 먹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에 비해서는 키가 한 치가량 작았다.
체격도 조금 더 말랐고, 피부 또한 소가주에 비해 조금 더 까만 편이었다.
그러나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쌍둥이처럼 똑같았고, 특히 둥근 눈과 오뚝한 콧날은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정말 똑같다! 이게 정말 시장의 거지 꼬마야?’
‘기가 막히는군! 혹시 소가주님께 뭔가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시종들은 하나같이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역시 거지 꼬마를 데려온 당사자인 소가주였다.
잠시 후, 거지 꼬마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 소가주는 손짓으로 모든 시종들을 밖으로 물렸다.
그리곤 거지 꼬마를 넓은 방 한가운데 세워 둔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위아래로 찬찬히 모습을 살폈다.
“으음.”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몇 번을 봐도 똑같았다.
아직은 어색하게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지만, 거지 꼬마는 보면 볼수록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았다.
이윽고 소가주는 구석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몸을 뒤로 파묻으며 물었다.
“너…… 정말 볼수록 신기한 놈이구나. 이름이 뭐냐?”
제법 어른인 척했지만,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어, 없습니다.”
“뭐? 이름이 없다고? 그럼 다른 사람들은 널 뭐라고 부르지?”
소가주가 상체를 가까이하며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냥 꼬맹이요. 꼬맹이라고 부릅니다.”
“거짓말!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 사람이 어떻게 이름이 없을 수 있어?”
“지, 진짜로 이름이 없는데요.”
거지 꼬마는 목을 움츠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거지에게 제대로 된 이름이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러나 귀하게만 자란 소가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시 후, 소가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에휴! 너 몇 살이냐?”
“모르는데요.”
“뭐? 나이도 몰라? 그럼 생일은?”
“생일도 모릅니다.”
소가주의 말꼬리는 갈수록 높아졌지만, 이와 상관없이 거지 꼬마는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가주는 더욱 황당했다. 세상에 이름도 없고, 생일도 모르고, 나이마저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그가 알고 있는 상식에 비춰 봤을 때, 이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소가주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다! 내가 특별히 네게 나이와 생일을 주마! 오늘부터 넌 나랑 같은 아홉 살이고, 생일도 나랑 같은 일월 십오일이다! 어때? 좋지? 후후훗!”
그는 뭔가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아홉 살. 일월 십오일.”
거지 꼬마는 작게 되뇌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도 생년월일이 생기는 게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둘은 체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아홉 살 정도면 적당한 나이 같았다.
한참을 웃은 뒤, 소가주는 품에서 뭔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작은 유리병이었는데, 병 안에는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점액질의 액체가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저건 또 뭐지?’
거지 꼬마는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이게 뭔 줄 알아? 백리향(百里香)이라는 거야. 내가 아까 막내 숙부님께 아주 어렵게 받아 온 물건이지. 이것만 있으면 네가 어디에 있든 냄새로 찾아낼 수 있어. 후후후!”
이윽고 소가주가 손톱으로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곤 이어 손짓으로 거지 꼬마를 가까이 다가오도록 한 뒤, 병 속의 액체를 골고루 거지 꼬마의 얼굴에 뿌렸다.
그것은 미끈한 물 같은 느낌이었다.
약간 시원한 느낌이 들었는데, 백리향이라는 이름과 달리 아무리 킁킁거려도 별다른 냄새는 없었다.
‘분명 아무 냄새도 없는데? 무슨 냄새로 날 찾는다는 거지?’
더욱 어리둥절한 거지 꼬마.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소가주는 재차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하하핫! 촌놈! 너나 나 같은 사람들은 절대 백리향의 냄새를 맡을 수 없어. 그러나 특수한 약물을 복용하면, 네가 어디에 있든 백 리 안에서 냄새로 널 찾을 수 있지.”
소가주는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 웃음과 반대로 거지 꼬마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지만.
한참 후,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소가주는 거지 꼬마에게 더욱 해괴한 주문을 했다.
“너, 잠깐 신발 좀 벗어라. 발바닥 좀 보자!”
“네?”
“못 들었어? 발바닥 좀 보자고!”
소가주는 반강제로 거지 꼬마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곤 왼발을 들어 거지 꼬마의 발바닥이 위로 향하게 했다.
“잠깐 눈 좀 감아 봐라.”
소가주는 뭔가 상당히 들뜬 표정으로 계속 다음 행동을 재촉했다.
‘이건 또 무슨 엉뚱한 행동일까? 원래 잘사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하고 노나?’
거지 꼬마는 더욱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반항할 수도 없었다. 현재 거지 꼬마의 입장에서는 소가주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바로 거지 꼬마의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