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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3화)
제1장 운명의 시작(3)
잠시 후,
치이이익!
뜨겁게 달궈진 쇠가 고깃덩어리 같은 뭔가를 지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에 데인 듯한 화끈한 통증!
“으아아악!”
거지 꼬마는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불과 몇 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살이 타는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발바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끈거렸고, 발의 일부분은 아예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너무도 통증이 심해 차마 발바닥을 부여잡을 수도 없었으며, 당연히 눈물과 콧물이 거지 꼬마의 얼굴을 가득 덮었다.
“하하하핫!”
소가주는 거지 꼬마를 내려다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방금 전까지 방구석의 난로에 꽂혀 있던 기다란 쇠막대를 어느새 손에 든 채로.
“사, 살려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대체 뭘 잘못했다는 걸까?
아무튼 거지 꼬마는 앉은 자세로 발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고, 이와 반대로 소가주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걱정 마! 널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난 내 것에 이름을 새기는 버릇이 있거든. 너도 내 것이잖아? 그러니까 내 당나귀나 말과 마찬가지로 너도 발바닥에 내 이름을 새겼을 뿐이야. 하하하핫!”
이 말과 함께 소가주의 웃음은 더욱 커졌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소가주의 표정은 너무도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너무도 어린애 같은 그 표정으로 인해, 거지 꼬마는 오히려 더욱 공포를 느꼈다.
‘이름? 나도 당나귀라는 거야?’
그제야 거지 꼬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발바닥을 바라보았다.
[輝]―휘.
당연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의 이름 같았는데, 발바닥 정중앙에 동전만 한 크기로 붉은색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으아아앙!”
결국 거지 꼬마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상처는 물집이 잡히고 며칠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낙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낙인은 앞으로 그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언제까지고 영원히 남아 그를 괴롭힐 것이다.
소가주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울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 계속 생각해 봤는데…… 내 부하면서 이름도 없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휘영(輝影)이다. 나, 휘님의 그림자라는 뜻이지.”
“휘, 휘영?”
거지 꼬마는 코를 훌쩍이는 와중에도 자신의 이름을 나직이 되뇌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직 불에 데인 통증이 가시지 않아 눈물이 계속 나왔지만, 휘영이라는 이름은 한편으로 묘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지 자신도 남들처럼 이름이 생겼다는 기쁨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과 설레임,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함이 뒤섞인 기묘한 느낌이었다.
흡사 처음부터 정해진 어떤 운명이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느낌이랄까.
“그래, 휘영! 그리고 내 이름은 화무휘(華武輝)다! 이제부터 넌 내 것이니까, 만약 누가 널 괴롭히면 내 이름을 대도록! 하하하핫!”
소가주, 화무휘는 재차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휘영!
평범한 거지 꼬마가 ‘화무휘의 그림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었다.
3.
그림자 인생.
누군가의 대역이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휘영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입장,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누군가의 대역이 고맙기까지 했다.
일단 당장의 추위와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평생의 운명을 그깟 국수 한 그릇과 바꾼 것은 조금 너무한 것 아닙니까? 자신의 인생을 너무 싸구려 취급하신 것 같습니다.”
훗날 누군가가 휘영에게 이렇게 물었지만, 휘영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운 겨울에 며칠 간 굶어 본 적이 있습니까?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은 오직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지요. 게다가 전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어린아이의 몸이라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당장의 목숨도 부지할 수 없는 마당인데, 어떻게 감히 선택을 고민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난 아마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림자가 되어 더 좋은 점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린 휘영에게 있어 당장의 추위와 굶주림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암울한 장래였다.
어려서는 거지로 구걸을 하고, 젊어서는 한탕을 꿈꾸며 뒷골목의 건달패가 되어 험하게 살며, 그러다가 노후에는 늙고 초라해져 다시 장터에서 구걸을 하게 된다.
왕초를 비롯해 그가 주위에서 본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장래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면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공부를 하여 의식을 깨우칠 수 있었고, 부지런히 일하면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으며, 더 노력한다면 남들처럼 결혼도 하여 안정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겨우 국수 한 그릇에 주저 없이 자신을 화무휘에게 팔았던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고,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면, 차라리 그림자가 되어 다른 기회를 엿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화무휘의 부친, 화진이라는 중년인이었다.
언뜻 보기에 화진은 온화한 중년이었다.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팔불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휘영을 바라보는 화진의 눈빛에는 단순히 아들의 떼를 못 이기는 아버지가 아닌, 무언가 다른 느낌이 숨어 있었다.
그 다른 느낌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그 다른 느낌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인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다만 아주 짧은 순간 스쳐 간 그의 본능에 따르면, 그때 화진의 눈빛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와 화무휘가 만난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화진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만약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면, 화진은 나를 통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휘영은 이후에도 몇 번이나 이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그가 고민한다고 답을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화무휘의 그림자가 된 순간부터, 휘영의 일상은 예전과 전혀 달라졌다.
일단 오랜 거지 생활로 인해 몸에 밴 습관을 버렸다. 그 습관이란 힘없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축 늘어진 어깨, 항상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눈빛 등이었는데, 화무휘는 이런 습관들을 볼 때마다 크게 화를 냈다.
“넌 화무휘 님의 소유다! 이 화검장에서는 나 외에 누구도 명령을 내릴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그러니 매사에 자신을 가져라! 내 부하가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건, 곧 나 화무휘가 무시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야!”
비록 거지 습관을 없애는 게 당사자인 휘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휘영은 비굴한 습관을 버리고 당당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감 다음은 언행의 변화였다.
어목연석(魚目燕石).
물고기의 눈알과 연산(燕山)의 돌은 구슬이 아니지만 구슬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즉, 가짜를 진짜처럼 속인다는 뜻으로써, 화무휘는 휘영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과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도록 요구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화무휘 님을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휘영은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쳤지만, 화무휘의 고집도 대단했다.
“안 된다고?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넌 나랑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여기 있는 거라고! 넌 나랑 완전히 똑같아야 된단 말이야! 그래서 나중에 나 대신 공부하고, 나 대신 시금치나 당근 같은 맛없는 음식도 먹고, 또 내가 무슨 실수를 했을 때 나 대신 혼도 나야 돼!”
어찌나 화가 났던지 화무휘는 얼굴까지 붉게 상기되어 버럭 고함쳤다.
워낙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둘은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일종의 수직적인 관계였다.
때문에 휘영은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화무휘의 방에만 머물며 그의 언행을 연습해야만 했다.
표정이나 습관, 자주 사용하는 단어까지 익혀야 했고, 심지어 어른을 흉내 내는 화무휘 특유의 말투까지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익혀야만 했다.
하지만 단기간 동안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습관이나 언행이 아닌, 바로 휘영의 마음가짐이었다.
‘지금까지는 하루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살았어. 당장 굶어 죽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는 달라! 이제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영리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들은 흔히 큰일을 겪고 나서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달라진다.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는데, 지금부터의 휘영이 딱 이러했다.
다행히 휘영은 눈치가 없거나 둔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또래보다 훨씬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다.
다만 선천적으로 정이 많고, 거지생활을 하면서도 또래처럼 나쁜 물에 들지 않았을 뿐. 결코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하긴, 몸이 약한 아이가 눈치도 없고, 머리마저 나쁘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도 없었겠지만.
“비록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지만…… 저놈은 절대 악인이 될 수 없는 놈이다. 저놈은 영리하지만, 영악한 놈은 아니다.”
훗날 그를 가르친 스승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어쨌거나 그는 변했다.
아니, 변해야만 했다. 그는 어수룩한 거지 소년에서 화무휘의 영악한 그림자로 하루가 다르게 변신했다. 물론 화무휘가 하루 종일 곁에 서서 채근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 화검장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그는 화무휘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비록 나이도 어리고 모든 것이 낯선 그였지만, 그는 치밀하고 냉정해야만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결국 휘영이 화검장에 들어온 지 불과 보름이 지난 뒤.
마침내 휘영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느 정도 비슷하게 화무휘를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짜가 여전히 조금 어색했다. 게다가 키나 체격도 자세히 보면 진짜가 조금 더 크고 훌륭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언뜻 보면, 둘은 쉽게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화무휘의 그림자!
마침내 휘영이 제 이름처럼 또 다른 화무휘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