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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4화)
제2장 납치(1)


1.

밤새만이 간간이 울음을 터뜨리는 고요한 자정 무렵.
휘영은 오늘도 화무휘와 같은 침상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잠을 청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그 옆에는 화무휘가 새근새근 작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지만,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작게 몸을 뒤척였다.
‘다행히 휘는 생각보다 괴팍한 도련님은 아니다.’
그가 겪어 본 바에 의하면, 화무휘의 행동에는 가식이나 거짓, 혹은 악의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첫날 그에게 낙인을 찍은 것도 결코 어떤 가학적인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남들보다 조금 자기중심적이고, 또한 타인에게 ‘어렵다.’ 혹은 ‘안 된다.’라는 말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뒤척임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여기 있는 게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야. 이 추운 겨울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여기 있으면 먹고, 입고, 잠잘 걱정은 없겠지.’
그는 추운 겨울에 의식주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화무휘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쉽게 잠들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화무휘가 날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고 있는데, 왜 화진 님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고 있을까? 아무리 놀이라고 해도 이쯤 되면 한번쯤 꾸중은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오히려 화진 님은 화무휘의 분신이 생기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비록 현재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화진에게는 아들의 장난 외에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단, 그가 걱정이나 고민을 한다고 해서 어떤 특별한 답이 있는 건 아니었다.
또한 특별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고민과 별개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화무휘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그 백리향인지 뭔지 하는 냄새 때문에 도망치는 게 어렵다. 그리고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다. 그러니 차라리 고민하지 말고 여기서 화무휘가 시키는 대로 하자. 여기서 무슨 일을 해도…… 밖에서 추위에 떨다가 굶어 죽는 것보단 낫겠지.’
한참의 고민 끝에, 휘영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실 이제 그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가 화검장에 오고 이틀이 지난 뒤,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후견임을 자처하는 왕초가 화검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자 몇 푼을 손에 쥐어 주자 공손히 돌아갔고, 오히려 만에 하나라도 그가 돌아오면 다시 화검장으로 보내겠다고 굳은 다짐까지 했다.
솔직히 그도 왕초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함께 시장에서 구걸하던 자들이 친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장 살기 위해 필요에 의해 만난 사람들일 뿐.
이야기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의리나 정은 눈꼽만큼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겨우 금자 몇 푼에 자신을 팔아넘겼다고 생각하니…….
어린 그였지만 눈물이 핑 돌며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억지로 눈물을 참던 휘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둘은 주종관계였다.
화무휘는 상전이고, 자신은 일개 장난감이나 하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둘의 관계는 어쩐지 상전이 하인에게 집착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화무휘는 언제나 그를 곁에 두었으며, 어쩌다 그가 잠시라도 떨어지면 화무휘의 주위 사람들이 대신 크게 곤욕을 치렀다.
‘왜 그럴까? 단순히 자신의 소유물을 아끼는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다시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흥미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 때문만도 아니었다.
외로움!
어쩌면 화무휘는 그동안 외로웠던 것인지도 몰랐다.
녀석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가진 건 아니었다. 일단 녀석은 태어나자 모친을 병으로 잃은 처지였다.
게다가 모든 게 풍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귀하게 떠받들어졌지만, 함께 놀거나 함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또래가 없는 외톨이였다.
때문에 그 안하무인의 행동들은 어쩌면 외로움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몰랐다.
비록 그 우정의 표현은 제멋대로이고 양보가 없었다.
언제나 저지르는 것은 화무휘였고, 당하는 것은 언제나 휘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휘영은 화무휘에게 있어 처음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끼이이익!
적막을 깨고 돌연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 뒤꿈치를 들고 천천히 침상으로 접근하는 몇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휘영은 대번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은 화씨 가문의 소가주가 잠들어 있는 침실이었다.
시중을 드는 하인들은 모두 화검장에서 일한지 오래된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고, 또한 가주인 화진을 비롯한 몇몇 외에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이렇게 은밀하게 방에 들어왔다는 건 상대가 뭔가 좋지 않은 뜻을 가졌을 가능성이 컸다.
과연 그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잠시 후,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낯선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이건, 뭐야? 꼬마가 둘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완전 똑같이 생겼군. 혹시 쌍둥이인가? 이걸 어쩌죠?”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냐? 대체 누가 진짜야?”
“그렇다고 이놈들을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고……. 정말 환장하겠네요, 형님.”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지만, 둘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휘영이 화검장에 온지도 며칠이 지났지만, 넓은 화검장 내에서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몇몇에 불과했다.
일단 화무휘가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고, 휘영 자신도 대부분의 시간을 화무휘의 방에서만 보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겉으로는 새근새근 코를 고는 척했지만, 휘영도 상대처럼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그리고 밖에 있는 하인들이나 경비들은 모두 어디에 간 걸까?’
그가 짧은 소견으로 언뜻 생각해도 이 둘의 갑작스런 등장은 뭔가 상식에 맞지 않았다.
다만 현재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섣불리 움직여 괜히 녀석들을 자극하기보다, 일단은 자는 척 그들의 행동을 잠시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목소리를 잔뜩 낮춘 괴한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혹시 우리의 행동이 들킨 걸까요?”
“그건 아닐 꺼다. 여기까지는 전부 ‘그놈’의 예상대로가 아니었더냐? 아무래도 ‘그놈’의 정보가 뭔가 잘못된 듯하다.”
“음. 아니면 며칠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황당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그럼 어쩌죠? 일단 작전상 후퇴?”
“글쎄. 여긴 화검장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다. 만약 ‘그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린 평생 화검장의 대문도 지나지 못했을 거다.”
“그건 그렇지요. 만약 오늘을 놓친다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겠지요. 게다가 ‘그놈’도 오늘 안으로 반드시 꼬마를 데려오라고 엄포를 놓지 않았습니까? 젠장할!”
둘은 한참 동안이나 주변을 서성이며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다.
사실 둘의 목소리는 절대 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하고, 또 휘영의 귀가 남들보다 조금 밝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가 둘의 대화를 엿듣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휘영은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심 생각했다.
‘말투를 들어 보니 저 둘은 그다지 똑똑한 편은 아닌 것 같구나. 똑똑한 건 고사하고 오히려 뭔가 어수룩해 보이는 걸? 그런데 저들이 말하는 그놈은 누구일까? 보아하니 저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 같은데…… 말을 들어 보면 이곳 화검장과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화검장을 잘 알고 있는 내부의 사람 같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휘영은 더더욱 자신이 깨어 있음을 들켜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 두 명의 침입자들은 똑똑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에 그가 저들의 예상을 깨고 갑자기 깨어난다면, 깜짝 놀란 저들은 당황해서 오히려 자칫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저들의 뜻대로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눈치를 보아 뭔가 행동을 취하는 게 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이것이 짧은 순간 동안 휘영이 내린 결정이었다.
절대 어린아이라고 볼 수 없는 냉정한 판단!
‘시장에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 본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가?’
휘영은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거리의 불한당들, 특히 지금 저 둘 같은 어설픈 유괴범들을 떠올리며 내심 쓰게 웃었다.
그런데 이어진 상황은 휘영으로서도 조금 곤란한 것이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회의를 한 끝에, 휘영으로서는 가장 생각하기 싫었던 최악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할 수 없다. 우리야 그저 ‘그놈’이 시키는 대로 일만 처리하면 되지 않느냐? 어떤 녀석이 화무휘든 우리야 꼬마를 ‘그놈’에게 데려가기만 하면 그뿐이다.”
“아! 그냥 꼬마들을 둘 다 데려가자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후후후!”
휘영으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황당한 일!
그러나 휘영으로서는 미처 어떻게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별달리 대응할 방법도 없었고, 또 대응할 시간도 없었다.
갑자기 괴한이 목 부근을 손가락을 찔렀다고 느낌이 든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