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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5화)
제2장 납치(2)


2.

휘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한 기분이었다.
머리는 뭔가에 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웠고, 사지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법 영리한 휘영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도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가 겨우 상황을 이해한 것은 의식이 돌아오고도 한참 후, 정확하게 자각하진 못했지만 약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우선 손은 끈 같은 것으로 뒤로 묶여 있었고, 발 또한 마찬가지로 묶여 있었다.
눈은 안대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입 또한 헝겊 같은 뭔가로 막혀 있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열린 감각은 청각이었는데, 옆에서 ‘음, 음’ 하는 아이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화무휘도 같이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딜까?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진 않으니, 화씨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텐데……. 그런데 감히 화검장의 소가주를 납치해서 뭘 하려는 거지? 몸값이라도 요구하려는 건가?’
휘영의 머리는 복잡했다. 유괴라고 하기엔 저들이 너무 무모해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찾자니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분위기를 봤을 때 저들은 단순한 하수인이며,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 확실했다.
그때였다.
“아! 저 녀석이 이제야 깨어났나 보군!”
휘영의 귓가에 쇳소리가 섞인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이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갑자기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
휘영은 대번 고개를 돌리고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눈부심은 잠시였다.
눈꺼풀을 몇 번 크게 깜빡이자, 이내 적응이 되어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졌다.
우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화무휘의 얼굴이었다.
녀석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안대가 풀린 채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크게 놀란 것 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 다치진 않은 것 같구나.’
그제야 휘영은 그나마 다소 안도하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인적이 끊긴 듯한 낡은 사당(祠堂)이었다.
그래도 사방이 넓고 천장이 높은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꽤나 부귀영화를 자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온통 거미줄투성이요, 군데군데 허물어진 천장은 흐릿한 밤하늘이 보였으며, 사방에는 몇 개의 횃불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어 그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분위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자, 정면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명의 중년인이 보였다.
‘역시 처음 보는 사람들이군. 누구지?’
그는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한 생각이 들어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다.
중년인들은 둘 다 덩치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지저분한 인상이었다.
머리도 산발에 가깝고 옷도 다소 남루했는데, 전체적으로 외모나 복장이 그다지 깔끔한 인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머리가 크고 눈 사이가 조금 멀어, 그다지 총기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잠시 후, 조금 더 덩치가 큰 중년인이 다가와 휘영의 입에 물린 헝겊을 풀었다.
“이것 참 황당하구나. 네가 화무휘냐?”
그가 히죽 누런 이를 드러내어 사나운 인상을 풍기며 물었다.
‘말을 보니 역시 누가 진짜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씨 가문의 소가주이지, 이름도 없는 시장의 거지는 아니겠지?’
그나마 휘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보름 전의 그였다면 울음을 터뜨렸거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움츠러드는 습관을 버리고 화무휘의 당당한 언행을 집중적으로 연습했던 그였다. 게다가 주위가 어둡고 을씨년스러웠기 때문에, 약간은 겁을 먹은 표정이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다.
“너? 지금 네가 나보고 감히 너라고 했느냐?”
그는 오히려 질문을 한 중년인에게 크게 호통을 쳤다.
“뭐야? 이 꼬마 녀석 좀 보게?”
“누구 보고 꼬마라는 거냐? 난 검중 제일가인 화검장의 소주인이시다! 네놈 따위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고귀한 신분이란 말이다! 그러니 당장 이 줄을 풀고,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지 못할까?”
중년인이 기가 막힌 듯 되물었지만, 휘영의 호통은 오히려 더욱 서릿발처럼 매서워졌다.
어른처럼 살기마저 느껴지는 당당한 말투. 어찌나 당당했던지 오히려 어른인 중년인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둘 뿐만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안대가 풀려 있던 진짜 화무휘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휘영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화무휘와 휘영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똑같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머리는 푸른 비단 끈으로 단정히 넘겼으며, 또한 주위마저 어두운 탓에 더욱 분간을 하기 어려웠다.
즉, 외모와 목소리, 말투, 심지어 작은 표정까지 진짜와 똑같으니…….
오늘 처음 휘영을 보는 두 중년인으로서는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잠시 후, 중년인들은 다시 휘영의 입을 막은 뒤, 대청 구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엥? 뭔가 이상하게 꼬이는 거 같은데? 혹시 저 건방진 꼬마 놈이 진짜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재수 없이 건방지긴 한데…… 그 꼬마 녀석이 원래 제멋대로고 싸가지가 좀 없다면서요?”
“뭐, 귀하게만 자란 부잣집 도련님들이 다 그렇겠지. 그런데 저놈은 더 심한 것 같군.”
둘은 휘영과 화무휘를 힐끔거리며 한참 동안이나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둘의 대화를 엿듣는 도중, 휘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둘은 분명 뭔가 모자란 바보들 같은데…… 어째서 그놈이라는 배후의 인물은 저런 녀석들에게 일을 맡겼을까? 저런 놈들이라면 꼬리를 잡힐 텐데 말이야. 당연히 뒷골목에서 조금 웃돈을 주더라도 더 솜씨가 좋고 똑똑한 녀석들을 시키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저 어리석은 형제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실소마저 터져 나왔다.
혹시 일부러 꼬리를 잡히기 위해 저런 어설픈 자들을 시킨 걸까?
휘영은 언뜻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롭게 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전히 어리석은 유괴범들의 동태를 살피며, 그는 슬며시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화무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곤 화무휘가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가볍게 오른쪽 눈을 깜빡여 신호를 보냈다.
‘……?’
화무휘는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하지만 휘영이 계속 눈짓을 하며 그와 유괴범들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제야 그는 뭔가를 이해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휘영이 자기만 살겠다고 고자질했다면 내가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 녀석은 지금 날 감싸고 있구나!’
화무휘는 휘영에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휘영이 전적으로 화무휘를 위해 진짜처럼 행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면 저들에게 쓸모가 없어질까 두려워, 자신이 살기 위해 짐짓 진짜인 척 행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속내를 모르는 휘영은 그가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크게 감동했다.
잠시 후, 덩치가 조금 작은 동생 같은 녀석이 다가온 뒤, 이번엔 화무휘의 입에 물린 헝겊을 풀고 짐짓 흉악하게 물었다.
“역시 네놈이 가짜겠구나. 넌 이름이 뭐냐?”
“너? 지금 감히 누굴 손가락질 하면서 반말을 하는 거냐? 네놈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게 이따위 행동을 할 수 있는가?”
화무휘 또한 목소리나 외모는 어린애지만, 그 기운은 어른을 능가할 정도로 당당했다.
“아이 주제에 역시 듣던 대로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만약 네가 진짜 화무휘라는 조부의 이름 정도는 당연히 알겠지?”
다시 중년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내가 왜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되는가? 또한 그분의 함자는 감히 너 따위의 입에서 언급될 것이 아니다!”
“뭐, 뭐야? 너 따위?”
역시 화무휘는 진짜답게 휘영보다 더욱 위풍당당하게 상대를 꾸짖었다.
“허……!”
중년인들은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기가 막혔다. 저 녀석들이 정말 아홉 살짜리 애들이란 말인가?
혹시 이걸 장난으로 알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걸까?
당연히 중년인들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휘영은 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교만한 표정을 짓더니, 여기서 한 술 더 떠 나중에는 아예 지그시 눈을 감아 버렸다.
두 중년인은 뒤늦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 이런 싸가지 없는 꼬마를 봤나?”
“너, 인마! 혼 좀 나고 싶어? 몇 대 맞고 싶냐?”
당장 소년들의 팔이나 다리라도 한군데 부러뜨릴 듯한 험악한 분위기!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핫! 과연 오만방자한 꼬마로구나!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역시 화진의 자식이란 말인가?”
어디선가 불쑥 웃음기가 섞인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귀신의 음성처럼 음산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하게.
‘누구지? 귀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모습은커녕 인기척도 없었다. 그런데 그 누군가의 웃음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다, 당신인가? 장난은 그만하시지요!”
덩치가 큰 중년인이 겨우 용기를 짜내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다.
물론 허세였기 때문에 두 다리는 자기도 모르게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돌연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그친 것이다. 그리고 대신 갑자기 천장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번쩍였다.
아니, 번쩍이는 것 같았다. 분명 네 명이 되는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누구 한 명 정확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다.
잠시 후,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복면인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위치는 납치범들과 꼬마들의 중앙. 그는 옆구리에 장검을 멘 채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러웠다.
‘아! 저게 바로 휘에게 들었던 무공이라는 건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귀신처럼 움직이는구나!’
휘영은 새삼 눈을 크게 뜨고 복면인을 자세히 살폈다.
복면인은 언뜻 보기엔 평범한 체격이었다.
키는 오 척 팔 촌가량이었고, 검은 무복은 몸에 착 달라붙어 약간 마른 듯하지만 잘 발달된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마치 잘 제련된 보검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다만 웃을 때 가래가 끓는 듯한 쇳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건강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자, 중년인들은 안도하며 공손히 말했다.
“헤헤, 드디어 오셨군요. 조금 놀랐습니다요.”
비굴하면서 동시에 복면인을 두려워하는 기색.
“흥! 저 꼬마 놈들에게 놀아나는 꼴이 아주 가관이더군.”
복면인은 날카롭게 안광을 번뜩이며 두 꼬마를 노려보는 한편, 듣기 거북한 쇳소리로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덩치 큰 중년인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꼬, 꼬마가 둘이라는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어찌 됐든 우린 분명 약속한 대로 꼬마 놈을 데려왔습니다요. 게다가 저놈들은 나이답지 않게 여간 영악한 놈들이 아닙니다.”
그는 뭐라 길게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복면인이 귀찮다는 듯 중간에 가볍게 손을 내젓는 바람에,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입을 도로 다물었다.
“흥! 그랬지. 난 화씨의 소가주를 납치하라고 했지, 다른 꼬마를 납치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지. 확실히 약속은 지켰군.”
복면인은 시선을 여전히 두 꼬마에게 고정시킨 채, 더욱 차갑게 중년인들을 비웃었다.
그리곤 이어서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더니 중년인에게 성의 없이 던졌다.
중년인 중 형이 깜짝 놀라며 허겁지겁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곤, 둘은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며 크게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휘영은 생각했다.
‘역시 저자들은 일개 하수인들이었구나. 대체 저자는 누구일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건 이제부터 더 어려워질 것 같구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중년인들은 뭔가 어수룩한 느낌이었지만, 저 복면인은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는 견고한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서로 원하는 거래가 끝났으니 중년인들은 더 이상 이 기분 나쁜 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헤헤, 그럼 소인들은 이만 물러가겠…….”
그런데 두 중년인이 희희낙락하며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나려는 찰나였다.
석상처럼 고정돼 있던 복면인의 팔이 움직였다.
아니, 이번에도 역시 복면인의 움직임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그의 팔이 움직였다는 느낌만 겨우 받았다.
복면인의 옆구리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그 빛은 중년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고, 이어서 희희낙락 웃고 있던 두 중년인의 머리가 그대로 목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쾌검.
중년인들은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르는 듯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 또한 여전히 웃는 모습이었고, 심지어 머리를 잃은 몸통은 여전히 밖으로 나가려는 듯 움직이기까지 했다.
“분명 난 약속한 대가는 지불했다. 그러나 그 대가를 지불한 뒤, 네놈들을 살려 보내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다.”
복면인은 데굴데굴 굴러온 중년인의 머리를 발로 툭 차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쿵!
한참 후에야 두 중년인의 몸통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뜻밖의 살인에 놀란 두 꼬마 또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길게 지르다가 곧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