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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6화)
제2장 납치(3)


3.

“음…….”
휘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점은 몸이 조금 무겁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점혈을 당해 강제로 의식을 잃었고, 거기다가 살인을 목격해 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상태였다.
때문에 몸이 이상한 것은 당연했고, 오히려 지금처럼 깨어난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몸과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은 더욱 또렷해졌다.
비록 시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는 흥건한 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피를 보자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졌던 것이다.
잠시 후, 어둠 저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깨어났느냐? 과연 들은 것처럼 대담한 녀석이구나.”
길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방금 전 그 복면인의 목소리였다.
‘들은 것처럼? 날 알고 있다는 뜻인가?’
휘영은 언뜻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도,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소리가 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복면인은 저 멀리 그늘 속에서 두 구의 시체를 의자로 삼아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은 깍지를 껴서 무릎에 올린 편안한 자세였고, 심지어 바닥에는 그가 마셨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술병까지 하나 나뒹굴고 있었다.
세상에 시체를 포개어 의자로 삼고, 그 위에서 태연히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니…….
“우웩!”
휘영은 결국 참았던 헛구역질이 쏟아졌다. 멀건 위액이 식도를 타고 역류했고, 위액 특유의 쓰고 신맛이 대번 목구멍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훗! 강한 척해도 역시 아직 애는 애구나.”
그 모습을 본 복면인은 실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휘영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시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잠시 후 복면인이 이 장 근처까지 다가오자, 헛구역질을 억누르고 당당히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심정은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울 수 없었다.
‘진짜 화무휘라면 언제나 당당하게 행동하겠지? 내가 여기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끝까지 화무휘인 척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이놈 봐라? 시체를 봤으니 울음이라도 터뜨릴 줄 알았는데…….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로구나! 넌 이름이 뭐냐?”
“화무휘!”
휘영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짧게 대답했다.
복면인은 그의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진한 살기를 풍기며 낮게 코웃음쳤다.
“흥! 아직도 거짓말을 할 셈이냐? 둘이 비록 생긴 건 똑같다만…… 진짜 화무휘는 나이가 어려도 무가의 자손답게 일찍부터 무공의 기초를 연마했지. 그러나 내가 잠깐 맥을 짚어 본 바에 의하면, 넌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몸이더군. 아까 그 어리석은 장씨 형제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까지 속이는 건 어림없다!”
그제야 휘영은 더 이상 상대를 속일 수 없음을 깨닫고 움찔했다.
“자, 다시 한 번 묻겠다. 네 진짜 이름은 뭐냐?”
잠시 눈싸움을 벌인 뒤, 복면인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이름 따윈 없습니다. 다만 얼마 전에 휘영이라는 이름이 생기긴 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휘영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인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상대의 시선에 맞섰고, 동시에 상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눈여겨보았다.
단, 겉으로는 당당한 척해도 말투는 자기도 모르게 다소 높임체가 되었지만.
‘상대가 내 정체를 알면서도 날 죽이지 않았다는 건 뭔가 다른 뜻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잘만 행동하면,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도 있다. 정신 차리자, 꼬맹아!’
그는 내심 스스로를 격려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진실을 얘기한 까닭인가? 아니면 복면인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가 직접 본인의 입으로 진실을 얘기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일까?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복면인의 살기는 다소 누그러졌다.
“휘영이라……. 화무휘의 그림자라는 뜻인가? 아무튼 어린 녀석이지만 기개 하나만큼은 칭찬해 주마. 그런데 넌 저 시체들이 무섭지 않느냐?”
“솔직히…… 난 처음 저들을 봤을 때부터 저들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게다가 난 한겨울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시체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니 새삼 시체를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휘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복면인은 더욱 놀라우면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무섭지는 않으냐?”
“만약 당신이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아마 진즉에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날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까 그들도 말로만 날 위협할 뿐, 막상 내 몸에는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 또한 당신이 사전에 그들에게 절대 화무휘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겠지요. 혹시 당신은 당장 나와 화무휘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지 않은가요?”
“호오? 그래서 내가 두렵지 않다는 거냐?”
“물론 조금 두렵긴 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휘영은 주눅이 들기는 고사하고, 갈수록 자신감을 얻고 당당히 대답했다.
“하하하핫!”
복면인은 돌연 천장을 올려다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그 갑작스런 웃음에 휘영이 놀라 움찔했지만,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 동안이나 배를 잡고 웃기만 했다.
이윽고 복면인이 겨우 웃음을 그치고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담한 놈이구나! 누가 널 보고 시장의 거지 꼬마라 생각을 하겠는가? 자칭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라 잘난 척하는 놈들도 너처럼 대담하진 않을 터! 화진은 시장에서 아들의 장난감을 하나 얻었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그건 장난감이 아니라 대단한 보물이구나!”
그 말을 들은 휘영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저자는 내 정체를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왜 여태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을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어 날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나?’
게다가 휘영이 더 의문인 것은 방금 복면인이 한 말이었다.
‘시장에서 아들의 장난감을 얻었다? 그 말은 곧 화진이 나에 대해서 저자에게 말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저자는 역시 화씨 가문과 아주 가까운 사이란 뜻이 아닌가? 그런데 왜 화씨 가문의 소가주를 납치한 거지?’
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웃음을 그친 복면인이 재차 물었다.
“왜 화무휘인 척했느냐?”
휘영은 잠시 생각을 접어 두고, 여전히 담담히 상대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야 가짜라는 걸 알면 날 당장 죽였을 테니까요. 날 납치한 자들에게 필요한 건 진짜 화무휘이지 시장의 거지 꼬마가 아니지 않습니까?”
“호오? 그것까지 예상했었나? 그렇다면 왜 진짜 화무휘를 가짜로 몰아붙이지 않았나? 너 정도의 재치라면 오히려 진짜를 가짜로 몰아 자신이 살아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복면인의 질문이 거듭 이어졌다.
그러나 휘영은 더 이상 속이는 걸 체념한 듯, 상대를 노려보다가 순순히 모든 걸 밝혔다.
“솔직히 진짜를 가짜로 몰아붙일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째서냐?”
“우선 난 겨우 며칠 동안 진짜와 함께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날 단숨에 가짜라고 알아봤듯이, 조금이라도 화무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라면 쉽게 진짜를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또한?”
“만약 진짜 화무휘가 죽는다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히 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를 죽이고 당장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화씨의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날 찾아내어 소가주의 죽음에 대해 보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난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여 시간을 끄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복면인은 휘영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지 휘영이 나이에 비해 의젓하거나, 혹은 어른 같은 어휘를 구사해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