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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7화)
제2장 납치(4)


솔직히 지금 휘영의 말투는 평소 화무휘가 쓰는 어른 같은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을 뿐이었다.
복면인이 놀란 것은 휘영의 냉정함과 통찰력.
즉, 지금 휘영이 보여 주고 있는 행동들은 제법 경험이 풍부하다고 자부하는 그가 보기에도 치밀하고 냉정했기 때문이었다.
“보면 볼수록 놀랍군. 어린놈이 이렇게 영리하다니……. 네 녀석 덕분에 나도 지금 실로 오랜만에 말이 많아지는구나. 몇 가지만 물어보마. 넌 아까 저 장씨 형제들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또 어떻게 알았느냐?”
복면인은 이제 호기심을 뛰어넘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뒷짐을 지고 있던 자세를 바꿨다. 장검을 가운데 품고서 팔짱을 낀 것이다. 언뜻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은 태연한 행동.
그러나 그걸 본 휘영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 또한 간단합니다. 내가 며칠 간 화무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화씨 가문은 수많은 일류무사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들은 너무도 쉽게 나와 화무휘를 납치했지요.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 경우입니다.”
“두 가지나 된단 말이냐? 어디, 계속해 보거라.”
“첫째, 화씨 가문의 무사들이 화무휘가 자랑한 것보다 훨씬 별로이거나, 혹은 저들이 화씨 가문의 무사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무공의 고수들일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어수룩한 행동을 봤을 때 그것은 별로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렇지. 솔직히 저놈들은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류 건달패들이니까. 그나마도 영리함과는 거리가 먼 삼류 중의 삼류들이지.”
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경우, 납치범들의 뒤에 화씨 가문의 내부인이 있을 경우입니다. 아마 그들은 내부의 도움을 받아 쉽게 잠입해서 납치를 했겠지요. 게다가 저들이 화무휘의 팔목을 비트는 간단한 위협조차 하지 못한 것을 볼 때, 이는 그들이 화씨 가문 내부의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았음이 더욱 확실합니다. 즉, 그들은 단순한 심부름꾼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다면 뒤에서 명령한 누군가는 일이 성공한 이후에 그들을 죽여 입을 막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탓일까? 화무휘는 어느새 당당하고 능동적으로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하하하핫! 저 어리석은 장씨 형제보다 네가 훨씬 똑똑하구나! 이건 너무 정확해서 내가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복면인은 이번에도 천장을 올려다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한참 후, 그는 돌연 웃음을 뚝 그치더니 정색을 하고 다시 본래의 차가운 어투로 돌아와 물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묻겠다. 넌 내가 정말로 무섭지 않느냐? 이제 질문을 다했으니…… 난 이젠 언제든 널 죽일 수 있다!”
“아니, 아무래도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휘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씻은 듯 사라진 듯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처음 상대가 팔짱을 꼈을 때는 혹시나 하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계속 천장을 올려다보며 웃는 모습을 보니, 휘영의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복면인이 더욱 차갑고 음산하게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가 널 죽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느냐?”
“지금 나와 화무휘를 구해 줄 사람이 여기에 도착했으니까요.”
“널 구해 줄 사람? 여기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누가 널 구해 준단 말이냐? 설마 귀신이라도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복면인은 어쩐지 휘영을 비웃는 듯한 어조로 되물었지만, 휘영은 여전히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칠 전에 화무휘가 내게 말하길, 무공이라는 걸 익히면 이목이 일반인보다 몇 배에서 몇 십 배는 발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단순히 이목만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통각 등의 오감과 심지어 육감마저 발달하게 되지. 하지만 넌 무공을 전혀 모르지 않느냐?”
“물론 난 무공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무공을 익혔습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라 아주 뛰어난 고수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반응을 봤을 때, 지금 이 근처에 날 구해 줄 사람이 온 것이 확실합니다.”
“내 반응?”
복면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영악한 꼬마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복면인은 이런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휘영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 복면인의 생각을 눈치챈 듯, 휘영은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당신은 뒷짐을 진 여유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팔짱을 끼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오른손은 칼의 손잡이를 잡고 언제든 뽑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내가 말할 때마다 천장을 바라보고 웃는 척했지만, 눈으로는 계속 주변을 경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는 곧 당신이 주위에 누군가가 있음을 눈치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당신이 경계하는 자라면 당연히 나와 화무휘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고 또 누구겠습니까?”
“허!”
복면인은 일순 기가 막혔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납치범의 말에 또박또박 대꾸하는 것만으로 부족해…….
내 의도를 정확히 추리했으며, 또 날 통해 주변의 상황까지 완벽해 파악했다? 이게 정말 아홉 살짜리 거지 꼬마에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는 놀라움을 뛰어넘어 문득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복면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대신 그는 차가운 눈으로 한참 동안 휘영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휘영의 목을 베려는 듯이.
‘왜 그러지? 젠장! 괜히 말했나?’
휘영이 다소 움츠러들었지만, 복면인은 한참 동안이나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살기도 잠시,
“크하하하핫! 네 말이 맞다! 이거 오늘 너무 놀라는구나.”
그는 돌연 살기를 풀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저러지?’
휘영이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그는 한참 동안이나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한참을 웃었을까. 돌연 그가 웃음을 뚝 그친 뒤,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달빛이 스며드는 천장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저 꼬마의 말이 맞소! 그대는 대체 언제까지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있을 셈이오?”
처음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밤새들의 울음소리마저 그쳐 그저 조용하기만 할 뿐,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묘한 침묵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휘익!
돌연 한줄기 바람이 일어 그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돌연 천장에서 붉은 그림자가 하나 뚝 떨어졌다.
그는 휘영이나 화무휘처럼 화씨 가문의 상징인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서는 시퍼렇게 빛나는 장검을 들고 있었으며, 언뜻 날카로운 칼날 같은 예리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약간 마른 듯했지만 복면인처럼 단단해 보이는 체격이었으며, 머리칼에 새치가 조금 섞인 것으로 보아 나이는 삼십 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 추정됐다.
다만 그가 나타난 위치가 휘영과 검은 복면인의 중간, 즉 복면인과 마주보는 위치였기 때문에 휘영의 눈에는 그 뒷모습만 보였다.
진한 살기를 풍기며 서로를 노려보길 얼마, 이윽고 검은 복면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냉혈검(冷血劍) 상관운(上官雲)! 화검장의 자랑이라는 육대검협 중 일인이자, 육대검협 중에서 가장 침착하고 심기가 깊으며, 또한 가장 의롭다는 냉혈검을 직접 뵙게 되다니…… 이거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말은 정중했지만, 그 안의 어투는 냉소가 가득한 비웃음이었다.
상관운 또한 정중하지만 비웃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흥!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 대범함은 칭찬해 줄 수밖에 없구려. 감히 우리 화검장의 소가주를 납치하다니……. 그 배짱만은 인정하는 바이오.”
복면인은 재차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천하의 냉혈검에게 칭찬을 받다니……. 과분한 칭찬이지만 듣기 싫지는 않구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그게 뭔가?”
상관운이라 불린 사내는 여전히 차갑게 대꾸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복면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당신은 내 계산보다 조금 빨리 날 찾아냈소. 그대가 아무리 냉정하고 심계가 깊은 상관운이라고 해도…… 솔직히 난 내일 밤에나 날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소가주가 납치되고 불과 한 시진 반 만에 여길 찾아내다니…… 대체 그 비법이 무엇이오?”
상관운은 여전히 복면인을 응시한 채,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저 휘영이라는 꼬마의 단서가 도움이 됐소. 꼬마가 남긴 무취의 특수한 향기가 날 여기까지 이끌었거든.”
“무취의 특수한 향기? 혹시 백리향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소. 저 휘영이라는 꼬마가 도망갈 것을 대비해, 휘아가 꼬마의 몸에 백리향을 묻혔거든. 따라서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냥개에게 백리향의 해약을 먹이면, 적어도 이 낙양 근처에서는 숨을 곳이 없소.”
“후! 생각지도 않았던 거지 꼬마가 이런 큰 변수가 될 줄이야.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군.”
복면인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쓰게 대꾸했다.
그런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휘영은 계속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처음 납치를 당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둘의 대화를 들을수록 그런 의심은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이건 단순히 돈을 노리고 화무휘를 납치한 게 아니다. 어쩌면 화무휘는 미끼이고, 그 안에 더 복잡한 무언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납치극이 의외로 생각대로 쉽게 풀리자, 오히려 더욱 불안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둘의 대화를 계속 듣자, 이러한 불안은 혹시나 하는 추측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과연 그 설마 하는 추측은 사실이었다. 이윽고 복면인이 다시 상관운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안 해 봤소? 난 처음부터 저 꼬마들이 안중에 없었고, 대신 내 원래 목표가 당신일 거라는 생각 말이오.”
“그건 무슨 말이지?”
그제야 상관운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별거 아니오. 일부러 어리석은 삼류 건달을 이용해 납치극을 벌였고, 또 꼬마에게 백리향이 묻어 있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뭐,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없느냔 말이오.”
복면인은 혼자 중얼거리듯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상관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이전처럼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 보니 ‘냉혈검’이란 별호는 당신이 아니라, 저 휘영이라는 꼬마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구려. 꼬마야, 넌 지금 내가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복면인은 상관운의 어깨너머, 휘영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