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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8화)
제2장 납치(5)


뜻밖의 질문을 받은 탓에 휘영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 그는 이내 어른을 흉내 내는 화무휘의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입니다. 일단 납치극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어설펐습니다. 만약 진심으로 화무휘를 납치할 생각이었다면 더 똑똑한 하수인들을 고용해서, 좀 더 치밀하게 일을 꾸몄을 것입니다. 또한 납치를 성공한 다음에도 이런 사당에 오래 머물지 않고,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 준 일련의 행동들을 봤을 때, 당신은 일부러 단서를 남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오! 역시 이해와 상황 판단이 빠른 녀석이구나. 어디, 계속 말해 보거라.”
복면인은 즐겁다는 반응마저 보이며 휘영을 재촉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납치범들은 나와 화무휘에게 조금의 해를 끼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화무휘의 말에 따르면 화검장은 수많은 무사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는데, 저 어설픈 납치범들은 너무도 쉽게 우리를 납치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이상한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지금 복면을 쓰고 있는 당신은 화검장의 내부인이거나, 혹은 화검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사실 나만큼 화검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아마 대가주 화진이라 할지라도 나만큼 화검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할 것이다.”
복면인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여 순순히 동의했다.
‘대가주보다 화검장을 더 잘 안다? 그럼 저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휘영은 더욱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계속했다.
“화무휘의 말에 따르면, 화무휘의 부친을 비롯한 화검장의 주요 인사들은 얼마 전에 멀리 출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육대검협의 막내이자, 가장 차분하신 상관운 님이 대가주님을 대신해 화검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소가주의 납치극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상관운 님은 단서를 찾아 납치범들을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진짜 생각했던 의도! 즉, 당신은 처음부터 상관운 님이 납치범들을 찾아 화검장을 나오도록 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휘영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이에 대한 복면인과 상관운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우선 상관운은 상대의 목표가 처음부터 자신이었다는 말에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머리는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고, 분노와 흥분, 두려움과 불안이 함께 섞인 탓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물론 휘영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등을 지고 있어 정확한 반응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반면 복면인은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관운과 휘영을 향한 눈빛에서는 승자의 여유가 느껴졌고, 특히 휘영을 바라볼 때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저런 통찰력은 누가 가르쳐 준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재능에 수많은 사람들을 겪으면서 얻어진 경험이 더해져야만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이지. 그런 점에서 볼 때 저 꼬마는 거지 생활을 하며 고생한 게 오히려 큰 복이 되었구나!”
그는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뱉다가, 나중에는 아예 박수까지 치며 크게 기뻐했다.
그리곤 잠시 후, 그는 상관운을 향해 여유롭게 말했다.
“저 꼬마의 말은 대부분 맞소. 다만 몇 가지 부족한 점을 덧붙이자면…… 일단 당신은 자존심이 무척 강하오. 그러니 소가주가 납치된 것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테고, 범인을 잡기 위해 직접 화검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소. 물론 당신도 이번 납치극이 뭔가 이상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오. 어설픈 납치범들이 화검장에 잠입한 것으로 보아,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것까지도 눈치챘을 테지. 그러나 내부인의 소행이라면 당신은 더더욱 화검장의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터. 따라서 당신은 소수의 사람만 대동하거나, 혹은 단신으로 여기에 왔을 것이오.”
“역시 처음부터 네 목표는 나였다는 말인가?”
상관운이 매섭게 쏘아붙이듯 물었다.
복면인은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리곤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오른손으로 천천히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걸 본 상관운은 더욱 굳어진 어투로 대꾸했다.
“제법 치밀한 계획이군. 그러나 한 가지 잊은 게 있다!”
“훗! 내가 잊은 것? 그게 뭔가?”
“난 냉혈검 상관운이다! 대가주 화진 님을 제외하고, 감히 날 검으로써 제압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없다!”
자신감과 패기가 가득한 당당한 외침. 이어서 그는 여전히 상대를 노려본 채로 천천히 오른손의 장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복면인은 돌연 피식 웃었다.
“자신이 지나치군. 과연 그럴까?”
“……!”
“화씨의 검법을 너무 믿지 마라. 화씨 검법에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넌 내게 더욱더 쓰라린 패배를 맛볼 것이다.”
복면인은 충고를 하듯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뭔가 아련하면서도 씁쓸한 기운이 깃든 것 같아, 휘영과 상관운은 상대의 정체에 대해 더욱 의문이 커졌다.
‘과연 저자의 정체는 뭘까? 대체 화씨 가문과는 무슨 원한이 있는 걸까?’
휘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휘영이 본 것은 여기까지였다.
“이제부터 험한 꼴을 보게 될 터. 꼬마는 잠시 자고 있어라.”
상관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왼손을 목 뒤로 굽혀 휘영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어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휘영은 목 근처에 이상한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사지가 마비되었다.
무림의 무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점혈의 수법이었다. 다만 그를 납치했던 어설픈 건달들은 복면인에게 그 수법을 배워 직접 혈을 눌러야 했는데, 상관운은 절세의 고수답게 거리와 상관없이 일종의 지풍으로 혈을 눌렀던 것이다.
그런데 상관운의 점혈은 조금 이상했다. 분명 그는 휘영을 재울 것처럼 말하고 점혈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휘영은 수면혈을 제압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사지가 마비되고, 말도 나오지 않았으며, 눈도 떠지지 않았지만,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진 않았다.
오히려 의식이 더욱 또렷해지고, 외부의 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들렸다.
‘설마 상관운 같은 고수가 실수를 할 리는 없다. 날 보호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이 상황을 내가 계속 듣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한 것인가?’
휘영은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대번 상관운의 의도를 깨달았다.
아마 상관운은 오늘 자신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고 검을 뽑았다. 하지만 복면인이 아무런 함정을 준비하지 않고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복면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래서 상관운은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지금의 이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리고 출신이 비천하고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휘영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휘영의 수면혈을 제압한 척했던 것이다.
둘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잠시 터질 듯한 침묵이 흐르다가, 이윽고 짧은 기합을 신호로 둘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휘영은 무공을 전혀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지금 오직 소리로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그가 소리로만 듣기에도 둘의 대결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처럼 치열했다.
채채채채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청명한 쇳소리가 흡사 아름다운 선율처럼 그의 귓전을 맴돌았다.
둘의 가벼운 발소리는 타악기를 두드리듯 경쾌했으며, 둘이 토해 내는 거친 숨소리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휘영은 자신의 처한 상황도 잠시나마 잊고 둘의 대결에 호기심이 동했다.
‘무림의 고수들이 싸우는 모습은 어떨까? 화무휘의 자랑처럼 정말 하늘을 날고, 산을 무너뜨리며, 땅을 꺼지게 만들 정도로 대단할까? 검기며, 장풍이며, 무지막지한 강기까지…… 정말 신의 싸움처럼 엄청날까?’
그는 소리에 집중한 가운데 가만히 둘의 대결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심장은 크게 쿵쾅거렸다.
분명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일 텐데, 그는 두렵기는커녕 당장이라도 검을 쥐고 둘의 대결에 끼어들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구경한 싸움이라곤 시정의 잡배들이 벌이는 막싸움이 전부였다.
지금처럼 아름다운 선율 대신 거친 욕지거리만이 가득했고, 결과는 대부분 덩치가 더 크거나 먼저 기선을 제압한 쪽이 승리했다.
그러나 강호 무사들의 싸움은 시정잡배들의 싸움과는 전혀 달랐다.
특히 생사를 놓고 어느 하나가 죽을 때까지 끝장을 본다는 점은 일반의 싸움과 달리 비정하기까지 했다.
약 반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귓가를 맴돌던 아름다운 선율이 돌연 거짓말처럼 멈췄다.
아니, 선율만이 아니라 시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대신 푸욱 하는 거슬리는 소리, 철그렁하고 검을 놓치는 소리,
그리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숨소리만이 휘영의 귓가에 들려왔다.
상관운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 믿을 수 없다. 네가 어떻게 화씨의 검법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의문에 찬 어투.
복면인은 약간은 씁쓸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말했잖은가. 화씨의 검법에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낭패를 볼 것이라고.”
“말도 안 된다. 화검장의 수많은 무사들 중에서도 너 정도로 화씨의 검법을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단순히 검술로만 겨룬다면 아마 화진 님조차 네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터! 네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날 노렸는가?”
“그대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나 또한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에 불과할 뿐. 다만 죽기 전에 한 가지 알려 준다면…….”
가장 중요한 대목!
그러나 휘영은 이 부분을 들을 수 없었다.
복면인은 상관운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너무 작게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의 사주다.”
휘영이 그나마 들은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 그럴 리가…… 어째서 그분이 날?”
다시 상관운이 놀란 어투로 묻자, 복면인은 더더욱 쓰게 대답했다.
“당신은 다 좋은데 너무 강직한 게 흠이다. 때론 너무 강직한 것이 주변에 짐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잠시 후, 쿵, 하고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 뒤, 상관운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회한에 잠긴 듯한 복면인의 긴 한숨이 들렸지만, 이 또한 오래 가지는 않았다.
잠시 후, 복면인이 휘영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두근!
‘설마, 내가 깨어 있는 걸 들킨 건가?’
휘영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더욱 심하게 쿵쾅거렸다.
자신은 사지가 마비되어 도망칠 수도 없다. 게다가 믿었던 상관운마저 쓰러진 마당이어서 더 이상 도와줄 사람도 없다.
그러나 복면인은 몇 걸음 걸어오다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휘영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녀석…….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만약 그의 뜻대로 이 녀석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면, 녀석은 가장 믿음직한 그의 아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녀석이 그의 제어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장차 가장 위험한 적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뭐, 어떤 상황이 되건 나완 별로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냉소적이고 자조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기대감마저 깃든 묘한 어투.
과연 그 복면인은 누구인가?
그가 언급한 ‘그’라는 사람은 또 누구이며, 대체 오늘의 한바탕 소란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휘영은 모든 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어, 그저 답답하고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어서 한 줄기 바람이 불더니, 더 이상 복면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때 또한 바람처럼 신묘하게 사라진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난 뒤, 오래된 사당에는 두 명의 움직이지 못하는 꼬마, 그리고 세 구의 시체만이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