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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9화)
제3장 천인검 화진(1)
1.
그날은 화검장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었다.
단순히 명예가 손상된 정도가 아니었다.
화진이 가주로 취임한 이래. 아니, 어쩌면 화검장이 처음 현판을 내걸고 강호에 나선 이래, 가장 위기의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소 낙양의 맹주, 더 나아가 검중 제일가를 자처하던 화검장이었다.
대가주 화진은 현 무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덕망이 높은 고수였으며, 화진 외에도 기라성 같은 수많은 검객들이 따르고 있는 화검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화검장의 소가주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가 겨우 돌아온 것이다.
그나마도 화검장에서 먼저 소가주를 찾은 것이 아닌, 누군가 익명의 제보 덕분에 외곽의 오래된 사당에서 소가주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화검장의 자랑인 육대검협 중 일인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냉혈검 상관운!
비록 육대검협 중 서열은 막내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실력이 가장 낮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나이가 가장 어리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그의 검술은 대가주 화진을 제외하면 화검장 내에서도 맞수가 없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화검장의 소가주가 납치되었고, 육대검협 중 일인이 같은 장소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세찬 풍파가 되어 조용하던 낙양 일대를 삽시간에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무림에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도 둘 이상 모이면 이 소식으로 호들갑을 떨었고, 특히 상관운이 뒷골목의 삼류 건달들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된 것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 출타 중이었던 대가주 화진과 나머지 오대검협이 화검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들은 낙양에서 무려 이백여 리나 떨어진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는데, 소식을 접하자마자 한달음에 화검장으로 돌아왔다.
망연자실(茫然自失)!
상관운의 시신을 접한 화진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바로 이 망연자실이었다.
화진뿐만이 아니었다.
상관운과 함께 생사를 맹세한 나머지 다섯 명의 검협 또한 시신 앞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은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또한 믿고 싶지도 않았다.
검에 관해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성적이고, 누구보다 침착하고 차분한 막내였다.
또한 누구보다 의협심이 높고, 동시에 자존심이 강한 막내였다.
때문에 그런 그가 차디찬 시신이 되어 눈앞에 누워 있는 것을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올 리는 없는 법!
게다가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혼에 후사마저 없었기 때문에, 언제까지 장례식을 미뤄 둘 수도 없었다.
화진과 그 일행들이 돌아오고 이틀 후, 상관운의 장례는 무림의 법도를 따르면서도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장례식장은 대륙 최초의 사찰로 유명한 백마사(白馬寺)였고, 화진과 다섯 명의 아우가 상주가 되어 직접 모든 것을 주관했다.
다만 상관운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화무휘와 휘영은 나이가 아직 어리고, 또한 큰일을 겪은 상태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평소 불교에 심취했던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는 불교식으로 진행되었다.
화진이 직접 개식(開式)을 선언한 뒤, 백마사의 주지승이 삼귀의례(三歸依禮:불(佛寶), 법(法寶), 승(僧寶)의 삼보에 돌아가 의지한다는 의식)를 행했다. 그런 뒤 고인과 가장 친했던 오대검협의 셋째 윤지평(尹持平)이 눈물로써 약력보고(고인의 약력을 간단히 설명함)를 했고, 이어서 착어(着語:고인을 위해 주례승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 창혼(唱魂:극락에서 편안히 잠들라는 것으로 주례승이 요령(搖領)을 흔들며 고인이 혼을 부름), 헌화(獻花), 독경(讀經), 소향(燒香:모든 참례자들이 향을 태우며 고인의 명복을 빔) 등의 절차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해질 무렵 화진이 다시 폐식(閉式)을 선언했고, 유골은 화장하여 쇄골(碎骨)한 다음 백마사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장례식의 절정은 이러한 일상적인 불교식 절차가 아니었다.
모든 예식이 끝난 뒤, 수백 명의 조문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화진은 단상에 올랐다.
그리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분연한 표정과 어투로 다짐했다.
“나, 화진! 지금 이 자리에서 천지신명께 맹세한다! 내 아우 상관운을 죽인 원수, 내 모든 것을 걸고 기필코 그 원수를 처단할 것이다! 설사 흉수가 귀신이라도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것이며, 이 맹세는 내가 죽더라도 내 아들, 내 손자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뒤, 그는 준비해 간 단검으로 가볍게 손목을 긋고, 흘러나오는 선혈을 술잔에 담아 독주와 함께 단숨에 들이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어서 나머지 다른 오대검협과 일부 인사들 또한 차례로 단상에 올라 피가 담긴 독주를 들이켜고 복수를 다짐했다.
기필코 복수를 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
그러나 이때 그의 선언은 단순히 복수에만 의미가 있지 않았다.
그는 전 무림인들이 협조하여 흉수를 처단할 것을 촉구하였는바. 이는 바로 무림맹(武林盟), 혹은 무림연합(武林聯合)이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거대집단의 시초였다.
냉혈검 상관운!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림은 서서히 거대한 변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2.
상관운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흘 뒤 정오 무렵.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듯, 장례가 끝난 이후 사흘째 계속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렸던 것이다.
쏴아아아!
화진은 화검장의 정원에 마련된 작은 정자에 앉아, 그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만약 평소였다면 정자에 앉아 내리는 비를 안주 삼아 벗들과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시나 노래를 읊조렸을 것이고, 혹은 검도(劍道)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평소와 전혀 달랐다.
불과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눈자위는 아직도 붉게 충혈 돼 있었고, 너무 가라앉은 분위기로 인해 설사 가족이라도 함부로 말을 걸기가 어려워 보였다.
마시고 있는 것 또한 며칠 새 흐트러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차였고, 그나마도 차갑게 식는 동안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작은 다과상을 가운데 두고 그의 맞은편에 붉은 비단옷을 입은 쉰 살가량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 또한 침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열혈검(熱血劍) 위충악(爲忠渥).
지금 화진과 마주 앉은 중년인의 이름이었다. 키가 크고 약간 마른 체형의 소유자였는데, 눈썹과 수염이 신선처럼 길게 뻗어 다소 깐깐한 느낌마저 주었다.
나이는 화진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화진이 엄연히 일문의 가주였기 때문에 공손히 예를 갖추고 앉아 있었다.
위충악은 여러 모로 죽은 냉혈검 상관운과 대비되는 자였다.
우선 육대검협 내의 서열만 하더라도 상관운과 정반대인 첫째였다.
성격 또한 차분한 상관운과 반대로 불처럼 뜨거웠고, 또한 한번 맡은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수할 정도로 집요했다.
그러나 이처럼 정반대의 성격이기 때문에, 위충악이 상관운의 수사를 책임지게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관(官)과 무림은 서로 관계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화검장은 자신들의 복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만큼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또한 자존심이 낮지도 않았다.
따라서 화검장은 상관운의 흉수를 자체적으로 조사할 수밖에 없었던 바, 일명 ‘독사’라고 불릴 정도로 열성적이고 집요한 위충악이야말로 가장 수사의 적임자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멍하니 내리는 빗줄기만 감상했을까. 마침내 화진이 위충악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위 형님도 고생이 많구려. 며칠 사이에 많이 초췌해진 것 같습니다.”
억지로 진정시키고는 있지만 상당히 가라앉은 어투.
“제가 아무리 마음고생이 심하다한들 대가주님만 하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대가주님이야말로 이제 그만 마음을 가다듬고 옥체를 보존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대가주님은 대가주님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지금도 대가주님을 따르고 있는 수많은 가솔들과 제자들을 잊지 마십시오.”
위충악도 침통함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다시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화진이 이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위 형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위 형님의 말씀대로 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몸!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있을 수 많은 없지요. 아무래도 상관 아우님의 사건 이후, 저도 모르게 제가 조금 나약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조금 억지를 부린 측면도 있습니다만…… 대가주님도 일문의 수장이기 이전에 감정을 지닌 한 명의 사람이십니다. 사실 상관 아우님의 사고는 화검장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애도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위충악이 더욱 공손히 화진을 위로했다.
그제야 화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 식은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