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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10화)
제3장 천인검 화진(2)


굳이 찻물을 다시 따를 필요는 없었다.
그가 내력을 찻잔으로 옮기자, 찻물은 김이 모락모락 나더니 금세 마시기 좋을 정도로 따뜻해졌다.
“그나저나 상관 아우님의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가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위충악은 송구한 듯 쓰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조금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범인이 상관 아우를 유인하기 위해 소가주님을 납치한 것은 쉽게 밝혀냈으나…… 그 외의 것은 도통 오리무중입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어떤 무공으로 상관 아우를 죽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음. 위 형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분명 어려운 일일 테지요.”
화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며 위충악의 말은 계속되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단서인 장씨 형제가 죽은 것이 문제입니다. 소가주님의 증언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들은 일개 하수인인 것 같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들이 죽음으로 인해 배후 인물을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사라져 버린 셈이지요.”
“본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입장을 바꿔서 내가 그 원수라고 해도 장씨 형제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더 곤란한 것은 사당에 남은 무공의 흔적입니다.”
그러면서 위충악은 어쩐지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화진은 더욱 호기심이 동해 상체를 가까이하며 되물었다.
“대부분의 일류 무공들은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지요. 그리고 위 형은 경험이 풍부하신 덕분에 그런 작은 단서만 보고도 상대의 무공을 파악하는 데 일가견이 있으시고요. 그런데 그 흔적이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위충악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찻잔만 만지작거리다가, 잠시 후에야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분명 사당에는 두 사람이 격전을 벌인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위충악은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무공의 흔적이 우리 화검장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몇 번이나 검토해 보았습니다만, 그것은 분명 우리 화검장의 무공이었습니다. 그것도 약간 변형되거나 어설픈 수준이 아닌, 화검장의 무공을 정통으로 극한까지 익힌 듯한 흔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장씨 형제들이 소가주님의 침실까지 잠입한 경로를 살펴보아도, 내부의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 순간 화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래서 위 형님이 망설이셨더군요. 혹시 화검장 내부의 인물이 원수란 말씀이십니까?”
위충악도 상대처럼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원수가 화검장 내부의 인물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하에 상관 아우님을 해할 정도로 고수이며, 동시에 우리 화검장의 무공을 정통으로 익힌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선 상관 아우님을 검으로 제압할 수 있는 자는 화검장에서도 가주님을 비롯해 몇 명뿐입니다. 그러나 그때 가주님을 비롯한 우리 오대검협은 전부 출타 중이었지 않습니까? 따라서 화검장 내부의 인사 중에 막내를 제압할 수 있었던 자는 실질적으로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정말 어렵군요. 혹시 독이나 함정을 이용하여 상관 아우님을 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해서 화진이 되물었지만, 이번에도 위충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혹시나 하여 사당을 샅샅이 살폈습니다만, 독이나 함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휴! 그렇다면 현재 유일한 단서이자 목격자는 당사자인 두 아이뿐이란 말입니까?”
길게 한숨을 짓는 화진.
사실 그가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가 보지 않아서 위충악에게 물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상관운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사당에 달려가 꼼꼼하게 현장을 살폈다.
그러나 그도 별다른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위충악에게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차를 들이켠 뒤, 화진의 중얼거리는 듯한 낮은 말은 계속되었다.
“아마 휘아가 많이 놀랐을 겁니다. 겉으로는 어른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활발한 개구쟁이입니다만…… 녀석은 태어나자마자 제 어미를 잃고 외롭게 자란 아이입니다.”
“저 또한 심히 걱정입니다. 특히나 소가주님께서 상관 아우님의 죽음을 자칫 본인의 탓으로 여기시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소가주님도 어떻게 보면 원수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인데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화무휘를 봐온 위충악 또한 근심이 가득한 기색으로 맞장구쳤다.
재차 침묵이 흘렀다.
원수에 대한 각종 의문들, 그리고 화무휘에 대한 걱정들로 인해 둘 다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잠시 후, 위충악이 표정을 바꿔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마지막 단서가 하나 남았습니다.”
“마지막 단서?”
“그렇습니다. 얼마 전 휘 도련님이 데려온 휘영이라는 거지 꼬마 말입니다.제가 며칠 간 유심히 지켜보니, 녀석은 나이나 신분에 맞지 않게 제법 영리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발견했을 당시에는 소가주님과 마찬가지로 점혈을 당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어쩌면 녀석이 뭔가를 보거나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음. 휘영이라…….”
화진은 휘영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렸다.
그 사건이 있은 직후, 화무휘는 휘영을 더욱 가까이 두고 신뢰하고 있었다.
이젠 단순히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휘영이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 줬다고 생각하여, 화무휘는 그를 거의 형제처럼 대하고 모든 걸 함께하고 있었다.
“제가 그 휘영이란 꼬마를 만나 보겠습니다.”
위충악이 넌지시 말했지만, 화진은 잠시 고민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그 휘영이라는 꼬마를 만나 보겠습니다.”

3.

‘역시 괜히 모두의 존경을 받는 건 아니구나!’
휘영이 화진을 가까이서 본 첫 느낌은 상대가 과연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만한 대인(大人)이라는 것이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졌다.
절로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위압감도 대단했고, 그 안에 담긴 절제된 예의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점은 그런 대단한 상대가 자신처럼 미천한 자에게까지 최소한의 예를 갖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는 화진과 구면이었다.
맨 처음 시장에서도 보았고, 화검장에 들어온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에게서 숱하게 화진에 대한 칭송을 접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화무휘마저 배제하고 단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 그와 화진이 있는 곳은 화검장 내에 마련된 작은 정자.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들이 쌓인 작은 다과상을 가운데에 두고,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상대와 마주 앉아 있었다.
물론 아무리 좋아하는 과자가 놓였다고 해서 휘영이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는 시선조차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허허! 네 이름이 휘영이냐? 휘아가 너무 제멋대로 이름을 지어 준 것 같구나. 아무튼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편히 앉아 있거라.”
화진이 먼저 인자하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제야 휘영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과자로 손을 가져갔다.
단, 여전히 긴장하여 자신이 어떤 과자를 집었는지, 심지어 과자가 어떤 맛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지만.
화진은 시작부터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휘영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처음엔 웃음을 섞어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처음 화검장에 왔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혹은 요즘 휘영과 무슨 놀이를 하고 노는지 등등……. 상관운과 관련된 것이나 휘영이 조금이라도 대답이 곤란한 질문은 일체 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휘영이 그런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괜히 이런 쓸모없는 것만 물어보려고 저분이 직접 날 불렀을 리는 없겠지?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거야. 분명 일단 겉으로 보기엔 정말 좋은 사람 같다. 그러나 사람의 속내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 내가 거지생활을 통해 경험해 본 것에 따르면…… 언제, 어떻게 바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사람이었다! 게다가 화무휘가 분신을 만드는 걸 저 사람이 왜 허락했는지, 난 아직도 그 의도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모든 걸 알게 될 때까진 절대 쉽게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
휘영은 겉으로는 상대에게 빠져든 척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둘이 언제까지 소소한 얘기만 할 여유는 없었다.
또한 휘영도 이제 곧 상대가 본론을 시작하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과연 얼마 후, 마침내 화진이 표정과 어투를 바꾸고 진지하게 물었다.
“네가 우리 휘아와 함께 상관 아우님이 죽은 현장에 있었다고 들었다. 맞느냐?”
“그렇습니다.”
휘영은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진은 상대를 안심시켜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점잖게 물음을 계속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휘아는 당시 점혈을 당해 상관 아우님의 최후를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넌 어떠냐? 발견 당시에는 너 또한 휘아처럼 점혈이 되어 있었다만…… 혹시 점혈이 당하기 전이라도 뭔가 특별한 것을 보거나, 듣거나, 혹은 느낀 것이 있느냐?”
휘영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내심 곰곰이 생각했다.
화진은 분명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죽은 상관운은 그의 아우뻘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금 이처럼 질문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휘영은 계속 망설이기만 할 뿐,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일단 휘영은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세상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겉으로는 점잖지만 악마보다 더 나쁜 사람도 있고, 또 반대로 겉으로는 나쁘지만 실제로는 남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사람도 많이 있다.’
게다가 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바로 살인범이 남긴 말이었다.
‘분명 범인은 내부인이거나 화검장과 매우 크게 연관이 있는 자였다. 또한 그는 화씨의 검법을 너무 믿지 말라고 죽은 상관운에게 말했었고, 이는 단순히 화씨의 무공을 뜻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말한 화씨의 검법은, 이곳 화검장의 모두를 믿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즉, 그가 생각하기에 화진 또한 엄연히 화검장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가 계속 우물쭈물하자, 화진이 다시 부드러우면서도 넌지시 말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다. 어떤 것이든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한참의 고민 끝에, 휘영은 다시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죄송할 것 없다. 너도 갑작스런 사건에 크게 놀랐을 텐데, 내가 오히려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구나.”
화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휘영을 위로했다.
이후 화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소소한 화제로 돌아가, 화검장의 생활이나 휘영의 과거에 대해 한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시종이 나타나 외부의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바람에 화진은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화진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넌 이제부터 더 이상 시장의 꼬마가 아니다.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자, 내 아들의 유일한 친구이다. 나 또한 너를 그저 남으로만 여기지는 않을 터! 이제부터는 휘아와 함께 공부하거라. 그리고 지난 과거를 잊고 열심히 노력하여, 일개 거지 따위가 아니라 천하의 큰 인물이 되어라!”
진심인 것 같았다. 휘영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아비의 것처럼 따뜻했고, 입가의 미소에는 온화함만이 가득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결국 휘영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 냈다. 영악해지자고 스스로 몇 번이나 다짐했던 휘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크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화진의 얼굴에는 따뜻한 가운데서도 뭔가 다른 기색이 숨겨져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어서 휘영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 차가운 비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