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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



생존 1권(1화)
part 0. 눈을 뜨고(1)


“아…….”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천장이었다. 반쯤 몽롱한 상태에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굉장히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은 기분. 그래서인지 눈꺼풀이 보통 때보다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어쩐지 몸도 욱신거리고. 아니, 욱신거린다기보다 저려 온다는 것이 맞았다.
마치 급격한 운동을 한 후 느끼는 근육통 같은 감각. 하지만 어제 운동 같은 것은 한 적이 없었기에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잠을 잘못 잤나? 잠버릇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몸도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더 누워 있을까 생각했으나 오늘은 아침 9시에 약속이 잡혀 있었다. 아까 눈을 떴을 때 어둑어둑했으니 늦은 시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장소가 1시간 거리니 빨리 준비하는 편이 좋았다.
그는 일어나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눈가를 비볐다. 눈을 비빈 후에도 여전히 어둑한 것이, 아침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대인 것 같았다. 불을 켤 필요성을 느낀 그는 바로 근처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어?”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형광등이 나갔나? 별로 오래 쓴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럼 정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불을 켜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으로 나가서 물이라도 한 잔 먹을 생각이었다. 어둡긴 해도 걷는 것에 이상은 없었으니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겨우 다섯 걸음이나 갔을까, 갑자기 부스럭 소리와 함께 발목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뭐지?’
의아함에 들어 보니, 먼지와 이상한 실 같은 것이 엉켜 있는 봉투였다. 안을 만져 보니 대충 라면 봉지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거 이곳에 둔 적 없는데. 게다가 이런 먼지라니.’
그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집안일을 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바쁜 아버지나 4살이나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이 하는 것도 무리였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몫이 되었다. 요리, 청소와 같은 다른 집안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또래보다는 훨씬 깨끗한 성격이었고, 결코 방 안에 먼지가 쌓일 정도의 물건을 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상했다.
자산의 방에 이런 먼지투성이의 낯선 물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놓은 것이 아니라면 가족 중 누군가가 그랬겠지. 그럼 왜? 게다가 이 먼지 양은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냐. 하지만 내가 그렇게 잤었을 리가 없는데… 어제 그렇게 피곤한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 시간이면 가족 중 아무나 깨우러 왔을 텐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단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이다. 근데 어제와 방의 상태가 너무 달랐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다 좋아. 그런 것은 전부 제쳐 두고 가족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런 물건을 놓은… 내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황급히 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엄마? 엄마! 아빠! 아라! 아라야! 거기 있어?! 대답해!”
쾅쾅! 쾅!
문을 두들기면서 소리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너무 조용했다. 항의를 하는 이웃의 소리도 없다. 그러고 보니 정말, 아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새소리, 밖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자동차의 소리… 그 어떤 소리도. 단순히 새벽이라서?
정말로 그런 걸까?
“읏!”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 문을 두들겨서 그런지 어딘가를 잘못 때린 것 같다. 무언가에 긁힌 듯 따끔거리는 손날을 거두면서도 그 긁힌 무언가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에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충격을 받았다.
“못…….”
그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못이 박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문 가장자리에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나오지 못하게, 혹은 밖에 있는 ‘무언가’가 이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리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누가 자신의 방에 못질을 했단 말인가? 왜, 어째서? 그는 어지러운 머리로 애써 생각했다.
설마 강도라도 들어와서…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묶어 놓거나 죽이는 것이 훨씬 편한 방법인데 쓸데없이 방에 못질을 할 이유가 없었다. 같은 이유로 살인마 같은 다른 범죄자도 아닐 것이고 정신병이 있는 미친놈이 했다고 하기에는 못질이 너무 꼼꼼했다.
이 정도로 못질을 많이 했다면 소리도 요란했을 텐데 왜 자고 있던 자신이 깨지 못한 것도 이상했다.
‘도대체 누가 못질을?’
그는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방문을 쳐다보았다. 어둑한 방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빼곡한 못들이 보였다. 그런데 문득, 문 맨 밑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종이?’
먼지에 덮여 있고 가느다란 식물 줄기가 살짝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 종이였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종이를 들었다. 종이에는 급히 휘갈겨 쓴 것 같은 글씨체로 간단히 쓰여 있었다.

조심해. 아무도 믿지 마.

동생의 글씨체였다.
‘조심해……? 믿지 말라니, 무엇을?’
그의 동생이 적은 종이로 확실해졌다. 못질을 한 존재는 틀림없이 그의 가족이었다. 그럼 왜? 무엇 때문에? 조심하라고 한 것을 보니 무언가 위험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위급 상황이라도 벌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왜 더더욱 그를 깨우지 않았을까? 위급 상황이 일어났다면 깨워서 같이 도망치는 편이 훨씬 더 좋지 않아? 위급 상황이어서 한 행동이라기에는 이상하다. 아들 방에 못질을 하고 문 밑에 조심하라고― 아무도 믿지 말라는 쪽지를 넣는 위급 상황이란 뭐지? 화재? 지진? 강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머릿속이 지독히도 혼란스럽다. 단지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주변의 상황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창문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밖을 제대로 확인해 보려는 의도였지만 창문이 있던 곳에 칭칭 붙여진 두꺼운 청 테이프의 모습이 그를 멈추게 했다. 창문조차 막혀 있었다. 안에서 테이프로 꼼꼼하게 막은 창문의 모습에 그의 안색이 더 창백하게 변했다.
문도 못질되어 있고 창문도 테이프로 막혀졌다. 아마 저 테이프는 가족들이 못질하기 전에 한 거겠지. 하지만 왜? 왜? 도대체 왜!
그는 어느새부터인가 가늘게 떨리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먼지투성이의 방, 문의 못질, 창문의 테이프, 정전 그리고 그가 오직 내는 소리만 존재하는 짙은 침묵… 모든 것들이 그에게 불안과 혼란을 주었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꿈이야. 이건 그냥 악몽이야.
그러나 문의 못에 긁힌 손에서 흘러내리는 약간의 피와 고통이 그를 현실로 이끌었다. 꿈에서 아플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는 몇 분의 시간이 흐른 후 흔들리는 눈동자로 눈을 떴다. 외면하고 눈을 감아 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따끔거리는 상처의 호소를 무시하고 그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괜찮아… 괜찮아, 진정하자. 침착해…….’
분명 상황은 무언가 이상하고 불길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가족들이 자신을 깨우지 않고 이렇게 못질을 하고 가야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를 버린 것은 아니다.
쪽지까지 남기지 않았는가. 또 아까 봉지에 들어 있던 것은 라면 봉지였다. 즉, 먹을 것을 놔두고 간 것이다. 그가 깨어나면 살아갈 수 있도록. 음식을 챙겨 줄 정도의 시간이 있으면서도 쪽지가 너무 짧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유가 있겠지.
어쨌거나 그의 동생 특유의 글씨체는 분명했다.
그리고 애초에 방문만 못질해서 나가는 것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창문이 테이프로 단단히 막혀 있기는 했지만 테이프를 뜯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테이프를 뜯고 창문을 연다고 해도 3층이나 되는 높이라 조금 껄끄럽지만, 조심스럽게 기어 내려가면 된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이 방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든 다시 가족과 연락하는 것. 그것이 현재 자신의 머리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상한 일투성이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그거다.
명확히 해야 할 일을 정해서일까 그는 조금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자 우습게도 허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는 아마 최소 하루, 이틀은 잠만 잤다.
최소 그 정도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면 물건들에 먼지가 이렇게나 쌓여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사실 겨우 배가 조금 고픈 정도로 멀쩡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만 마찬가지로 그것도 가족을 만나게 되면 병원 검사든 뭐든 해서 알 수 있을 터다.
라면이라도 부셔 먹을 생각으로 그는 아까 들었던 라면 봉지를 꺼냈다. 그러다가 곧 이런 먼지투성이 방 안에서 먹다가는 라면과 같이 먼지도 먹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의 테이프를 뜯어 열고 환기를 시킬까 싶었으나 관뒀다.
가족들이 테이프와 못으로 창문과 문을 막은 것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일단 상황 자체가 뭔가 이상하니 최대한 얌전히 있기로 했다. 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을 생각하면 이미 늦었겠지만.
그래도 일단 최소한의 정리는 하고 먹자는 생각에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켰다. 건전지 형식이라서 그런지 형광등과는 달리 불이 들어왔다. 환한 불빛이 방을 비췄다.
그는 인조적인 빛으로 인해 펼쳐진 방 안의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와 그 근처를 제외하고 전부 얇고 가는 덩굴 식물 같은 것으로 조금씩 덮여 있었다. 회색 먼지로 덮여 잘 알아볼 수 없는 흰 봉투들과 밝은 빛깔의 연녹색의 식물이 얽혀 있는 모습은 묘하게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아름다움보다는 전보다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먼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식물이라니…….’
그의 가족은 3층으로 된 빌라에 살고 있다. 근데 가장 높은 3층에 있는 자기 방에 식물이 자랄 정도라면… 다른 층은? 다른 곳은 어떻지? 게다가 비정상적으로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와 그 주변은 먼지가 하나도 없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누군가 와서 그곳만 청소하고 갔을 리가 없다.
‘그럼 정말, 이건 도대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새로운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속 이해할 수 없는 상황만 일어나기에 도리어 현실감이 떨어져 침착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는 라면 봉지를 하나 꺼내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힘을 주어 라면을 잘게 부순 후 하나씩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문득 책상에 불을 켜 둔 스탠드 옆의 전자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자동으로 유리 안에 있는 종이의 숫자가 넘겨지는 것으로, 달력과 날짜, 시간 세 개가 표시되는 시계였다. 꽤 비싼 걸로 지난해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받은 물건이다.
그는 그 시계를 보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시계의 달력은 4월 2일에서 멈춰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전기는 끊겨 있었다.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저 시계도 형광등이 끊긴 것과 똑같은 시간에 멈췄겠지.
……그런데 왜 4월 달이지?
그가 잠든 날은 3월 15일이었다. 무려 18일의 공백.
“이게 무슨……?”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마 시계가 전기가 끊기기 전에 고장이라도 났던 걸까. 자신이 기억하는 바로는 지금까지 고장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1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 방에서 자신이 잠만 잤다는 사실 또한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뭐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기껏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금 울렁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으나 손은 오히려 차가워졌다. 그러나 곧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그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후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마지막 라면 조각을 입에 넣었다.
‘시계는 고장 난 거겠지. 말이 안 되잖아. 하루나 이틀이라면 모를까 18일이라니.’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했다. 그래도 18일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어떻게 사람이 영양 공급도 없이 열흘도 넘게 잠만 자겠는가. 사람이 물 없이 살 수 있는 최장 시간은 3일 정도가 한계였다.
그는 시계가 고장 났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시선을 돌려 방 안을 살폈다.
자신으로 인해 흐트러진 먼지들의 흔적만 보일 뿐, 쥐나 벌레 같은 것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도 궁금했지만 그것 또한 당연히 알 수 있을 리가 없기에 그는 그에 대한 생각은 껐다. 쥐 같은 것이 있다면 라면이나 다른 먹을 것이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냥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언제로 정할까. 문이나 창문을 막아 놓은 것을 보면 밖이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계속 방 안에 있을 수도 없으니.’
그는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가족이 쪽지를 남기고 어딘가로 ‘대피’ 같은 것을 한 상태라면 다른 이들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최악의 경우 이 근처에 사람은 한 명도 살지 않을지도. 방 안의 식물들을 보니 더욱더 그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