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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2화)
part 0. 눈을 뜨고(2)


‘그럼 내가 찾으러 갈 수밖에 없어.’
떠나지 않고 누군가 도와주러 오기를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아까부터 하나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이곳은 버려진 곳일지도 모른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재난 지역을 폐쇄하고 아무도 다니지 못하게 하니까. 그의 가족이 떠난 것을 보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일어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고 짐작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상위권에 드는 성적으로 똑똑한 편이고 책도 꽤나 읽는 편이지만 그래 봤자 결국은 학생. 다른 집과 달리 집안일을 겸해 하고 어른스러운 편이지만, 별 다른 위험 없이 평화롭게 자란 일반인.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내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면 그나마 나을 거야.’
그는 봉투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벽장에 있던 옷들도 최대한 편한 것들로 펼치고, 책상 서랍들도 다 열어서 최대한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골랐다. 책들 중에서도 혹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같은 서바이벌에 관한 책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사람 소리는 여전히 하나도 나지 않아. 만약 정말 ‘대피’했다고 가정한다면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최대한 안전할 수 있게 무기 같은 것도 챙기는 것이 좋을 거야. 우리 동네뿐만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 이 도시 전체가 대피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못 받아. 식량도 구하지 못할지도. 그러고 보면 식량보단 물이 문제인데.’
그는 침대 바로 옆에 놓여 있던 커다란 상자 두 개를 열었다.
그곳에는 급하게 담았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주전자, 물병, 커다란 통 같은 것들에 물이 담겨 있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급하게 랩으로 감싼 모습이 엉망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럴까, 그 근처의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하게도 상자에는 먼지가 한 톨도 쌓이지 않았다.
서두른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물건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눈을 붉혔다. 급하게 대피하던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며 물을 받아 이곳에 둔 가족들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꼭, 꼭 다시 만날 거야. 만날 수 있을 거야.’
애써 눈물을 참고 이곳을 나가기 위한 준비를 계속했다.
몇 분 후, 그는 운 좋게도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한동안 잊고 벽장 구석에서 접혀 있었던 커다란 방수 배낭을 찾을 수 있었다.
약했던 그의 어머니와는 반대로 그의 아버지는 산악을 취미로 가질 만큼 매우 건강했다. 덕분에 간혹 반강제로 주말에 산으로 1박 2일로 끌려간 적도 있었다. 특히 그가 방학했을 때 자주 그를 데려갔던 터라 덩달아 그도 커다란 배낭을 가지고 있었다.
급하게 준비해서 그런지 봉투들에 담긴 식량의 양도 사실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방 안에 충분히 들어갔다.
아무리 많이 챙겼다고 해도 보관이 긴 식품, 즉, 통조림 같은 것들은 일반 가정에서 별로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나마 이 정도도 산악을 하는 그의 아버지가 비상용으로 항상 사 둬서 가능한 양이었다.
‘식량은 부족하면 주변 가게에 들어가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품들을 가져오면 되겠지. 이렇게 된 상황에서 훔쳐 먹었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 테고. 나중에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면 배상해 주면 되니까.’
물 같은 마실 것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오래 보관이 안 돼 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캔 음료 같은 경우는 유통기한이 1년에서 2년 사이니까 그것을 마시면 된다.
마음 같아서는 가족들이 힘들게 준비한 물들을 쓰고 싶지만, 저렇게 휴대가 어려운 그릇들에 담겨 있는 것들은 가져가기 어려웠다.
물통에 담긴 것들은 챙겼지만 다른 것들은 불가능했다.
생 라면을 먹어서 그런지 약간 목이 마른 것을 느낀 그는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다. 방 안의 온도가 약간 쌀쌀해서 그런지 물도 시원했다.
그의 시선이 문득 고장 난 거라고 취급하기로 했던 시계를 향했다.
‘4월 2일. 정말, 아주 만약에… 세상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니까. 저 날짜가 진짜고 내가 18일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게다가 저건 전기가 멈춘 순간 같이 멈춘 거니 믿을 수 없지만 더 오랜 후일지도 몰라.’
아무리 고장 난 거라고 생각해도 가슴 한 구석에 일말의 불안감이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가끔 벌어지고, 그 당사자가 자신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예전부터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인체 발화 같은 경우도 간혹 있는데.
‘정말 그렇다고 해도 아주 많이는 안 지났겠지. 방 안이 이렇게 서늘하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날짜는 3월 15일이랑 비슷한 약간 쌀쌀한 날씨인 것 같은데.’
물론 가족들이 대피한 이유가 자연재해 때문이라면 기후가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솔직히 자신의 동네 전체가 대피할 정도의 일이라면 자연재해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기후가 바뀔 정도의 재해라면 화산 폭발? 그렇다면 벌써 죽었겠지. 지진? 하지만 집 건물 자체는 멀쩡한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식물이 자라 있어서 그렇지. 그럼 전쟁? 홍수?
‘정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는 주머니에 접어 넣었던 동생의 쪽지를 기억했다. 조심하라고,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렇게 써 둔 것일까. 왜 그렇게 짧은 쪽지만 놔두고 자세한 것을 써 두지 않은 걸까.
그것도 밖에 벌어진 것과 연관이 있을까?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일이라든가……? 하지만 어차피 그만 볼 쪽지일 텐데 그런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을 터였다.
그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무슨 결론을 내든지 밖을 확인해야 하는군. 확인한 다음에야 짐도 제대로 쌀 수 있을 테니.’
어쩐지 밖의 상황을 보기가 두려워져서 일부러 미루고 있긴 하지만, 지금 밖을 확인해야 가져가야 할 옷들을 정할 수 있다. 정말 날이 춥다면 겨울옷으로, 덥다면 적당히 봄, 가을 옷으로.
이런 상황에서 맨살이 많이 드러나는 여름옷은 피하는 것이 좋다. 여름에 산에 올라갈 때도 벌레 같은 것 때문에 더워도 긴팔을 입어야 했다. 식물이 이렇게 자랄 정도면 벌레 같은 것도 많을 테니까. 또 그가 잠든 3월 15일에서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면 날씨 자체도 쌀쌀한 편일 것이다.
하나 자연재해로 인한 대피라면 그가 짐작하는 기후와는 다를 수도 있다. 과연 어떨까.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살며시 귀를 가까이 대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였다.
“…….”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막은 테이프를 잡아 뜯었다. 테이프는 쉽게 뜯어졌다. 테이프를 전부 뜯어낸 후의 유리창은 테이프들의 점성 흔적이 남아 너무 흐렸다. 무엇보다 금이 조금씩 가 있어서 빛은 들어왔으나 밖을 보기가 어려웠다.
원래 유리창으로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 몰래 보려고 했는데 무리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금 장치를 풀고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뭐야, 이게……?”
그가 사는 곳은 수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 노래방, 편의점, 고층 빌딩, 전철, 할인 매장, 백화점, 빵 가게, 서점 같은 많은 건물이 밤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하게 불을 밝히는 도시.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저마다의 삶을 사는 도시.
그 도시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이건…….”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방을 빠져나가 사람을 만나고 가족과 다시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그걸로 지탱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에 그는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숲이었다.
유적같이 변한 건물들을 뒤덮은 푸르고 기이한 모양의 식물들. 차도였을 곳에 자란 자그마한 나무들. 인간이 없는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이렇게 될 수 있을까.
그가 자주 다녔던 음식점, 예쁜 점원이 일하고 있어서 남학생들에게 인기 많았던 편의점, 항상 짙은 빵 냄새를 풍겨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유혹하던 빵 가게.
그것들은 이미 흔적도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 있었다.
변함이 없는 것은 오직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과 그의 뺨을 간질이는 바람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보고 있었을까.
그는 문득 이질적인 것을 깨달았다.
이 근처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면이 건조식품이라고 해도 몇 년을 가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라면을 먹을 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밖의 모습은 마치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채로 수십 년은 흐른 것 같은데, 그가 먹은 음식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를 리도 없는데도 존재하는 극심한 차이.
무엇이 진짜일까.
그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깨 어림에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만약 수십 년이 지났다면 머리카락이 이보다 훨씬 길어졌겠지. 그때까지 잠만 자면서 살아 있을 리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차분했다.
‘시간이 저렇게까지 많이 지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 힘이 생겼다.
‘그래,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되었든, 나는 살아 있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을 거야. 내… 가족들도.’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이대로 멍하니 주저앉아 있어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족은 어디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강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살아 있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 내 가족들도 살아 있어.’
스스로 세뇌하듯 강조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한 것은 없었다. 이 근처에 사람이 없다면 찾으면 된다. 아니, 상황이 이렇게 됐다면 경찰… 아니, 군인들이 구조 작업 같은 것을 펼치고 있을지 모른다. 도시의 건물 자체는 멀쩡한 편이지만 이렇게 식물들로 뒤덮인 것은 돌연변이 식물로 인한 자연재해일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피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다른 위험들도 합쳐졌겠지.
어쨌든 무슨 경우든 간에 정부가 구조 대책을 내놓고 일반인들을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다니다가 그들을 만나 가족을 찾으면 된다.
그저 눈앞의 현실이 절망스럽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 아직 자신은 찾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설령 이렇게 도시가 숲이 되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뿐이다.
그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도 않았는데 그 현상 자체에 겁먹어서 방 안에 처박혀 있은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힘들어 하는 것은 일단 사람을 찾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해도 늦지 않아.’
확실히 밖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정말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식량은 확실히 들어가야 한다. 저 정도로 변했다면 가게들의 보관 식품들도 식물이 들러붙어서 훼손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옷들은 어쩌면 오랫동안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니까 질긴 옷들만.
책도 챙겨야 할까 고민했다. 지식이 있는 책들은 물론 중요하지만 너무 많이 가지고 가면 이동할 때 체력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 그는 다시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꽤나 멀리까지 푸른 녹음이 보이고 있다. 가로막고 있는 건물들의 흔적과 식물들 때문에 알아보기 어렵지만. 아무튼 눈으로 저 멀리까지 녹음이 보일 정도라면 정말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책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지식들이 있는 최소한의 것만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책장을 신중하게 보았다. 책을 자주 읽기는 해도 흥미 위주의 책들만 읽기에 쓸 만한 책은 없었다. 다만 몇 개는 그의 아버지가 사서 꽂은 거라 정말 좋은 것들이 있었다.
‘식물도감은 챙겨야 되겠지. 처음 보는 기묘한 식물들 같아 보여도 원래 식물들도 있을 테고. 여차하면 식량이 떨어졌을 때를 위한 식용식물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서바이벌을 다룬 책… 안 돼. 만화로 되어 있어서 정작 알려주는 내용은 너무 적어. 쓸 만한 것이 있는 부분만 찢어 가자.’
몇 분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책 두 권을 정할 수 있었다. 식물도감, 백과사전.
둘 다 꽤나 두꺼운 책이기에 두 권 이상은 부담이 되는 부피였다. 그밖에 각종 쓸 만해 보이는 지식은 전부 찢어 놨으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터다.
혹시나 물에 젖으면 곤란하니 비닐 봉투로 싼 후 배낭 안에 잘 챙겨 넣었다.
기본적으로 방수 배낭이긴 해도 지퍼 같은 것이 실수로 살짝 열려 있을 경우도 있으니 꼼꼼히 대비하는 것이 좋았다.
그 외에 가위, 커터 칼, 클립, 연필 몇 자루, 공책 몇 권, 3단 접이식 우산, 친구가 담배 같이 피자고 꾀면서 준 라이터 두 개.
바느질도 가끔 자신이 하기에 아예 사용하기 편하게 자기 방에 놓은 바느질 세트를 챙겼다. 거기에 정전을 대비하느라 준비한 양초까지.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휴대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휴대폰의 전원은 쓰지 않은 채 가만히 놔두면 삼 일은 간다. 휴대폰에 배터리가 없어 꺼져 있다는 것은 하루, 이틀은 아니라는 뜻.
인정하기는 싫지만 멈춘 전자시계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자신이 정말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거라면… 최소 18일.
‘최대로 잡는다면 5개월까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