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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3화)
part 0. 눈을 뜨고(3)
그 이상으로 치기에는 자란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의 길이가 걸렸다. 하기야 최소 18일 이상 잔 것 자체가 정상인이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면 그가 견딜 수 없으므로 그는 애써 몇 달, 몇 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짓눌렀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문득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으니 당연히 신발을 신었을 리가 없다. 가족들도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했는지 신발이 들어 있는 봉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못질된 방문을 향했다.
‘창문으로 짐과 같이 내려가서, 다시 1층부터 올라와 신발을 챙길까?’
그러기에는 창문을 내려갈 때까지 맨발인 발에 상처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 발에 상처가 생기면 이동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방문을 억지로 열기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무엇보다 저렇게 문을 막으면서까지 그를 ‘무언가’로부터 지키려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지만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럼 아직 이 건물에서 자신이 있는 이 방을 제외한 다른 곳은 전부 위험하다.
그는 고민했지만 결국 쓰게 웃으며 문을 부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그런 무언가를 일일이 피하고자 한다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밖에는 그 ‘무언가’가 있을 테니까.
그것이 동물원에서 탈출한 맹수 같은 위험 생물이든 들개든 아니면 그냥 달라진 ‘환경’ 자체든 간에.
문을 부수는 것은 쉬웠다. 애초에 저 어마어마한 못질을 전부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예전 기술 숙제―선반 만들기―를 하다가 둔 작은 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문에 몸이 빠져나갈 만한 구멍만 만들면 됐다.
만들어진 구멍을 본 그는 살짝 고개만 내밀어서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보인 장면에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먼지와 식물로 뒤덮인 방. 그가 깨어난 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다른 점이라면 어째서인지 잔뜩 가구들이나 가전제품들이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 정도.
부서져 있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그는 일단 구멍을 빠져나와 식물들을 가로지르며 재빨리 현관을 확인했다.
반쯤 열려 있었지만 오랫동안 생물이 들어왔다는 흔적 자체가 없는지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였다. 저것을 보니 이곳에 그 말고 다른 생물은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역시 사람이 없다는 것에 슬퍼해야 할까.’
그는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현관 옆에 있는 비교적 멀쩡한 신발장을 열었다. 먼지들이 휘날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발장 안에 들어 있는 신발들은 먼지가 조금 쌓이긴 해도 멀쩡했다.
그는 그것들 중에 그가 제일 최근에 산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이미 양말을 신어 뒀기에 문제없었다. 그리고 오래 신을 것을 염두에 두고 예비용 밑창을 챙겼다.
‘발 문제는 됐어. 이제 이왕 나온 거 다른 방에서 쓸모 있는 것들을 더 챙겨 두자.’
우선 그의 아버지 방에서 망치, 못 몇 개, 배낭의 고리에 달 수 있는 철제 컵을 챙겼다.
다른 것들은 워낙 식물로 훼손되어 있어서 무리였다. 특히나 책은 책장 채로 쓰러져서 그 위로 식물이 뿌리 비슷한 것을 내려 손 댈 수 없었다.
‘왜 책장이 쓰러져 있는 거지?’
이상했다. 가전제품이랑 가구들이 부서진 것, 책장이 쓰러진 것도 포함해서 곳곳에 나타난 희미한 흔적들이.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는 다음 방으로 향했다. 그의 여동생의 방에서 그는 뜨개질용 실 뭉치 몇 개와 열쇠고리 형식으로 달려 있는 작은 거울을 가져왔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의 방에서 ‘가족사진’을 챙겨 왔다.
그는 모두가 웃고 있는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다가 한 차례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액자에서 사진을 뺀 후 현재 그가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검은색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챙길 것은 식칼이랑 수저, 집게, 작은 냄비.’
더 챙기고 싶지만 이 이상은 짐이 된다. 냄비를 챙기고 그 안에 무사한 조미료 같은 것이 있다면 넣어 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요리해 먹을 정신은 아니지만 언뜻 가정 시간에 위급한 상황에서는 그냥 소금이나 설탕 그 자체로도 좋다고 들었으니까.
만약 아니라도 어디엔가 쓸모가 있을 거다.
그가 그것들을 얻으러 주방을 처음 봤을 때, 그는 흠칫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엉망이었지만 이곳은 유난히 더 엉망이었다.
바람에 흔들려 삐걱거리는 찬장과 전부 빼어져 어디론가 던져진 서랍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는 살짝 긴장하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상태라면 식칼이나 다른 것들도 지금 식물로 뒤덮인 어느 바닥에 있겠지. 그렇다면 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도 뭔가 건질 것이 없나 싶어 그는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는 ‘무언가’에 꽂혀진 식칼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식칼인지 몰랐다. 자세히 접근하고 나서야 손잡이가 살짝 보여 알아챘다. 식칼은 여러 모로 쓸모가 있지. 식물에 덮여 있고 반쯤 녹슬어 있는 모양새를 보니 쓸모없겠지만.
‘그런데 왜 저기에 꽂혀 있는 거지?’
그는 식칼에 꽂힌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주방의 싱크대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식물에 덮여 잘 알 수 없지만 긴 포대 같기도 했다.
그는 망설이다가 옆에 있는 기다란, 식물에 덮여 있지만 원래 빗자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집었다. 그리고 그 빗자루로 강하게 그 무언가를 밀었다.
그 무언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옆으로 떠밀려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것의 모습을 제대로 봤을 때 그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여태까지 느꼈던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정신적 충격이라면 이번 것은 확실한 ‘공포’였다.
“아… 아아… 아아아아악!”
관 대신 뒤덮인 식물이 사라지고 썩어 문드러져 백골이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아, 아… 아아…….”
백골은 영화 속에서 봤던 것보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있었다.
입고 있는 누더기로 변한 옷과 갈비뼈를 관통한 식칼의 뾰족한 끝. 식물이 그 틈새로 자라고 있어 오히려 더욱 끔직해 보이는 해골의 텅 빈 안구.
“아으… 으, 흐윽…….”
시체, 그것도 살해당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보인 시체는 그가 평소 생각했던 막연한 시체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강했다. 박물관이나 사진 속에서 스치듯이 보았던 그런 해골 유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
살해당했을 해골은 편하게 죽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해골의 곳곳에는 갈비뼈를 관통한 식칼은 그렇다 쳐도, 뒤통수가 움푹 들어가 있는데다가 다리 한쪽이 무릎 아래부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라기보다는 마치 고문을 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짙은 공포감에 사로 잡혀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던 그의 눈동자에 똑똑히 새겨졌다.
그는 시선을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분명 뼈밖에 남지 않는 해골인데, 저 텅 빈 검은 눈이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 검은 구멍에 빨려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때 주방에 있는 작은 창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식은땀까지 등에서 흐르고 있었는지 바람이 서늘하게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그 오싹한 한기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넋을 놓은 채 해골만 응시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는 알고 있는데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단, 단순한 해골이잖아.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움직여, 조금씩이라도 좋으니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두려움에 질려서 시선조차 뗄 수 없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저 해골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삼켜져 버릴 것 같았다.
“이미 죽은 해골이야. 그저 해골일 뿐이라고…….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뻣뻣하게 굳어 버린 다리로 뒷걸음질 쳐 겨우 벽에 다다랐다. 그리고 등이 벽에 닿았을 때 그는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 상태로 몇 분 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충격적이라서 지금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린 것 같은 거친 숨을 한참 동안이나 내뱉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는 아득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그제야 집 안의 이상한 풍경이 이해가 갔다. 부서진 가구와 가전제품들, 쓰러진 책장, 마치 던져졌다가 부딪힌 것처럼 벽 주변에 뒹구는 의자 같은 물건들.
싸움이 있었던 거다.
그것도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해골에 대한 두려움은 서서히 가셨다. 생각하지도 못한, 비록 꼴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집 안에서 그런 것을 보자 충격이 더 심했다.
그것도 평범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살해당했다는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해골이라니.
‘잠깐, 살해당해?’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누군가 죽었다. 우리 집에서? 그럼 부모님은? 동생은?’
설마 싸움이 벌어져서 자신의 방에 못질을 한 걸까. 나쁜 강도들 같은 놈들이 이곳에 와서 싸운 걸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세상이 변할 정도의, 즉 커다란 재해가 일어났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같은 ‘사람’이라고.
영화나 소설에서도 흔히 보이는 설정이다. 세계가 멸망의 공포 같은 거에 휩싸이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광기가 생기며 미쳐 날 뛰게 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범죄자 들끓고 위험한 세상이 될 거라고.
그렇다면 그들이 이곳에 와서 가족들을 위협하고, 가족들이 반항하니까 죽이…….
“읍!”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스스로의 생각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못질할 때 여동생도 같이 내 방에 피신 시켰을 거야.’
모든 정황을 생각해 내며 그는 필사적으로 가족이 살해당했다는 전제를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시체로 보이는 거 비슷한 거는 하나밖에 없잖아. 설마 아빠?’
그는 강하게 도리질 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아, 그래, 맞아. 체격이 달라. 저 시체는 너무 커. 아빠는 작은 편이셨어. 그러니 당연히 엄마나 아라도 아냐. 다른 방들도 식물로 뒤덮여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형체는 보여! 여기에 저거 말고 시체는 없어. 무엇보다 동생이 남긴 쪽지는 집을 떠나면서 남긴 거잖아. 이미 없어. 괜찮아, 괜찮아. 죽지 않았어.’
절대로 긍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 납득할 만한 부정의 증거를 찾은 거지만, 정말로 그 나열한 증거들을 생각하니 가족은 최소한 이 집에서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않아야 했다. 절대로.
그는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일어났다.
벽을 짚고 나서야 겨우 설 수 있었다. 일어선 뒤 그는 걸음을 옮기기 전에 백골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응시했다.
아주 잠깐이라고 해도 혹시 가족의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알지 못할 슬픔과 씁쓸함만 몰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그는 그대로 침대로 가서 쓰러지듯이 누웠다.
‘살해당한 시체라…….’
그래서 동생의 쪽지에 조심하라고 쓰였던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을 조심하라고. 그의 동생과 부모님들은 저런 일이 나타날 것을 알고 쓴 걸까, 아니면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들도 겪어 봤기 때문일까.
‘이제 사람을 만나도… 조심해야 하는 거구나.’
바로 어제, 아니, 그가 기억하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것은 상상도 못했다. 집안에서 살인? 시체? 우스갯소리라도 그런 불길한 소린 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런 상황을 그 누가 예상했을까.
눈을 떠 보니 별 세계. 그는 허망한 웃음을 지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이렇게 사람을 만나도 죽을 수도 있다면 사람을 찾기 보다는 그것을 먼저 알아야 했다. 일반 가정집에서 살인이 일어날 정도의 격렬한 싸움이 났다. 그 살해당한 시체를 거둬 주거나 신고하는 사람도 없다.
그 정도 싸움이 일어났다면 큰 난리가 났을 텐데 경찰이 먼저 나서서 오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깨어나기 전의 변해 버린 세상이었다.
‘아무도 믿지 마라고 했었지.’
그래서 그렇게 쓴 것일까. 경찰이나 통제할 존재가 아무도 없다. 범죄자들이 판을 친다. 이런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은 위험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넷 중 하나.
정부든 군인이든 어떤 자들이든 간에 그들에게 ‘보호’받고 있던 사람들이거나 그들을 공격하는 ‘범죄자들, 범죄자들을 피해 달아나고 폐허가 된 도시를 방황하는― 구조를 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우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이중에 더 활발히 움직이는 자들은 범죄자들 쪽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인이 아무렇게나 방치될 정도면… 그런 범죄자를 만날 경우 생명이 위험했다.
왜? 도대체 왜 세상이 이렇게 변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