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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4화)
part 0. 눈을 뜨고(4)


‘정보. 정보가 필요해.’
그것을 알아야 했다. 우선순위가 가족을 찾는 거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는 돌아다니다 그냥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게 굶어 죽어서든 범죄자를 만나 죽는 거든 혹은 다른 것으로든.
그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기껏 쌌던 짐을 우르르 떨어트렸다. 그리곤 다시 신중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다른 방에서 챙겼었던 물품과 지금까지 챙기기로 했던 물건들을 배낭에 착실하게 넣고 질끈 묶었다.
‘전기가 없어 컴퓨터는 못 써.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약간이나마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
그는 집 바로 몇 백 미터 안에 존재하는 편의점을 떠올렸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파는 한 물건도.
‘신문.’
물론 일반 가정집이 이 지경이 될 정도라면 거리의 편의점도 무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편의점에 없다면 서점에서 찾으면 된다. 서점은 식량도, 값비싼 물건도 없으니 되도록 멀쩡할 가능성이 크겠지.
그러나 배낭을 메고 챙이 큰 모자를 눌러쓰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시체가 또 있을지도 몰라.’
무섭다. 아무리 저 해골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가셨다고 해도 다른 시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에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그것도 해골이 아닌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체나 썩어 는 시체를 볼 수도 있었다. 혹은 범죄자를 만나 그 시체가 바로 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관둘 수도 없다.
지금 두려워서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언젠가는 나가야 했다. 가정집에 시체가 방치될 정도의 세상에 구조대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으니까.
아니면 여기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식량이 떨어진 후 굶어 죽던가.
‘밖으로 나가야 해. 다른 방법이 없어.’
하지만 정말 이대로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할 것 같았다. 범죄자를 제하더라도 다짜고짜 미친 사람이나, 야생 동물이라도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도망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도망치는 것도 쉽지도 않을 터다.
‘무기가 필요해.’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실제로 그것을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에게 휘두를 수 있는지는 자신 없다.
다만 가지고라도 있는 편이 얕보이지 않으리라.
그는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망치나 커터 칼은 너무 짧다. 식칼은 녹슬었으니 당연히 제외다. 무엇보다 그 칼에 찔린 백골을 생각하면 차마 칼같이 날카로운 것은 휘두를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심정으로는 사실 만지기도 싫었고, 그런 물건이라면 차라리 다른 것이 낫다. 이윽고 그는 적당한 물건 하나를 기억해 냈다.
그는 침대 옆으로 간 후 바닥에 엎으려 침대 밑을 살폈다.
거기에는 목검이 있었다.
‘있군. 버린 줄 알았는데…….’
그는 목검을 꺼내 살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검도를 배운 것은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1년쯤 전에, 동생이 혼자 다니기 싫다고 떼를 써서 억지로 다닌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목검과 검도복을 샀지만 관둔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녀석, 검도도 3년이나 다녔으니까 쉽게 당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아까 방에 들어갔을 때, 항상 책상에 놓았던 목검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 녀석도 목검을 챙겨서 나간 거구나!’
그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여동생인 아라가 목검을 챙기고 나갈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는 것은 그의 가족은 무사히 이 지역을 빠져나갔다는 거다. 최소 이 동네 밖까지는 무사히 나갔겠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결국 깨우지 않고 문에 못질을 한 것은 조금 걸렸으나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다고 믿기로 했다.
어차피 저 못질 덕분에 그 죽고 죽였던 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지금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니까. 정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목검은 1년이나 지나 있었어도 쌓인 먼지 외에는 별 이상 없어 보였다.
‘일단 이걸 챙기자.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단순히 두들기는 거라면 심리적으로 부담감도 덜 할 테니 망설임 없이 공격할 수 있을 테고.’
목검보다는 각목 같은 것이 상대를 때릴 경우 더 치명적이긴 했으나 적당히 휘두를 만한 각목은 집 안 내에서 보이지 않았다. 물론 구하려고 한다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구를 부숴서라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때라면 모를까 그 후로는 단순한 주먹다짐으로도 상대방을 상처 입힌 적이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상대를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 두려운 시점에서 목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현재의 그에게는 각목이나 쇠 파이프, 식칼같이 자칫하면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껴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 물건들보다는 목검이 나을지도 모른다.
목검으로 때려 봤자 제대로 맞지 않으면 죽을 치명타가 터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부담감 없이 마음껏 공격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문득 바지가 축축한 것을 느꼈다.
‘뭐지?’
무언가 물 비슷한 것이 묻어 있었다.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이 그냥 생수인 것 같았다. 딱히 문제될 것은 없지만 방금 전까지 없었다가 어디에서?
그는 그가 엎드렸던 바닥을 만져 보았다.
‘젖어 있어?’
왜 이런 곳에 물기가? 게다가 아까 맨발로 다닐 때는 못 느낀 것 같은데.
그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곧 아까 물을 마시다가 조금 흘렸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신경을 껐다. 목검을 한 손에 단단히 잡고 방문에 만들었던 구멍으로 다시 빠져나왔다. 엉망진창인 거실을 지나 반쯤 열려진 현관을 밀었다.
그는 고개를 슬쩍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끼익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녹슨 이웃의 철문이 그를 마주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
그는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며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시체 비슷한 것도 없었다. 여전히 너무나도 조용했다. 벌레도, 새도, 걱정한 다른 야생 동물의 낌새도 조금도 없었다. 적막한 침묵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녹색으로 덮인 채 군데군데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벌레조차 없는 건 뭔가 이상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것은 불길하다고 들었는데.’
막연히 불길하고 위험하다는 것만 알 뿐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신중한 발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편의점은 예상대로 엉망이었다.
뒤덮인 식물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창 같은 것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내부도 진열대가 엎어져 있고 계산대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시체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식물에 뒤덮여서 보이지 않거나.
그는 신문이 진열되어 있었을 곳으로 가서 목검으로 휘저었다. 목검에 식물들이 엉키면서 가리고 있는 것들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 식물들이 사라지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한 신문들이 있었다.
‘솔직히 서점이나 다른 곳을 몇 군데 더 헤매야 될 줄 알았는데. 혹은 아예 못 찾거나.’
자신과 같이 정보의 필요를 느꼈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어째서 무사한 걸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신문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날짜를 확인했다.
‘날짜는 3월 28일. 내가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것은 15일이니 한참 후네. 적어도 이때까지는 신문 배달 같은 것이 됐다는 소린가.’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신문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part 1. 변종(1)


…여러 곳에서 변종 식물과 동물들이… 학자들의 추측으로는 3월 15일 날의…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식물의 경우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성장 속도를 보여 주고 있습… 또한 특히 동물 같은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등… 를 포함한 각 나라의 정부는 이 사태에 대해서 대대적인 해결책을 준비 중입니다. 지진과 해일, 가뭄 등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난 국가에는 도움의 손길이…….

되도록 멀쩡하다고는 해도 글자가 번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많아 띄엄띄엄 읽어야 했다. 다행히 눈에 띄는 단어들만 연결하는 걸로도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신문을 읽은 후 그는 사태가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각 나라의 정부’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는 것의 그의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규모로 이상 사태가 벌어졌다는 뜻. 또한 ‘각종 자연재해들이 일어난 국가’라는 내용을 따로 쓴 것으로 보아 지금 이처럼 도시가 변한 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따로 지칭해서 쓰질 않았을 테니까.
사실 그는 그의 집안에서 있었던 흔적과 시체를 보고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 비정상적인 식물은 기이한 화학 공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특수한 항체 비슷한 것이 있다던가.
하지만 그의 추측과는 다르게 신문에는 ‘전쟁’이라는 말은 조금도 쓰여 있지 않았다.
‘자연재해도, 전쟁도 아닌 이상 현상. 도대체 뭐지? 짐작도 안 가.’
게다가 유난히 거슬리는 ‘3월 15일 날의’라는 말.
그때는 자신이 잠들었던 날이다.
그렇다면 그가 잠든 그날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그날을 기점으로 이상 사태가 시작되었다는 뜻. 그렇다면 자신이 잠든 것은 이 이상 사태와 꽤나 밀접한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가 3월 15일 날 깊은 잠에 빠지고, 하필이면 그날 ‘어떤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그냥 우연일 리가 없다.
또한 이렇게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자신이 최소 한 달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멀쩡한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싫다.’
이런 사태가 높은 확률로 자신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니,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설마 가족들도 그것을 눈치채고 자신의 방에 못질을 한 걸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리’시키기 위해서?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일단 그건 가족들과 다시 만난 다음에 생각해도 괜찮아. 지금 내가 머리를 굴려 봐야 만나지 못한다면 소용없어. 만나서 물어보면 알게 될 테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문을 마저 살폈지만 이밖에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운동 경기가 이번 사태로 지연되었다는 거나 이번 사태에 대한 각 정부의 입장, 대통령과 기자 회견의 내용 같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걸 보면 정부가 아예 손을 놓지 않고 일단 대비책을 마련 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의 백골과 부서진 편의점 잔해 같은 것을 보면 실패한 모양이지만.
‘갈까… 아, 그 전에 편의점에 남아 있는 것들 중 괜찮은 것이 있나 봐야 되겠다. 밴드나 감기약, 소화제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의 집안에 항상 가지고 있던 구급 통은 찾을 수 없었다. 가구들이 난장판으로 부서진 집 안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을 투자하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솔직히 그 백골이 있는 집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유리 파편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조심하며 그는 편의점 진열대 등을 뒤졌다.
범죄가 극성이었다면 당연히 도둑질도 있었을 테니 먹을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을 곳은 텅 빈 채 먼지만 쌓여 있었다. 다툼 도중 짓이겨 터졌는지 우그러진 빈 과자 봉지들도 있었다.
대신 계산대 아래 서랍에 있던 두통약, 해열제, 소화제, 진통제랑 반창고를 찾을 수 있었다.
편의점 용품이라기보다는 약간 쓴 흔적이 있던 것을 보아 점원들의 것이었던 것 같았다. 범죄자들은 약 같은 것은 그냥 놔둔 모양이다. 하긴, 편의점에서 약을 찾기보다는 정말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약국이나 병원으로 갔을 터다.
먼지가 쌓여 있긴 하지만 약병들의 뚜껑도 제대로 닫혀 있었고, 일단 작은 종이 상자 안에 있었음으로 딱히 오염되거나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써도 될까? 약들도 유통기한이 있긴 있을 텐데.’
어렴풋이 약이 오래되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약효가 약하게 나타난다고 하던가? 아니, 탈이 난다고 했었나?
그는 평소 약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가족 중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전부 튼튼한 건강 체질이라서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약 자체를 본 지도 오래됐다.
‘유통기한이 좀 지났을 수도 있다고 해도… 괜찮겠지?’
조금 불안하지만 일단 챙기고 보기로 했다. 나중에 한 알 먹어 보고 이상이 있으면 버리면 되니까. 먹고 이상이 없거나 나아졌다면 계속 쓰면 되는 거고.
약들을 챙기고 나서도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더 이상 가져갈 것은 없어 보였다.
편의점을 나온 그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 고민했다. 학교가 있는 동쪽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차를 타고 1시간을 가면 수도가 나오는 서쪽으로 가야 할까.
학교에 가면 사람을 만나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일반적으로 학교는 긴급 상황 때 대피용으로 쓴다고 했다. 미성년자가 있는 학교는 전쟁 같은 것이 일어났을 때도 웬만해서는 건들지 않고, 재해가 일어나면 우선 구조 순위로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곳에 가서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될까?
분명 깊이 잠들었던 자신에 대한 소문이, 최소한 그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났을 터다. 그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3월 15일 일어났던 ‘어떤 현상’과 시기가 맞춰지게.
그렇다면 온갖 기묘한 소문이 돌았을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