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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25화)
part 5. 보랏빛 밤(3)
그뿐만이 아니다. 고통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에게 온갖 지독한 말을 쏟아붓겠지. 어쩌면 애꿎은 그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연약한 존재니까.
신이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멀쩡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질투하는 것이 사람 아닌가.
실제로도 그랬다.
떠오른 즉시 곧바로 머릿속에서 없애 버렸지만 그녀는 생각해 버렸다.
[무서워. 더 이상 혼자는 싫어.
……혼자 죽기는, 무서워.]
왜 그런 생각을 해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게 자신의 본심이라는 걸까. 혼자 죽기 싫다면 옆의 시율이랑 같이 죽고 싶다는 건가.
그녀는 스스로 한 생각이 무서워 눈을 감았다.
무방비한 상태의 시율을 눈앞에 두며 그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서글프고 가엾고 두려웠다. 지금도 이런데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 그에게 어떤 말을 지껄일지, 무슨 행동을 할지가 예상되어 더 두려워졌다.
다인은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최후의 순간 웃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자신도 그런 격한 고통 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시율에게 웃어줄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녀의 엄마처럼 강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내 지독한 말만 하다가 마지막 순간 제발 같이 죽어달라고 애걸할지도 모르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달빛과 서늘한 밤바람. 이틀간 내렸던 비는 상쾌한 공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그 아름다움과 맑음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청량한 공기가 폐 속에 들어와 그녀의 몸을 흩었다.
‘떠나자.’
그녀는 조용히 결심했다.
여전히 죽고 싶지 않았다. 시율과 함께 있고 싶었다. 같이 미래를 보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죽음은 괴물보다 무서웠고 죽음까지 도달할 때까지 느끼게 될 고통이 예상되어 울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시율의 기억에 자신이 추억이 아닌 악몽으로 기억되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친구들도 죽거나 미쳤다. 남자들은 변하고 타락했다.
그녀의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던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시율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의 연주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시율이 유일했다.
간신히 걸을 수 있을 때 만난 인연은 십 년이 넘게 이어져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짝사랑하며 두근거릴 때 상담해 준 것도 그였고, 대회 연주를 망쳐 버려 우울해하고 있을 때 위로해 준 것도 그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작곡한 곡을 처음 들려준 것도 시율이었다.
그런 그에게 추하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떠나자.’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을 때에.
그녀는 그녀의 가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절망하고 한탄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그녀의 악기를 꺼냈다.
한때 인생의 절반을 차지했던 소중한 피리.
은빛으로 반짝이는 피리의 모습에 그녀는 미소 지으며 쓰다듬었다. 가만히 피리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피리를 한 손에 쥐고 주방에서 의자를 가져와 창가에 놓았다. 그리고 밑의 깨진 유리 조각을 조심해서 밀어내며 의자에 앉았다.
‘이게 내 마지막 연주겠지.’
다인은 잠깐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른 후 천천히 피리를 입가로 가져갔다.
맑은 소리가 밤을 울렸다.
섬세한 선율이 서늘한 바람을 타고 방안을 감쌌고 살며시 시율의 귓가를 두드렸다. 시율은 잔잔하면서도 애절히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
시율은 다인이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나 연주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들끓었던 그녀의 열이 손에 남아 있는데 겨우 하루 만에 내려갈 리가 없다. 무엇보다 독으로 인한 거니 다른 곳에도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몸으로 연주까지 하다니.
그녀를 말리기 위해 다가가려던 순간 시율은 다인과 눈이 마주쳤다. 놀랍도록 차분한 그녀의 얼굴에 시율은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다인이 싱긋 웃으며 피리를 뗐다.
“시율아, 기억나? 방금 곡 내가 너한테 처음으로 들려줬던 자작곡이야.”
“……기억나. 엉터리라고 내가 놀려서 네가 울었던 것도.”
“에에, 그것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계속 연주할게. 그러니까…….”
다인이 밝게 웃었다.
“들어줘.”
시율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은 부탁이 아닌 부드러운 명령이었다. 그녀의 어조에 그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밝게 웃는 다인의 미소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침대에 앉았다. 떨리는 입가를 억지로 올려 옛날처럼 미소 짓는 그녀와 마주 웃었다.
그리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사라진 일상을 즐기던 그때와 같이 물었다.
“무슨… 연주를 할 건데?”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곡.”
작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피리 소리가 새롭게 퍼져 나갔다. 가늘게 울리는 선율이 밤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이제 사라지고 없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아늑하고도 따뜻한 추억을 그리며 그녀가 지은 곡 [추억].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기억들을 향해 인사하는 그녀의 음향이 울렸다.
부서진 별장을 무대로
깨진 창문으로 비춰 들어오는 달빛을 조명으로 받아
단 한 사람을 위한 연주.
은빛 피리가 달빛에 반사되어 마치 스스로가 반짝이는 것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약간 헐렁한 상의, 평범한 바지와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카락. 딱딱한 나무로 된 의자와 바닥에 이리저리 흩뿌려진 깨진 유리 조각들.
그녀의 인생에서 이곳처럼 볼품없는 곳에서 한 연주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또 소중했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이별이었으니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아름다운 연주가 끝났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시율아.”
시율은 그녀를 향해 박수를 쳐 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안녕이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쥐어짜 내듯이 입을 열었다. 한 줄기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가지 마. 다인아.”
“미안. 가야 할 것 같아.”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다인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시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금방이라도 타서 사라질 것같이 뜨거웠다.
“여태까지 네가 울보인 것은 몰랐네. 걱정 마. 그냥 잠시 헤어질 뿐이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거짓말! 너는…….”
죽을 생각이잖아.
자신과 헤어져 홀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잖아.
시율은 뒷말을 내뱉지 않았음에도 그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그녀가 안고 있는 시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 이별이 최후가 되지 않기를 그녀 또한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만약, 기적적으로 이 독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거야. 나도 강해졌는걸. 이것 말고도 많은 독을 먹고도 살았어. 이깟 독 따위 이겨 내는 것도 별거 아냐. 그런데 네가 옆에 있으면… 약해져 버릴 거야. 기대고 싶고, 원망하고 투정 부리고 싶고… 그러면 독을 이겨 내기는커녕 독에 짓눌리게 되겠지. 그런 건 싫어.”
살고 싶으니 최선을 다 할 거다. 살아남아서 반드시 다시 한 번 시율을 만날 거다.
그러나 결국 이겨 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리고 시간도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 수도에는 너 혼자 먼저 가도록 해. 알았지?”
시율이 뭐라 대답하거나 더 말리기도 전에 다인은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한 발짝 멀어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언제 꺼냈는지 모를 종이에서 하얀 가루가 바람을 타고 시율에게로 뿌려졌다.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지는 시야 사이로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는 다인의 모습이었다.
part 6. 절망
그가 깨어났을 때 다인은 없었다.
시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회색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보았다. 슬금슬금 내리고 모습을 갖췄던 비는 폭우로 다시 나타났다.
‘지금이 몇 시쯤일까.’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비 때문에 어둑하긴 해도 사물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탁자에 없었던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손을 뻗었다.
그가 꺼낸 기억이 없는 공책이 탁자에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다인이 한 거겠지.
시율은 공책을 펼쳤다.
새롭게 내용이 채워져 있었다. 그녀가 미처 말로 전하지 못한 경험과 지식들이었다.
제일 먼저 그녀가 만났던 괴물들에 대해서 쓰여 있었다. 어설프게 그려진 괴물 그림과 옆에 쓰인 특징들. 몇 장을 더 넘기자 별모양으로 중요 표시까지 한 ‘주의 사항’들이 나왔다.
인간을 믿지 말 것,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조심할 것, 타인이 준 음식은 먹지 말 것, 잠 잘 때에도 괴물을 경계해야 할 것, 비닐 봉투를 이용해 물을 얻는 법, 처음 보는 식물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그는 공책을 덮었다. 눈가가 시큰한 것을 애써 무시하며 공책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가야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시율은 식량을 확인했다. 식량의 수는 그대로였다. 다인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거라면서 그의 식량에 손도 대지 않았다. 조미료도, 별장에서 발견한 과자 두 봉지도 고스란히 놓고 갔다.
‘……거짓말쟁이.’
최선을 다해 산다고 했으면서 식량과 식수 하나도 가져가지 않은 것은 뭐람.
그는 줄어들지 않은 통조림 하나를 꺼내 배를 채운 후 바로 출발했다. 단단히 가방을 메고 지하실 바닥에서 뒹굴던 손으로 휘두르기 좋은 단단한 강철 삽까지 주은 그는 그 후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거센 빗줄기에 괴물들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는지 괴물은 한참이 지나도록 만나지 않았다.
가끔 멀리 어른거리는 괴이한 그림자를 보기는 했으나 가까이 오지는 않아 큰 문제는 없었다.
비는 밤이 되자 조금씩 그쳐 가기 시작했다.
비에 젖어 무겁게 누르는 옷의 무게가 거슬릴 만도 한데 시율의 표정에는 딱히 불쾌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깨어나고 다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부터 계속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참는 것 같은 표정 같기도 했다.
밤과 비가 합쳐지자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아 손전등을 켜야 했다. 어둡다 보니 수도로 가는 길도 해맬 뻔했으나 다행히 숲에서 약간 벗어나자 수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는 차도를 발견해 그럴 일은 없었다.
몇 시간을 넘게 걷고 또 걸었다.
오로지 수도를 향해 걷는 것 외에는 목표가 없다는 듯 그는 끊임없이 걸었다. 조금도 쉬지 않았다.
비는 그쳤고 구름만 남아 어슴푸레한 새벽을 더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이 정도 어둠이라면 손전등은 필요 없었다. 그는 손전등을 도로 집어넣었다.
‘곧 수도인가.’
몇 분만 더 가면 수도로 들어갈 수 있는 두 번째 다리가 나온다. 이번 다리도 무너져 있다면 정말 강이 끊기는 곳까지 며칠은 걸려 돌아가야 했다.
그럼 거리가 거리니 만큼 괴물을 만날 위험이 더 높아지니 그는 부디 다리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의 진심이 통해서일까.
다리는 무사했다.
조금 너덜거리고 부서진 자동차들과 그 파편들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지만 사람이 걸어 이동하는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만 그 다리의 끝에, 한때 번성했었던 도시의 모습이 문제였다.
시율은 밝아오는 햇빛에 점차 선명히 보이는 도시를 보며 주저앉았다. 외면하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서 머무르고 사라지지 않았던 불안의 씨앗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하… 하하하…….”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거대한 건물과 쓰러진 건물이 일으킨 먼지바람에 회색으로 변한 주변. 빛을 잃은 간판과 색이 존재하지 않는 거리. 흉물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철근과 붉은 녹이 슨 채 바람에 삐걱거리는 철창.
이러니 군대나 정부가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구조대 따위가 있을 리가 없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그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아아. 다인아. 아직 살아 있니. 고통스럽게 독을 참아내고 살아남고 있니. 아니면 벌써 죽어 버렸어?
칼에 찔린 백골, 달려드는 괴물, 무너진 다리, 썩어 가는 시체, 으적거리며 씹혀 떨어지는 인간, 허망하게 사라지는 생명, 죽음이 예고된 친구, 이별, 망가진 도시…….
머리가 고장 난 듯 삐걱거렸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모든 슬픔들이 펼쳐졌다. 그는 땅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수도꼭지를 튼 듯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 하하… 아아아아아아악!! 왜, 왜에에에에!”
억눌렸던 절망이 터져 왔다.
그곳에
수도는 없었다.
2권에서 계속
생존
지은이: 푸르비
발행인: 정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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