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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24화)
part 5. 보랏빛 밤(2)


‘말도 안 돼… 이제 와서?’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안 돼. 안 된다. 이제야 겨우 행복해질 것 같았는데. 살고 싶어졌는데. 미래가 보였는데……!
그녀는 간신히 힘을 주어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먹었던 독초를 먹은 지 한 달은 지났다. 이제 와서 독초가 발휘된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말이 되지 않아야 했다.
그 독초 이후로도 많은 변종 식물들을 먹어 봤다. 고통스러웠지만 다 이겨 내고 살아남았다. 강제로 변종 식물들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 중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스스로 다른 강화인간보다 힘을 떨어지지만 대신 독 같은 것에 강한 내성이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저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정도뿐이었던 거야?’
싫어!
싫어. 싫어. 죽기 싫어. 살고 싶게 됐는데. 겨우 살아서 행복해지고 싶어졌는데. 희망을 봤는데.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죽음이 무서워졌는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죽으라고……?
차라리 시율을 만나지 못했다면 미련 없이 순순히 죽어 줄 수 있었는데… 왜, 왜, 왜 하필 지금……!
“다인아?”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표정의 시율이 문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라면도 다 됐고, 너무 늦어서 부르러 왔어. 두드려도 소리도 없던데,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괴물한테 맞은 상처에 이상이라도 있어?”
“아, 아니, 나는…….”
시율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독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게 됐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중독된 사람이라고 멀리하면 어쩌지? 곧 죽을 인간은 필요 없다고 하면 어쩌지?
시율이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에 그런다면…….
시율은 의아한 눈빛으로 창백한 안색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다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도 입술이 새파랗잖아. 옷을 갈아입어도 머리를 제대로 말려야지.”
“아…….”
그가 혀를 차며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닦았다. 그녀는 멍하니 시율이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율은 그녀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갑자기 다인이 왜 저렇게 두려움에 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시선을 내린 시율은 희미하게 보랏빛으로 변한 그녀의 손톱을 발견하고 닦아 주던 손길을 멈췄다.
‘저건… 설마.’
그의 손길이 멈추자 다인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치채고 황급히 뒤로 손을 숨겼으나 이미 본 후였다.
“저, 이, 이건, 이건 그러니까…….”
“…….”
시율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더듬거리는 그녀를 보며 순간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거 봐. 입술도 손톱도 추위 때문에 새파랗게 질려 놓고서는……. 빨리 라면 먹으러 가자. 불겠다. 따뜻한 것을 먹으면 좀 나아질 거야.”
새파랗게 질렸다고? 그녀는 숨겼던 손을 꺼내 손톱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면 보랏빛으로도 남색으로도 보였다. 아니, 둘이 섞였다고 해야 할까.
시율이 주방으로 가만 서 있는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그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상대적으로 그녀가 차갑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추위 때문이겠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맞아, 추위 때문일 거야. 너무 예민했어.’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시율의 인도대로 따라가 식탁에 앉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모처럼만에 양념이 제대로 된 따스한 국물 음식이었다. 시율은 빙긋 웃으며 국자로 그녀의 그릇에 라면을 덜어 줬다.
“자, 어서 먹어. 몸을 따뜻하게 해야지.”
“응. 너도 먹어.”
부드러운 분위기로 식사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 때문인지 두 사람의 분위기는 밝아 보였다. 다인도 독에 대한 불안감을 밀어내고 웃으며 시율과 대화를 나눴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 일부를 시율에게 말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 정리까지 마치고 시율은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치기는커녕 빗줄기가 오히려 강해진 것이 하루 종일 내릴 것 같았다.
“이동은 무리겠네.”
“오늘은 여기서 쉬자. 몸 상태도 좋은 편은 아니니까. 비가 오는 동안은 쉬는 것이 낫겠어. 잘못해서 비속에서 괴물을 만났다가는 도망치기도 힘들고… 여긴 지하실이 있어서 언제든지 피할 수 있으니까.”
“그럴까? 안쪽 방은 멀쩡하니까 거기서 자면 되겠다. 침대도 있던데 넌 거기서 자. 나는 밑에서 이불 깔고 잘 테니까.”
“아니, 난 괜찮…….”
다인이 사양하려고 했지만 시율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도 몸이 너무 찼어. 잘못하면 감기들 수도 있으니 편안히 자야지.”
확실히 몸이 무거운 것이 감기 기운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졸음도 쏟아지고. 결국 다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율에게 말한 후 먼저 잠자러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 전까지 푹 잤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너무 쏟아졌기 때문이다.
시율은 방으로 들어가는 다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방문이 닫히자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당장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여전히 보라색이야.’
짙은 졸음에 그녀는 손톱의 색을 다시 확인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잠든 것 같지만 내일이면 보게 될 거다.
몸이 따뜻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랏빛인 그녀의 손톱을.
‘설마 했는데, 추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인이네 엄마가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독초의 효과랑 같잖아.’
분명히 본인도 먹었다고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독이 있는 변종 식물들도.
하지만 여태까지 괜찮아 보여서 안심했었건만.
그의 눈동자가 괴로운 빛을 보였다. 그는 독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지식도 없다. 그저 독성이 있는 식물류만 조금 알지, 독을 먹었을 때의 대처법 따위 그는 모른다. 해독도 어떻게 하는 줄 모른다.
시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날 잠들 수 없었다. 그저 식탁의 의자에 앉은 채로 초조하게 손을 까딱이며 기억하고 있는 모든 지식을 쥐어짜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독을 해독할 방법을 시율이 알 리가 없었다.
그의 절박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비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도록 계속해서 내렸다. 세상이 무너진 듯 쏟아지는 빗줄기는 하늘이 희미한 빛을 머금기 시작할 때에야 약해지기 시작했다.
우울한 구름을 거두며 해가 뜨고 다인이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시율아… 어떻게 해…….”
그녀의 손톱의 절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율은 밤새도록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깨물어 너덜거리는 입술을 다시 한 번 깨물었다. 피 맛이 비릿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힘내라고? 독 따위 이겨낼 수 있다고? 헛소리다.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맹독을 의지만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제대로 된 의사와 의료 도구가 있으면 혹시 모른다.
그러나 여기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오직 의료 지식이 거의 없는 시율, 자신뿐이었다. 게다가 약조차 해열제와 진통제, 소화제 정도만 있다. 다른 곳으로 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의사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른다. 찾으러 돌아다니다 괴물을 만나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의사를 만난다고 해도 다인이 말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폭도로 변했었다면 치료해줄 가능성도 무척 낮았다.
이 모든 정황이 내는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다인이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는 것.
다인도 그것을 잘 알았다. 그녀도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그녀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발악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세계에서 독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 죽는 거야?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롭게… 죽어 버리는 거야?”
“아니야! 아냐,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시율은 고개까지 저으며 부정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부정에 다인은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절망 어린 절규가 부서진 별장에 울렸다.
“없어! 그런 방법 따위는 없다고!”
다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얀 뺨에서 수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그녀의 얼굴이 젖었다.
“의사도, 약도 없어! 나는… 나는 죽을 거야……. 흐흑, 곧 죽게 될 거… 라…….”
힘이 빠진 것인지, 지독한 절망감 때문인지 울먹거리는 그녀의 말이 끊기며 몸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시율이 참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가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간신히 옆으로 쓰러지기 전에 받친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다인아, 다인아!”
의식을 잃었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시율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급한 대로 그녀를 침대로 옮겼다. 침대에 다인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으나 다인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하기야 독이 활동하기 시작한 이상 나아질 일은 없을 터였다.
둥근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에 시율이 초조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이 증상도 독 때문인가?’
다인은 그녀의 어머니가 손톱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정확히 어떤 증상을 보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을 잃고 급속도로 열이 오른다면 독 때문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감기라고 하기에는 의식을 잃은 것이 걸리고, 원숭이 괴물로 입은 상처에 혹시라도 세균 같은 것이 있어 무언가 감염된 거라면 그도 마찬가지의 증상을 보여야 했다.
‘일단 열을 낮추자. 이 정도 열이 계속 된다면 멀쩡한 사람이라도 죽을 거야.’
빈속에 약을 먹으면 속이 쓰릴 테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배낭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약들을 꺼냈다.
두통약, 소화제, 진통제, 해열제. 이 네 종류의 약이 그가 가진 약의 전부였다.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약국에 들르는 건데.’
물론 그가 실제로 약국에 갔다고 해도 제대로 된 약을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빈약한 지식으로 약품 성분들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약국에서 약을 산 적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가끔 병원에 가서 처방전만 받고 건네줘 주는 대로 먹은 것이 전부.
복잡하고 듣도 보도 못한 전문 용어로 쓰여 있는 약들이 무슨 효력이 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나 지금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율은 해열제가 든 약통과 생수 한 통을 들고 다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받쳤다.
“다인아, 입을 벌려 봐. 약이야, 자.”
약통에서 꺼낸 노란색의 작은 알약을 열기로 인해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속에 넣었다. 입안에 넣어진 약의 쓴맛에 거부감을 느꼈는지 무의식중에서도 뱉으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에 황급히 물을 흘려보냈다.
입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물에 쿨럭 거리면서도 다인은 본능적으로 삼켰다.
약과 함께 물을 삼키는 것을 확인하자 시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으로 인한 열이니 해열제가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에 약을 삼키자 안도한 것이다.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해열제가 효과가 있더라도 열만 떨어지는 것은 소용없었다. 독으로 인한 것인 만큼 열은 떨어지되 다른 증상은 계속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대로 의식을 잃은 채 다인이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만약 다인이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그는 손을 그녀의 뜨거운 이마 위로 올렸다. 서늘한 그의 손길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그가 독으로 죽어 가고 있는 다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다인은 흐릿한 눈을 떴다.
희미하게 들리는 벌레 울음소리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시율의 숨소리.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깨진 창문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어두운 방을 그윽이 비췄다. 반투명한 커튼이 바람에 살며시 팔랑거리고 하얀 이불은 달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났다.
그녀가 있는 침대의 중간부터는 달빛이 창문틀에 가로막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방 안을 인식하기엔 중분했다.
그녀는 침대에 기대 잠든 시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밤새 그녀를 지켜보다가 겨우 잠들었는지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서 낸 소음에도 깨지 않았다. 그녀보다야 덜 하지만 상당히 민감한 청력을 가진 시율이 깨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율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바보.”
다인은 작게 중얼거리며 시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면 괴물에게 먹히고 마는데. 잠 잘 때조차 주변을 경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비닐 봉투로 물을 얻는 방법도 아직 보여 주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괴물의 모습이나 특성에 대해서도 얘기 못해 주고, 마을에서 남자가 알려 준 한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지도 알려 주지 못했다.
‘아직 알려 줄 것이 많은데. 아주, 아주… 많은데.’
시간이 없다.
다인은 거의 완전하게 보랏빛으로 변한 손톱을 보며 쓰게 웃었다.
손톱이 반절 정도 색이 변하면 열이 치솟으면서 의식을 잃는다. 다시 정신을 차린 뒤 삼 일이 지난 후에 손톱이 완전히 보라색이 되면서 고통이 시작된다.
손톱으로 땅을 긁으며 비명을 지르고 결국 손톱이 나가 버려도 그 아픔보다 더 한 고통에 신경도 쓰지 못하고 몸을 비틀게 된다. 비명을 지르다 못해 목이 쉬고 그 상태에서도 계속 질러대 피를 토하게 된다.
그리고도 이틀의 시간이 지난 다음 숨이 끊긴다.
비명을 지를 힘도 사라지고 고통에 반응할 의식마저 혼미해져 몸을 가늘게 경련하며 초점 없는 눈빛으로… 숨이 끊기고 만다.
다인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나도 그렇게 되겠지.’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율은 절망할 거다.
무력감과 슬픔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할 거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