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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23화)
part 4. 살아남은 대가(9)


“흐흑…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엄마… 아빠도, 아빠… 왜, 왜, 어째서 죽은 거야… 흑, 엄마…….”
그녀는 어린애처럼 울며 시율에게 매달렸다.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을 찾으며 지금까지 참아왔던 슬픔을 터트리듯 눈물을 흘렸다.
시율은 부디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녀를 꼭 끌어안고 달래 줬다.
그렇게 다인의 눈물에 정신이 팔린 시율은 보지 못했다. 하얀 손전등 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보라색으로 변한 그녀의 손끝을.



part 5. 보랏빛 밤(1)


다인과 시율은 서로에게 나란히 기댄 채 잠들었다.
지하실은 춥지도 않았고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만큼 위험을 느낄 만한 존재도 없었다.
위협적인 존재는 위에서 날뛰는 괴물들이 유일했으나 그 괴물들도 지쳤는지 두 시간쯤 지나자 가 버린 듯 아무 소리 없이 조용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의 깊은 잠은 툭툭 무언가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소리로 인해 깨졌다.
먼저 청각이 예민한 다인이 살짝 눈을 떴다.
잠시 상황이 파악이 안 되는 듯 어두운 공간을 재빨리 두리번거리다가 안심한 눈빛을 했다. 손전등을 끄고 잔 기억이 없는데 아마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는 절약형 손전등이었는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더듬어 손전등을 찾아내고 스위치를 켰다.
지하실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다인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움직임에 잠이 깼는지 눈을 비비고 일어난 시율을 바라보았다.
“아… 잠들었었나 보네.”
“응. 그런데 밖에 비가 오나 봐. 비는 오랜만인데.”
3월 18일 이후 그녀는 비를 보지 못했다.
원래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비가 오지 않는 나라기는 했으나 3개월 동안 소나기 한 번 오지 않는 이번 경우는 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사막에서 홍수가 났다느니 각 나라의 해안 도시들이 해일로 쓸려 나갔다느니 지진 안전 지대에 있던 도시에 8.5규모의 지진이 닥쳐 그 도시가 그대로 몰락했다느니…….
그런 소식들을 언론이라는 기관이 사라지기 전까지 들었던 그녀는 가뭄이라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가뭄이 끔찍하게 길지만 않는다면 환영이었다. 당장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지진, 해일, 홍수들보다는 다행이지 않은가.
다만 다른 곳의 재해도 심각한 만큼, 최악의 경우 영영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걱정은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는데 이 비로 덜어 낼 수 있었다.
청량한 빗소리에 다인은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비가 얼마나 오든지 제멋대로 날뛰는 기후를 생각해 볼 때 지하실에 있는 것은 위험해. 밖으로 나가자.”
“괴물들은 갔을까?”
“갔어. 빗소리에 묻혔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소리는 날 텐데 전혀 안 나거든.”
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인의 말을 따랐다.
모든 경험에서 그녀가 앞선 만큼 그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녀의 말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다인은 단단히 잠갔던 철문을 가뿐하게 열었다.
톡톡, 가벼운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졌다.
가방을 메고 위로 올라온 시율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주변이 엉망이었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깔끔했던 별장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냄새를 쫓아 이 주변에 난리를 쳤었는지 지하실 문 근처에 쌓여 있던 상자와 물건들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바닥에는 빗물에도 씻기지 않은 괴물의 발자국을 비롯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하실이 없었다면 죽었겠군.’
정말 운이 좋았었다. 만약 이곳을 발견에 지하실에 숨지 않았다면 지금쯤 괴물의 뱃속에서 소화되고 있었을 테니까.
시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저런 녀석들이 계속 있을 텐데, 어떻게 하지? 강가도 위험하고 숲도 위험하고… 하지만 수도에는 반드시 가야 해.’
수도라면 최소한 정부가 통제를 하고 군대가 남아 있어 사람들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다른 곳을 돕지 못한 것은 상황이 그만큼 심각해 도울 여력이 없다는 뜻이겠지.
이런 식의 국가적 재앙, 아니, 세계적 재앙이라면 사람들은 가장 대비가 빠를 수도로 모일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도시는 수도 바로 지척에 있었으니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일 테고.
비록 다리가 끊어져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수도와 가까운 만큼 상당수의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조금이라도 가족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운이 좋다면 수도로 가서 바로 가족을 만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의 가족은 괴물들에게 잡아먹히거나 범죄자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으로 그 가능성을 외면했다.
‘만날 수 있을 거야. 수도에 가면, 수도에만 간다면…….’
사람들을 만나 최소한의 안전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을 만날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불안함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으니까. 변해 버린 세상이 두려워서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어제 다인과 이야기하고 위로하며 잠들면서 다른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기억을 되새길 여유가 생기자 생명을 걸고 도망쳤던 도주와 도주하며 느껴졌던 절박함, 공포, 두려움이 다시금 느껴졌다.
고양이 괴물의 같은 경우는 그래도 외향상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야말로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원숭이 괴물들에게 쫓겼던 것은 그에게 강한 두려움을 심어 줬다.
특히나 처참한 남자의 죽음과 흩뿌려졌던 피가 뇌리에 남아 잊어지지 않았다.
‘생각하지 말자.’
시율은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다른 손으로 잡아 누르며 그 기억을 잊으려 노력했다.
때마침 다인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에게 말을 걸어 주어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었다. 다인은 밝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괜찮아. 무너진 부분만 아니면 깨끗해. 위험한 것도 없어 보이고. 일단 비가 그칠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자.”
“아, 응. 그래.”
그는 다인과 함께 반쯤 부서져 있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된 별장의 거실과 작은 방은 처참했지만 나머지는 깨끗했다. 괴물들이 날뛴 곳만 제외하면 먼지 쌓인 흔적을 제외하곤 아무렇지도 않았다.
“식량을 아껴야 하니 먹을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 가족이 있을 때는 별것 없었는데. 아마 조미료 정도만 있을 거야.”
“운 좋게 나중에 온 여행객들이 먹을 것을 놓고 갔을 수도 있잖아.”
시율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조미료 뿐만이라도 충분히 필요한 물품이기에 주방으로 갔다. 다인 또한 주방으로가 서랍과 냉장고 등을 확인했다.
다인의 말처럼 조미료들이 대부분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여행객이 깜빡 잊고 놓고 갔는지 과자 봉지 두 개를 찾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 외의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생수 두 통이 있었는데 전기가 끊겨져 있었어도 뚜껑을 따지 않은 새 것이라 그런지 멀쩡했다.
비도 오고, 다인이 비닐 봉투를 이용해 물을 얻을 수 있다고 했어도 순수하게 깨끗한 물은 소독용으로라도 필요하기에 시율은 만족했다.
“와아! 시율아, 이것 봐봐. 가스가 나와!”
다인이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들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가스레인지였는데 놀랍게도 불꽃이 안정적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시율 또한 놀란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가스랑 전기는 다 끊긴 것 아니었나? 아, 부탄 가스통이 따로 있었구나.’
그는 부서진 천장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비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다인의 몸을 흩었다. 6월 중순 쯤 되었을 텐데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날씨가 쌀쌀한데, 그 와중에 차가운 비까지 조금 맞았으니 다인의 몸은 매우 차가울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몸이 단단해졌다고 해도 괴물 원숭이의 괴물 같은 힘에 다인이나 시율이나 한 번씩 맞았었다.
자신의 검게 보일 정도의 피멍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온 힘을 다해 뛴 후유증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똑같이 정통으로 맞은 다인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으리라.
추위에 살짝 파랗게 변한 다인의 입술을 본 시율은 잠시 고민했지만 곧 그녀에게 싱긋 웃으며 물었다.
“우리, 라면 끓여 먹을까?”
“라면? 아, 라면도 있다고 했지.”
그의 말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 그녀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여태까지 제대로 된 음식은 먹은 적 없으니 환영이긴 한데, 괜찮겠어?”
“어제 너무 힘들었잖아. 이 정도 사치는 부려야 몸이 회복되지. 냄비 찾아서 끓일 테니까, 너는 다른 방에서 옷 갈아입고 와. 젖은 옷 입으면 감기 걸려. 그리고 교복 차림은 불편하니까 내 옷 빌려 줄게.”
“네가 먼저 갈아입어. 나보다 더 힘들었잖아.”
“난 이상하게 별로 안 추워. 오히려 몸 상태가 더 좋아진 것도 같고. 아무튼 나보다는 네가 더 급해 보이니까 걱정 말고 어서 가.”
“고마워. 너도 좀 젖었으니까 욕실에서 수건 가져다줄게. 아까 보니 욕실도 멀쩡하더라고. 물이 안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시율은 다인의 말에 살짝 웃고는 냄비를 찾아 서랍을 뒤졌다. 적당한 크기의 냄비를 발견한 후에는 물을 준비하기 위해 비를 받아 놨다.
라면을 끓이는데 깨끗한 생수를 쓰기는 아깝기에 그냥 빗물을 받아 끓여 쓸 생각이었다.
그런 시율의 모습을 본 다인은 배시시 웃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주고 배려해 준다는 것이, 믿을 수 있는 존재와 함께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미처 몰랐었다.
‘살고 싶어졌어. 시율이랑 함께라면 살아도 좋을 것 같아.’
엉망진창인 기억들에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것들을 떠올리면 슬프고, 증오스럽고 분노가 치솟았다. 엄마와 아빠의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러나 더 이상 죽고 싶지는 않아졌다.
시율과 함께라면 힘들더라도 웃을 수 있을 거다. 그와 함께라면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인은 손톱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괴로워하면서도 그녀에게 웃어 주려고 노력한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녀는 최후의 순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죽었다.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걱정하고 그렇게 숨이 끊어졌다.
‘엄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살고 싶어졌으니까.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시율의 가방에서 옷을 꺼낸 후 욕실로 가서 젖은 옷을 벗었다. 옷도 구하기 힘들어 3개월 내 입은 교복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녀는 거울로 비치는 상체에 난 시퍼런 멍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프긴 하지만 여태까지 이보다 더 지독한 고통을 버텨낸 적이 있기에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뼈에는 확실히 별 이상이 없는 것 같네. 하긴 그랬다면 움직이기도 힘들었겠지. 내상도 괜찮은 것 같고.’
다인은 안심하고 시율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긴팔 셔츠와 청바지였는데, 다행히 다인은 키가 평균보다 큰 편이여서 시율의 옷이 그런대로 맞았다. 시율이 마른 체격이기도 하고 아직 키가 많이 크지 않은 덕분이었다.
치마에서 바지로 갈아입자 훨씬 편해졌다. 여태까지 교복을 갈아입을 순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자들의 강요로 갈아입지 못했다. 교복을 입는 편이 더 할 맛이 난다나.
새삼 그들을 향해 혐오감이 치솟았다.
갈가리 찢어 버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놈들.
‘언젠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복수해야지.’
복수의 대상을 한 사람으로 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힘의 부족 탓이었다.
더 이상 삶을 연명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바로 목숨을 끊고 싶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복수는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작은 복수.
하지만 강화된 시율이 옆에 있으니 기회가 생겼다.
물론 시율을 함부로 위험에 빠트릴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좀 더 철저히 대비한 상태에서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총 같은 거라도 구해서.
그게 안 된다면 아쉬운 대로 수도에서 만날 군대에게 고발할 생각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종류의 범죄를 일으킨 놈들은 총살일 테니.
걸리는 것이 있다면… 과연 정말 수도가 무사해 군대나 정부가 있을 것이냐는 것.
정부나 군대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수도 없고 명색이 현대 무기들이 괴물과 자연재해가 있다고 해도 맥없이 당할 것 같지도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삼 개월이 흘러도 어떠한 구조 활동도 없는 것을 보면.
‘수도에서 시율의 가족을 찾는다면 안전한 곳에 정착해야지. 수도가 멀쩡하지 않고 시율이네 가족을 찾을 수 없다면… 시율과 안전한 곳을 찾아 정착하는 수밖에.’
식량은 농사와 채집으로 구해야 할 거다. 가끔 도시로 가서 몰래 멀쩡한 식료품들이나 필요한 집기들을 가져오고 식수는 반드시 필요하니 작은 냇가나 샘이 근처에 있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된 다음 기회가 되면 복수하러 가고, 시율이 위험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 나중에 다시 기회를 노려야지. 생존자를 만나면 살 가치가 있는 놈인지 아닌지 확인한 후 합류시키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인은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셔츠의 단추를 마저 잠갔다. 그러다 순간 손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손톱 끝에 보랏빛이 보였다.
“무슨……?”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윽고 그녀의 몸 전부가 걷잡을 수 없이 덜덜거리고 결국 그녀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손에 뭐가 보였지. 아아. 보라색이 보였지.
보라색, 보라색, 보라색… 보랏빛 손톱!
그녀의 어머니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몰고 간 빌어먹을 색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