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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25화)
제8장 그림자 무공(3)


2.

―삶은 언제나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다.

훗날 휘영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제일 먼저 한 말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모든 일이란 결국 선택의 연속이었다. 식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잠은 어떻게 잘 것인가? 어떤 사람을 사귈 것인가? 등등등.
사람은 알게 모르게 모든 순간마다 고민을 하고, 또한 어느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휘영도 이러한 선택의 굴레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스스로 화무휘의 그림자 운명을 받아들인 이후, 역설적이게도 그는 다른 평범한 이들보다 더욱 크고 중요한 고민과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림자 무공!
약관의 휘영으로 하여금 침식마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 열매는 달콤했다.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무공의 궁극적인 이상향이며, 그것만 있다면 능히 천하제일을 꿈꿀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통해 그림자라는 운명의 굴레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가혹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갈아먹는 것이며, 그 무엇을 성취하든 결국 그에게 남는 것은 오직 무(無)에 불과했다.
과연 그림자 무공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그림자라는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그는 방황했다. 때론 귀곡의 폭포수를 맞으며 고민했고, 때론 정처 없이 북망산을 뛰어다니며 고민했다. 때론 높은 나무에 올라 주위를 감상하며 고민했고, 심지어는 자해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며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가 선택을 해야만 ‘휘영’이라는 이름의 운명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확히 열흘간의 방황이 있은 뒤 자정 무렵.
휘영은 다시 귀곡으로 돌아왔다. 봉두난발한 머리칼, 마르고 초췌한 얼굴, 그리고 남루한 옷차림까지……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가운데, 그가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온 것이다.
무명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정자에 앉아 있었는데,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얼굴을 감싸고 있는 붕대도 그대로였고, 무심한 듯한 분위기도 그대로였으며, 심지어 오랜만에 나타난 제자에게 조금도 반가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대로였다.
“왔느냐.”
이윽고 무명이 무감동하게 내뱉은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말수가 적고 변함이 없기는 휘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짧은 목례로 스승에게 답한 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스승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잠시 침중한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다가, 돌연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제 결정을 했느냐?”
다시 무명이 나직이 물었지만, 휘영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결정을 하기에 앞서 스승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감히 스승에게 배움을 청하면서 조건을 내거는 것이냐? 여전히 건방진 녀석이구나.”
무명이 약간은 못마땅한 어투로 말했지만, 휘영은 재차 고개를 가로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조건이 아닙니다. 그림자 무공은 수련 과정이 지극히 어려우며, 또한 성취한 다음에도 영원히 불안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런 중대한 것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손하지만 동시에 확고한 어투.
무명은 이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휘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스승이 승낙한 것으로 알고 말을 이었다.
“제가 처음 천무심결에 의해 발작을 일으켰을 때, 스승님께서는 직접 절 구원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자고 있던 무휘를 깨워 절 구원해 주셨지요. 당시 무휘는 천무심결의 성취가 낮아 누군가의 운기를 도와주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다만…… 스승님께서는 무리함을 알면서도 무휘에게 나서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스승님께서도 저처럼 천무심결을 속성으로 익히신 게 아닌지요?”
“그렇다. 솔직히 나도 천무심결을 속성으로 익혔다.”
무명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휘영은 잠시 날카롭게 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뜩이나 붕대로 얼굴을 가린 스승은 오늘따라 더더욱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잠시 뜸을 들인 뒤, 휘영의 말은 계속되었다.
“제가 아무리 거지 출신이라고는 하나, 낙양에 살고 있는 이상 화검장에 대해서는 풍문을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화진 님과 오대검협을 제외하고, 스승님처럼 천무십이검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무휘조차도 스승님의 존재는 이 귀곡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스승님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존재가 아니십니까?”
“그렇다. 내 존재를 알고 있는 자는 화 대가주님을 비롯해 극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스승님은 천무십이검을 대성하셨지만 마지막 절기는 익히지 못하셨습니다. 만약 스승님께서 마지막 절기까지 아셨다면 무휘가 굳이 하산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 또한 네 말이 맞다. 난 분명 천무십이검의 비전 절기를 모른다. 대신 난 그림자 무공을 익혔다.”
이번에도 무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스승님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존재가 맞는 것인가?’
그제야 휘영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잠시. 이윽고 휘영은 낮지만 확고한 어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화무휘의 그림자인 것처럼, 혹시 스승님은 화진 님의 그림자가 아니십니까? 어쩌면 제가 지금부터 걷게 될 그림자의 길은 과거에 스승님께서 걸었던 운명의 굴레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닙니까?”
화진의 그림자!
그것이 바로 휘영이 추측한 무명의 정체였다.
휘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추측이 정확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마 화무휘도 스승의 정체에 대해서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나아가 무명 본인도 제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스승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해답을 듣고 싶었다.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그림자 무공은 모든 무사들이 꿈에 그리던 이상! 아무리 그 부작용이 크다고 한들…… 한번 무공을 접한 사람이라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유혹이 치명적이다고 해도 지금 휘영의 처지에서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스승이 그를 가르치는 의도도 모르고 있었다.
‘난 지금부터 스승님의 대답과 반응을 통해…… 스승님께서 내게 그림자 무공을 전수해 주려는 진짜 의도를 파악해야만 한다!’
이것이 그가 지난 며칠 동안 고민했던 이유이자, 동시에 지금 이렇게 스승에게 갑작스런 질문을 던진 이유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하하하핫! 재미있구나! 그것 참 재미있어!”
무명 스승은 돌연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나 억지웃음이 아니었다. 뱃속부터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이었고, 나중에는 배를 잡고 웃다가 아예 눈물까지 찔끔거릴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 웃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지금 네 녀석이 한 말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들어 본 말 중에 제일 재미있었다. 하하하핫!”
이건 무슨 말인가?
휘영은 당황했다. 그리고 스승의 웃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추리에 대해 확신하고 있던 만큼 그 당혹감도 컸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입니까? 대체 스승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휘영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약간은 악을 쓰듯 큰 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무명은 겨우 웃음을 거두었다.
“어차피 이름이란 한낱 허울에 불과한 것이거늘. 그것이 그리도 중요하단 말이냐?”
약간은 충고에 가까운 말투. 하지만 이 정도로 물러설 것이었으면 아예 처음부터 질문도 하지 않았을 휘영이었다.
“현재는 과거의 집합체이자 투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이름이 허울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름이 존재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정자에 앉은 스승을 올려다보며 오히려 더욱 대답을 재촉했다.
“이제 보니 언변이 제법이구나. 게다가 고집 또한 세다니……. 이럴 때는 정말이지 무휘와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마저 똑같구나!”
무명은 잠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휘영이 여전히 물러설 기미가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자, 이윽고 그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이라…… 나도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군.”
혼잣말에 가까운 낮고 자조적인 음성.
만약 정말 스승이 화진의 그림자가 아니라면, 대체 스승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연 스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스승을 응시하는 휘영의 얼굴에 더욱 호기심과 긴장이 어렸다.
무명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아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제자의 몸이 완전히 달아올랐을 무렵, 무명은 나직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내 이름은 무명이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 사람들은 모두 내 이름을 이렇게 불렀다. 천인검 화진이라고…….”
“……!”
“천인검 화진! 이것이 바로 네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내 과거의 이름이다!”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