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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교관 1권




사악교관 1(1화)
프롤로그(1)


붉다.
내가 서 있는 장소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랬다.
수많은 시체들, 그리고 그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
대지는 무수한 인간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악마…….”
살아남은 자가 있었나? 그럼 조용히 있을 것이지 괜히 말을 해서 죽음을 재촉하는군.
팔다리가 잘린 채 숨만 겨우 붙은 사내가 나를 보며 떨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나라면 망설이지 않고 죽였을 것이다. 그것도 최대한 잔인하게. 그래야 피가 많이 나올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사내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이런 사소한 일로 지금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온몸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
세상과 하나 되는 일체감.
이게 바로 탈마(脫魔)라는 건가?
좋군.
무엇보다 더 이상 피를 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Chapter 1 과거(1)


내 이름은 김명기(金冥器)다.
나는 대한민국의 건장한 사내다.
나는 나의 가족과 사랑하는 그녀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군대에 들어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연락이 뜸해진다 싶더니 결국 누구나 찾아온다는 이별이 찾아왔다.
너무 외롭다고, 남자는 역시 군필자가 최고란다.
“나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제대야. 1년도 안 남았어!”
나는 애원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돌아선 뒤였다.
내가 있는 곳은 최전방이었다. 초병 근무에 나갈 때는 실탄을 지급 받는다.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총구를 입에 물었다.
이 따위 인생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가 없구나. 그냥 죽자. 죽어서 나를 배신한 그년에게 복수하고 말테다.
살아온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주마등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여자들한테 꽤 인기 있었잖아? 굳이 그년한테 목멜 필요는 없잖아. 밖에 나가서 더 예쁘고 착한 여자 사귀면 되지. 바보같이 죽을 필요가 있을까?
망설임이 생겨났다. 총구를 입에 문 채 한참을 주저하던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제대하면 나도 군필자다!
나는 자살이란 얼마나 쓸모없고 허망한 행위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괜히 객기 부리다가 죽을 뻔했네.
나는 슬며시 총구를 빼려 했다.
그때. 초소의 문이 열렸다. 후임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사단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사단장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그 뒤로 같은 표정을 한 후임의 얼굴도 보였다.
회상이 너무 길었나 보다. 후임은 빠릿빠릿한 녀석이니 사단장이 찾아온다고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걸 생각에 빠진 나는 알아채지 못했고.
어쨌든 다급한 상황이었다. 나는 서둘러 총구를 입에서 뺐다. 아니, 빼려 했다.
마음이 너무 급했다. 총의 개머리판이 재수 없게도 무전기 선반에 걸렸다. 총은 움직이지 않는데 손만 앞으로 내밀게 되었다. 엄지는 아직 방아쇠 위에 위치한 상태였다.
손을 내미는 힘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타탕!
제기랄. 왜 하필 점사야.
그게 나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판타지 소설에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소재인 환생.
나는 그 환생이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니. 환생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는 분명 어머니의 몸을 빌려 아기의 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 전기였다.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거나 미래로 가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 와 버렸다.
미래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내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전율했다.
임진왜란을 막을 수도 있고 일본에 의한 강제 합병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국사 공부 좀 열심히 할걸! 그래도 국사 수업은 너무 졸렸어.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나는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나의 이름은 이번에도 명기였다. 정확하게는 임명기(林冥器)였다.
나는 두 번의 삶을 같은 이름으로 산다는 게 신기했다. 어렸을 때 잠깐.
그땐 김명기였고, 지금은 임명기니까.
단순한 우연이겠지.
나는 가볍게 생각했다.
나의 부모님은 지방의 하급 관리였다. 그렇게 청렴하지도 않고 그렇게 부패하지도 않았다. 적당적당히가 생활신조였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도 일가족 먹고사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20살이 되었다. 나의 혼담이 오고 갔다. 사냥꾼 김씨의 딸 순이라는 처자였다. 평범한 외모로 나보다 2살 어린 나이였는데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혼례 전날.
마을에 군인들이 찾아왔다. 반역도를 잡는다는 것이었다. 마을 현령이 끌려갔다. 하급 관리도 무사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아버지 덕에 우리 가족은 도망칠 수 있었다.
군인들은 그런 우리 가족을 쫓아왔다. 순이 아버지 김씨가 군인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일반인인 우리 가족이 사냥꾼과 군인을 따돌릴 순 없었다. 우리 가족은 결국 잡히고 말았다. 나는 잡힌 것보다 김씨가 왜 길을 안내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은 무사히 도망칠 수도 있었다. 나의 물음에 김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돈을 받기로 했다.”
“순이를 생각해서라도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망설이던 김씨는 작은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그 아이도 허락한 일이다.”
나는 김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옥에 갇혔다. 순이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순이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 갔다.
수감되었던 시간은 단 1년이었다.
1년 후 무죄로 방면되었다. 당연했다. 저지른 일이 없는데 무슨 죄란 말인가? 부모님은 역모 같은 일을 할 분들이 절대 아니었다. 자식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성격이 소심해서 그런 큰일이 있으면 근처에도 가지 않는 분이셨다.
옥에서 나온 것은 나 혼자였다. 부모님은 옥에서 쇄약해지다 병으로 돌아가셨다. 옥살이 6개월째에 있었던 일이다. 나 또한 바싹 말라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순이를 찾아갔다. 그녀에 대한 믿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찾아가면 반겨 줄 것 같았다.
믿음은 산산이 박살났다.
그녀는 결혼한 상태였다. 상대는 윗집 돌쇠 녀석이었다.
화가 폭발한 나는 돌쇠에게 달려들었다.
선방을 날렸기에 처음에는 내가 유리했다. 하지만 나의 몸은 1년간의 옥살이로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나는 돌쇠에게 두드려 맞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잘못한 사람은 순이를 뺏어 간 돌쇠 이놈이다!
악이 받쳤다. 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낭심을 차고 이빨로 깨물었다. 나의 독기 어린 공격에 돌쇠가 다시 약세로 접어들려고 했다.
그때 순이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날려 돌쇠에게 가는 나의 공격을 막았다.
나는 차마 순이를 때릴 수는 없었다. 돌쇠도 순이 때문인지 더 이상 나에게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싸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제야 순이가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원망이었다.
순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처음부터 네년과 네년 아비가 꾸민 일이구나. 왜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이냐? 네가 싫다고 했으면 나도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나를 가지고 논 것이냐!”
순이는 놀란 것 같았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이 똥그래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신반의한 목소리로 물었다.
“명기…… 오라버니?”
“크크크큭. 무어냐, 그 바보 같은 말은? 좀 더 요사스런 말을 해야 하지 않느냐?”
순이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오라버니는 죽었다고……. 그래서…….”
“그래서 고작 1년도 안 되어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이냐? 변명은 집어치워라.”
“결혼은…… 아버지가……강제로…… 흐윽.”
순이는 주저앉아 울었다. 그 태도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돌쇠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못했다.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순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몸조리나 잘해라.”
순이의 배는 볼록했다. 3개월 정도 되어 보였다. 간수가 나에게 곧 풀려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귀띔해 준 것이 3개월 전이었다.
나는 그 길로 마을을 떠났다.
내가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무협지를 읽으며 상상하던 곳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다.
나의 생각은 허망한 꿈이었다. 꿈은 여지없이 박살났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말을 배우는 데 2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여전히 떠돌았다. 한족들은 나를 오랑캐라 하여 무시하기 일쑤였다. 단순한 무시 정도는 참을 수 있지만 일자리 구하는 데에도 애로가 많았다.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무조건 나의 잘못이 되었다.
누군가 물건이 사라지기만 하면 내가 범인으로 몰렸다.
다시 1년을 더 떠돈 후 나는 낭인 무사가 되었다. 고금제일의 무공을 익히고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무협지와 같은 상황은, 이제는 꿈도 꾸지 못했다. 굶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의식주를 가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낭인 무사가 다였다.
나는 칼이라곤 잡아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막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믿을 것은 나의 독기뿐이었다.
그 독기 때문에 나는 독랑이란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비록 정식으로 무공을 배우진 않았지만 무수한 실전 경험은 나의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나의 실력은 이류 무사의 최상급. 실전에서는 일류 무사도 해치울 수 있을 정도였다.
낭인 무사로 생활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법 큰 의뢰가 들어왔다. 복호산 산적의 토벌이었다. 낭인을 50명이나 모으는 꽤 대형의 의뢰로 의뢰비도 높은 편이었다. 그만큼 복호산 산적의 악명이 높기도 했다.
나는 그 의뢰에 참여했다. 요즈음 들어 실력에 자신이 붙기도 했고, 친구 녀석이 참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