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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교관 1(25화)
Chapter 7 개학(3)


히콘과는 1년 정도 함께했다. 그동안 제법 친해졌었다. 20년간의 용병 생활 중에서 얼마 되지 않는 좋은 추억 중의 하나였다.
“너 그런데 굉장히 성공했다? 이렇게 큰 아카데미 학장도 되고.”
히콘은 이제 30대 후반이다. 아카데미 학장을 맞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나이다. 뭐 10년 전부터 발군의 실력을 자랑해서 성공할 싹을 보이긴 했다. 다만 겁이 좀 많은 게 단점이랄까.
“네가 첫 전투 때 오줌 지린 게 엊그제 같은데 많이 컸어.”
나의 말에 히콘은 당황해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학장실 안에는 나와 히콘뿐이다. 히콘은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다.
“무슨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시는 겁니까? 수통의 물을 흘린 거였습니다.”
“어, 그래. 좀 따뜻하고 냄새가 나는 물이었지, 아마.”
“그만! 그때는 첫 출전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들 첫 출전 때는 그런다던데. 크라이스 님이 레이아 앞에서 그 말을 하는 바람에. 크윽.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히콘이 노래 연습한다고 해서 나의 잠을 몇 번 깨게 만들었었다. 그게 괘심해서 놀려 줬었지. 히콘이 레이아를 짝사랑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시건방이랑은 잘됐냐?”
시건방은 레이아의 별명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겁도 없이 따지고 들어서 시건방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때는 제법 귀여웠는데 이제는 아줌마가 다 되었겠네.
“저. 결혼했습니다.”
“시건방이 용케 허락했네.”
당시 히콘이 레이아를 한참 쫓아다녔는데 레이아는 히콘이 싫다고 거들떠도 안 봤었다.
“레이아가 아니라 일레인과 결혼했습니다.”
“여우?”
“그 별명 일레인이 싫어할 텐데요.”
자기가 싫어하면 어쩔 거야?
이제야 생각이 난다. 히콘 이놈은 그 당시 레이아와 일레인 양쪽에 다 작업을 걸었었다. 그 사실을 들켰기에 레이아와 일레인이 정색을 하고 히콘을 피했었다. 그때는 레이아만큼이나 일레인도 히콘을 싫어했었는데.
“일레인이 용케 너랑 결혼했네?”
“제가 헤론 아카데미 학장이지 않습니까.”
“하긴. 여우가 괜히 여우가 아니지. 그때부터 계산이 좀 빠르긴 했어. 그런데 너 그런 말 네 입으로 하면 좀 비참하지 않냐?”
히콘은 당당하게 주장했다.
“어떻습니까. 일레인 정도의 여자를 얻는데 그 정도면 오히려 감지덕지죠.”
“하긴. 네가 좀 꿀리긴 해.”
히콘은 그저 그런 백작가의 자제다. 반면 일레인은 잘나가는 후작가의 여식이다. 게다가 히콘은 평범한 얼굴이지만 일레인은 미인으로 유명했다.
“저 이제 헤론 아카데미 학장입니다. 꿀릴 거 없습니다. 제가 일레인을 확 잡고 살고 있습니다.”
“잘도 그러겠다.”
나의 말에 히콘은 대답을 못했다. 멋쩍게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원래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히콘아. 나 너한테 부탁이 한 가지 있다.”
“무슨 일입니까? 크라이스 님 부탁이라면 안 되는 거 빼고 다 들어 드려야죠.”
뭐든지라고 하면 안 되겠니? 그러고 보면 너도 제법 계산이 빨라. 부부끼리 참 잘 어울린다.
“나. 여기 헤론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싶다.”
나의 말에 히콘은 크게 기뻐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입니다. 크라이스 님이 교수로 오기만 하면 제가 최고 연봉으로…….”
“아니다. 히콘아. 교수가 아니라 학생으로 올 거다.”
기쁨의 탄성을 내뱉던 히콘이 나의 말에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아카데미는 만학도는 받지 않는데요?”
나는 대답 대신 주문을 영창했다. 히콘은 내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페이스 폴리모프.”
나의 의지를 담은 언어는 마법이라는 형태로 발현되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10대 후반의 평범한 얼굴로 변했다. 원래의 크라이스가 25년 정도 어려진 모습 같았다.
“크라이스 님의 마법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언령이라는 형태로 마법을 구사하실 수 있는지.”
히콘의 눈이 번뜩거렸다. 미지의 것에 겁 없이 덤벼드는 것을 보면 이놈도 영락없는 마법사다. 그냥 놔두면 피곤해진다.
나는 살기를 담아 말해 주었다.
“궁금해하지 마라. 죽는다.”
나의 살기에 히콘은 깜짝 놀라며 뒤로 상체를 젖혔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래. 나도 너랑 계속 좋은 관계로 이어 나가고 싶다.”
나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은 금기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내가 모조리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히콘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눈앞에서 한 놈을 터뜨려 버린 적도 있었으니까.
“음울한 분위기는 잊고 원래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자. 이름은…… 내가 그동안 크라이스라는 이름으로 생활했는데 바꾸기도 귀찮으니 그대로 가자. 어차피 이 이름은 얼마 사용 안 했으니 그대로 써도 상관없을 거다.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신분은 네가 알아서 해라. 뭐 부유한 평민 자제 정도면 되겠지.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데 조슈아 헤밀라스하고 같은 반이 되게 해라.”
“조슈아 헤밀라스? 그게 누굽니까?”
“학장이라는 사람이 네 학생 이름도 몰라?”
“제가 무슨 천재인 줄 아십니까? 우리 아카데미에 학생이 몇 명인데 그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학생은 왜?”
“얼마 전부터 내가 가르치고 있다. 이왕이면 아카데미에서도 가르치는 걸 계속할까 생각한다. 집에서만 하면 시간이 너무 부족해. 그래서 가능하기만 하면 학생으로 위장 취학할 생각이다. 옆에서 바짝 쪼아 줘야지.”
나의 말에 히콘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크라이스 님께 배운다니 복 받은 학생이군요. 그럼 재질도 좋을 텐데 그런 학생을 몰랐다니 학장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재질 별로 안 좋아. 평범해.”
“예? 그런데 왜?……. 설마! 유부녀랑 눈 맞은 겁니까? 상대는 조슈아란 학생의 어머니고. 크라이스 님께 사랑을 받다니 복 받은 부인이군요. 그런데 혹시 불륜은 아니겠지요?”
히콘이 예전부터 망상이 심하기는 했어. 그래. 내가 참자.
“히콘아. 그런 거 아니다.”
“그럼…… 조슈아 학생의 누나! 그런 부러운…… 아니, 그건 아니고. 크라이스 님. 제가 아무리 처녀장가라고 말은 했지만 연세가 있으신데.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그거 범죄입니다. 범죄!”
그래. 때론 매도 필요한 거야. 사랑의 매. 뭐 지금은 사랑의 주먹일까?
“10년이란 시간이 길긴 긴가 봐.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도 됐지. 오랜만에 기억도 되살릴 겸 교육 한번 해 볼까?”
나는 슬쩍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히콘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아닙니다! 충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농담이었습니다. 농담. 에이. 그런데 그런 평범한 학생을 왜 굳이 가르치시는 겁니까?”
“그런 게 있어. 몰라도 돼. 그보다 내 부탁 들어줄 수 있냐?”
히콘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대답했다.
“저 학장입니다. 학장. 그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그럼 언제부터 학교에?”
어째 믿음직하지 못하다.
“나는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여기 기숙사제라고 하던데 기왕이면 방도 조슈아 그놈이랑 같이 썼으면 좋겠다.”
나의 말에 히콘의 얼굴에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아…… 기숙사 말이지요. 그 기숙사가 이미 배정이 다 끝나기는 했는데…… 크라이스 님이 굳이 원하신다면 조금 곤란하긴 하지만…… 바꿔 보도록…….”
“됐다. 곤란하면 굳이 같은 방으로 할 것까지는 없다. 그냥 알아서 하나 구해 줘.”
“지금 빈방이 없을 텐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히콘은 그렇게 말하곤 교장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히콘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는 방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곳을 사용하는 학생이 조금 문제가…….”
“문제가 있어 봤자 그놈이 그놈이지. 걱정 마라. 설마 내가 꼬맹이 하나 제대로 못 다룰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 물론 크라이스 님이라면 문제없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그놈이…….”
“잠만 잘 수 있으면 되지. 네가 곤란해하면서도 그 방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 다른 빈 방도 없는 거 같은데?”
“예.”
“그럼 거기 사용하지 뭐. 그런데 내가 말을 한 마리 키우는데 어떻게 놔둘 만한 곳 없냐?”
“제가 말한 기숙사가 원래 교수가 숙직실로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따로 떨어진 단독 건물이니 말 한 마리 정도는 키울 수 있을 겁니다.”
오호. 단독 건물이라.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쓰고 있다는 놈이야 적당히 교육시켜서 식순이로 쓰면 되겠고.
“거기 위치는 어디냐? 기숙사랑 떨어져 있어?”
“아닙니다. 기숙사 건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건물입니다. 기숙사만 찾으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딱 좋군. 기숙사 문제도 해결됐고. 그럼 나는 언제부터 학생으로 여기에 다닐 수 있는 거냐?”
“내일부터 다니실 수 있을 겁니다. 내일 아침에 저를 찾아오십시오. 아마 교장실에 있을 테지만 없으면 교직원들에게 물어보면 될 겁니다. 필요한 서류는 제가 알아서 처리해 놓겠습니다.”
“내가 귀찮은 거 싫어하는 성격인 걸 용케 기억하나 보구나.”
히콘이 생색내듯 말했다.
“그때 유독 귀찮은 건 싫어하셨지 않습니까? 덕분에 제가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온 걸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겠지?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라.”
“벨페론 공작님도요? 많이 기뻐하실 텐데.”
“그놈한테는 특히 말하지 마. 날 귀찮게 할 게 눈에 선하다.”
“하긴. 공작님이 크라이스 님을 좀 많이 따랐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내일 보자.”
“예. 크라이스 님.”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데 히콘이 갑자기 불렀다.
“저. 크라이스 님.”
“왜?”
히콘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레이아가 이곳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시건방이? 그 성격으로 용케 애들을 가르치네.”
내가 기억하는 레이아는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였다. 콧대 높고 자존심도 강했다.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절대 상상되지 않았었다.
“그녀는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괄괄한 성격은 그대로인가 보네. 데려가는 남자가 없는 걸 보니.”
“아직 크라이스 님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망할.
치열한 격전장이던 그리톤은 히콘이 온 후 1년 정도 지나자 전투가 거의 없어졌다. 전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피를 보는 일이 줄어들었기에 나는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리톤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레이아에게 고백 받았다.
그때 레이아는 20대 초반이었다.
나는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어쨌든 40은 훌쩍 넘었다. 외모도 반로환동 전이라 조금 젊어 보일 뿐이었다. 액면가는 40대 초반 정도.
그래서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레이아의 태도가 워낙 진지해 나중에는 진심이란 걸 알았지만, 나는 레이아의 마음이 순간적인 충동이라고 생각했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하여 인질이 납치범에게 애정을 느낀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전쟁터란 극한 상황에 있다 보니 레이아가 잠깐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수혈을 짚어 재워 두곤 그리톤을 떠났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다.
“내 일은 너만 알고 있어라.”
나는 교장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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