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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대제 1권
진마대제 1권(1화)
프롤로그(1)
1일.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날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인지할 수 있었고 사고할 수 있었다.
또한 한 번 본 것과 들은 것은 잊히지가 않았다.
우습게도, 신기한 것이라 여긴 이것은 나 같은 종족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뛰어나다고 말한 존재가 있었다.
태어나서 가장 처음 본 자.
조각 같은 얼굴을 덮고 있는 짙은 흑발과 붉은 눈동자에 어울리는 흑색의 롱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였다.
스스로 아버지라 밝힌 그가 나를 보며 한 마디 했다.
“영겁의 굴레를 짊어진, 진마로 태어난 걸 환영한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기쁨보다는 의미심장한 미소에 가까웠다.
그리고 난 아버지의 말을 그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1년.
인간들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빨랐다.
그 증거로 태어난 지 1년 된 내가 성인 남자의 덩치였고, 외모는 20대 초반이었다.
문득 거울을 바라보니 희다는 느낌보다는 창백한 것에 가까운 피부색 때문에 보다 더욱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버지와 같은 흑발. 똑같이 깎아 놓은 듯한 외모.
다른 점이라고는 아버지는 남성상에 가까웠고 자신은 여성상에 가깝다는 것뿐.
얼굴 형태와 생김새는 여성이란 느낌이 별로 없었지만 덩치가 호리호리한 탓인 듯했다.
하루 온종일 책만 읽었으니 종족 특성상 가지는 최소의 근육을 제외하고는 근육이 없었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내 뒤로 소리도 없이 나타난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더 이상 늙지도 않을 것이고 물리적 타격이 없는 한 죽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은 나로 하여금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특별한 게 없기에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셨다.
“너는 태초 뱀파이어의 피를 이었다. 널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자부심을 가져라!”
무슨 의도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 고민은 금방 해결이 되었다.
그 말이 끝나고 아버지가 날 데려간 곳은 넓은 홀이었다.
그곳에는 다른 진마들이 있었다.
모두들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고 감히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뱀파이어 간에 있는 서열, 그중에 아버지는 뱀파이어들의 왕이었다.
누구보다 짙은 순혈의 피를 지니고 있고, 누구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의 왕인 아버지였다.
대단한 아버지를 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진마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들의 눈에 서린 적개심을 읽을 수 있었다.
왜 적개심을 가지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진마의 심장에는 뱀파이어의 순수한 힘이 결집되어 있어서, 진마의 심장을 취할 경우 능력과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강한 힘을 지닐수록, 순혈에 가까운 혈통을 지녔을수록 그 효과는 대단하다.
나는 뱀파이어 왕의 아들이다. 순혈에 가까운 나의 심장은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먹이였다. 매일 집에 박혀 책만 읽으니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였겠지.
나에게 있어 힘, 왕이란 자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지만 적어도 진마들의 눈에 서려 있는 적개심의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10년.
시간이 흘렀지만 그다지 변한 것은 없다.
변한 것이라고는 완벽하게 익히게 된 마법과 뱀파이어의 권능들 그리고 뚜렷이 드러나게 된 나의 성향이었다.
그 성향이란 것이 특이했다.
책만 읽고, 다른 뱀파이어와는 달리 공격 성향이 전혀 없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따뜻한 말씀을 하셨다.
“특이한 놈. 돌연변이인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는 아버지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방금 아버지의 한 마디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매일 어딘지 모를 곳을 갔다가 성에 돌아오시는 아버지. 그럴 때마다 매번 홀에서 벽난로를 쬐며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언제나 다른 주제로 한 마디를 하셨다.
그 후에는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처럼 저 말을 하고 올라갈 것이란 생각과 달리 아버지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계셨다.
여전히 알듯 말듯 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다시 들자 이윽고 아버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보면 볼수록 정말 이상한 놈이야. 진마들 중에, 아니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녀 놓고, 정작 책을 읽으며 나날을 보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정말. 하하!”
유난히 길게 한마디를 더 내뱉은 아버지가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마치 자신이 그런 말을 했으니 네가 달라져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이 기록서를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뱀파이어 중 순수 혈통인 직계 진마로서 다음 대를 위해 꼭 하여야 하는 일이라고 했기에 마지못해 하는 중이다.
실제로 자신도 아버지의 기록서를 보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
아버지는 전형적인 뱀파이어였다. 진마의 특성상 피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피를 갈구하지는 않았지만 호전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기록서에도 뱀파이어인 것이 지겹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게 정확히 인간계 유희를 해 본 200년째 되는 시점에서부터였다.
인간계를 맛본 아버지는 그다음부터 유독 변함없는 지겨운 나날들을 싫어하셨다.
기록서에는 온통 그런 내용투성이였다.
그런 것만 봐 왔기에 그 영향을 안 받으래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탓에 인간 세상이 궁금해졌다.
무엇이 뱀파이어로 지내는 아버지의 나날들을 싫어하게 만든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간 세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태어나 난생 처음으로 성 밖을 나서 숲 속을 거닐어 보았다.
밤의 숲은 소설에서 했던 간접경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왜냐면 밤의 숲 또한 아무런 시야의 방해 없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했는데.
책의 저자를 떠올리자 절로 조소가 지어졌다.
역시 인간은 약해 빠진 하등한 종족인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인간 세상을 동경하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던 나의 예민한 청각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바람을 타고 피비린내가 흘러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호기심이 발동해 걸음을 그곳으로 옮겨 보았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소규모 마을을 습격하고 있는 산적들이었다.
그들은 반항하는 자들을 거침없이 베었다. 어린이라고 봐주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겁탈하려는 여인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을 경우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렸다.
그것을 보고는 마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의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책에서 봐 왔던 대로 악을 처벌한다, 그것이 마을로 들어선 이유의 전부였다.
그렇게 하면 피해를 받은 인간들은 언제나 악을 처벌한 자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지금이라고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난 산적들을 애써 제거하는 수고를 해주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들은 오히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을 위협하고 희롱하던 50명의 악을 제거해 줬는데, 어째서 두려워하는 것일까.
처음 맛본 인간 세계는 자신에게 또 다른 의문을 남겨 주었다.
그런 인간들을 뒤로한 채 성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을 때, 안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버지는 성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단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100년.
성의 한쪽 탑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서적을 모두 읽었다.
마지막 한 권을 다 읽고 기지개를 켰을 때, 이미 100년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
100년이란 시간 동안 뱀파이어로서, 진마로서 모든 권능을 자각하게 되었다.
또한 책을 보며 세상에 대한 이치를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책을 읽을 때 기대었던 길쭉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이제 이 세상에 읽을 책이 없어졌다. 물론 보지 않은 책이야 존재하겠지만 같은 맥락과 유사 내용을 되풀이한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탑에는 적어도 한 분야에 10권 이상의 다른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할까.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홀의 문이 활짝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홀에 들어서지 않고 문 밖에 서서 나에게 손짓하셨다.
보통 때라면 꿈쩍도 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지하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의 존재 이유는 모르나, 지금 넓은 그곳의 바닥에는 은은한 빛이 뿜어지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마법진 중앙으로 걸어가셨다. 잠시 멈칫한 나 또한 다시 걸음을 옮겨 아버지의 옆에 섰다.
그러자 아버지가 잠시간 나를 바라보았다.
이때 알았어야 했다.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그 짧은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의 두 손이 나의 가슴께를 향했다.
곧이어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졌고 어마어마한 기운이 나에게 들어왔다.
자연스레 기운을 끌어 올려 반항했다. 그러자 아버지의 입이 슬며시 열렸다.
“거부하지 말거라.”
아버지의 한 마디에 조심스레 기운을 거두자 득달같이 강대한 기운이 몸 안을 파고들었다.
또한 전혀 낯선 기억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위의 증상을 토대로 지금 상황을 유추해 보았다.
그리고 경악하게 되었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것이 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능력 전이 마법.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기억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어느새 마법진이 사라진 연무장에 나는 한동안 서 있었다.
가루처럼 흩어지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예의 그 미소를 짓고 계셨다.
또한 능력 전이 도중에 왜 이러냐는 눈빛을 수차례 보낸 결과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도, 귓가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이제 지쳤구나.”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든 능력과 기억을 받은 지금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인간계를 맛보고 온 후, 진마로서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인간계를 맛보고 난 후라는 것은 나의 그릇된 판단이었다.
아버지는 인간계가 아닌 태양 밑에서 떳떳이 살아가는 인간들, 즉 태양빛을 갈망한 것이다.
뱀파이어 종족에서 가장 우월한 진마일지라도 태양빛에 장시간 노출되면 죽게 된다.
만약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았을 경우에는 그 즉시 정신이 파괴되고 몸이 타들어 간다.
그것이 신에게 버려진 어둠의 종족이 평생 짊어져야 할 천벌인 것이다.
아버지는 인간계에서 태양빛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하는 인간들을 바로 곁에서 겪었다.
그로 인해 뱀파이어 종족들이 모두 지니는 태양의 갈망이 극에 달해 생을 포기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태어났고 아버지는 나로 인해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깊었던 태양의 갈망을 나 때문에 100년을 참으신 것이다.
그렇게 100년 동안 나로 인해 생을 지탱해 온 아버지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고 떠나셨다.
나에게 뱀파이어의 로드라는 직책을 남기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