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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1세기, 소드 마스터와 마왕과 외계인 1권(12화)
5. 외계인은 외계인(1)


간이 시험은 30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천일과 재운이 기묘한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자 합격했다며 작은 가방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천일의 전투 능력 4,500갤런.
재운의 전투 능력 3,200갤런.
이에 천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1만 갤런 정도는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구인 중 가장 강한 자의 전투 능력이 112만 갤런이었고 천일은 그자를 그랜드 소드 마스터 정도라고 생각했다.
익스퍼트 상급과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마나 써클 격차는 약 100배.
4,500에 100을 곱해도 45만일 뿐이었다. 112만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마왕은 신경 쓰지 말라며 순수하게 인간인 경우 최고가 9만 8천 갤런이라고 말했다.
9만 8천 갤런.
소드 마스터의 추정 전투 능력이 8만이었다. 그러니까 9만 8천은 소드 마스터 하급 정도의 수준이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궁극의 최강 경지란 말이다.’
천일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내 전투 능력은 18만 8천 갤런이다.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순수하게 인간은 아니지. 잡종이다.”
마왕님이 말씀하셨다.
“……!”
천일의 안색이 굳어졌다. 18만 8천이라는 수치 때문이었다. 천일은 TV에 등장했던 마왕의 전투 능력을 소드 마스터 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18만 8천?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라고 해도 그 수치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
“그럼, 여기까지다. 나는 일이 있다. 인연이 닿는다면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왕님은 그런 말을 남겨두고는 걸음을 옮겼다.
“잠깐! 잠깐. 그냥 가는 게 어딨어. 설명은 해줘야지.”
천일이 그런 말을 하며 따라붙었다.
“설명?”
마왕이 의문을 표했다.
“내가 남편이라며.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아직 미성년자라고.”
천일이 물었다.
“괘념치 마라. 그대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뜻하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단, 어둠의 진영에는 오지 마라. 그대를 나의 남편이라고 공표한 이상. 어둠의 진영에 오게 되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멋대로, 정말 멋대로, 지면을 박차고 시야 저편으로 사라졌다. 천일은 마왕이 늘어놓은 이야기에 놀라서 잠깐 머뭇거렸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나이트 차지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마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천일의 눈앞에서 허깨비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이게 진짜.’
천일은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느꼈다.
천일은 며칠 전에야 지구에서 벌어지는 빛과 어둠의 싸움에 대해 알았다. 그러나 마왕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나 어둠의 진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남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왕에게 목숨을 빚지고 말았다.
목숨을 빚지다. 지금부터 어떤 즐거움을 느껴도 전부 마왕의 덕이라는 소리다.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이 일로 인해 마왕의 신변에 무언가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참을 수 없을 터였다.
목에 가시가 박힌 기분이었다.
띠디디디.
천일은 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마왕에 대해 물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여서 주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말이야.”
천일이 설명을 했다.
“미안. 거기까지는 몰라. 나는 자유 진영이라고. 어둠의 진영 내부의 사정 알게 뭐야.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알아.”
주희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번호 하나를 불러주었다.
기록하는 자, 레코더(Recorder) 반 호뮬.
빛과 어둠의 전쟁을 기록하는 존재로 빛의 진영에도 어둠의 진영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실만을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구, 국제 전화!’
천일은 전화번호에 놀랐지만 한숨을 쉬는 것으로 걱정을 털어냈다. 돈보다 마왕의 사정을 아는 것이 급했다.
“야. 너, 뭐 하냐?”
언제 왔는지 재운이 천일에게 말을 걸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천일은 재운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럼 간다.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보자. 친구.”
재운이 그런 말을 하며 발을 돌렸다.
‘치, 친구? 저게 돌았나.’
천일은 살짝 불쾌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의미 없는 투닥임으로 번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냥 무시하고, 어차피 만날 일 없을 테니까 말이다.
“헬로(Hello).”
한국어로 치면 여보세요, 정도였다.
“아. 저기. 저기요. 아. 헤. 헬로.”
천일이 잠깐 버벅이다가 영어로 인사를 했다.
“…….”
“…….”
감도는 침묵.
“한국인?”
유창한 한국말이 툭 하고 등장했다.
“아? 예.”
“옳았군. 무슨 용무 입니까?”
묘한 문법을 사용하는 누군가였다.
“반 호뮬 씨 계십니까?”
“저입니다.”
“아, 저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은…….”
“Wait! 자, 잠깐. 잠깐.”
천일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자 상대방은 당황한 듯 잠깐을 외쳤고 잠시 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아. 예.”
천일은 머뭇거리며 마왕과 있었던 일을 말했다. 간간히 설명을 다시 해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모두 전달되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알겠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해도 될지 유감이군요. 외계인이 와서 상황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각오는 있습니까?”
반 호뮬이 물었다.
“각오?”
“물이 쏟아지면 도로 담을 수 없다, 입니다.”
“…….”
“각오가 필요합니다.”
“잠시만요. 무슨 각오를 말씀하는 것인지.”
“인생 전부가 날아가 버릴 겁니다.”
“인생 전부?”
“각오가 되면 전화해 주세요.”
뚝.
반 호뮬이 전화를 끊었다. 알고 있는 바는 있지만 천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겁다는 의미였다.
“각오라.”
천일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각오라니,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기도 했기에 흘려들을 수 없었다.
‘하루 정도 생각해 봐도 괜찮겠지? 집에 가자.’
천일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집으로 향했다. 합격도 했겠다, 계울시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집은 평온했다.
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언제나처럼 오후 8시 30분쯤이었다. 어머니는 주부로서 최선을 다하고 계셨고 동생은 학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UFO가 와서 빛과 어둠의 싸움을 뒤흔들고 모든 국가와 사람들을 놀라게 해도 일상은 일상이었다.
“합격했니? 그래. 잘됐구나. 이걸로 나도 한시름 놓았다.”
합격 소식을 접한 어머니가 말했다.
“하하.”
천일은 웃고 말았다.
“그래서 봉급은 언제 나오는 거니? 잘 모아두렴. 아니면 이 엄마한테 맡기고. 잘 모았다가 어른이 되면 주마.”
어머니께서 좋은 말로 ‘돈 나올 구멍은 나에게 넘기지? 아들.’이라고 말했다.
“봉급?”
천일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7급 공무원 급료가 나온다잖니. 모르는 거니?”
어머니야 말로 천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열어보지 않아서. 열어볼게, 엄마.”
천일은 그런 말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합격했다며 그쪽에서 준 작은 가방을 열어보기 위해서였다.
달칵.
가방은 007 서류 가방의 소형판이었다. 작은 상자 몇 개와 책받침같이 생긴 것, 신분증, 소형 책자 등이 들어 있었다.
천일은 먼저 책을 펼쳤다.

축하드립니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노바 스페이스 연맹이 주관하는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손에 넣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당신이 지구를 위해, 우주를 위해, 재능을 갈고닦아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첫 번째 장에는 아부성 발언이 잔뜩 있었다. 천일은 대수롭지 않게 휙 넘기고는 목차를 보았다.
상자의 내용물, 노바 스페이스 연맹이 주관하는 시험의 주된 내용, 지구를 향해 오고 있다는 프로페스에 대한 내용, 노바 스페이스 연맹에 관한 내용 등. 알아둬야 할 정보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끝에 가서야 자격을 손에 넣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혜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우와. 돈 많이 주네. 일 년이면 대체 얼마야. 엄마가 좋아하겠는걸.’
천일은 그런 생각을 하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엄마에게 사실을 알리고 자신이 아틀란티스 대륙에 있는 동안 통장 관리를 부탁한다고 했다.
“오냐. 잘 불려서 장가갈 때 밑천으로 쓰게 주마.”
어머니는 그런 말을 했다.
다시 방.
천일은 가방에 담겨 있는 작은 상자들 중 하나를 열었다. 거기에는 주홍색의 알약이 들어 있었는데, 보기에만 알약이고, 노바 스페이스 연맹이 만든 나노 머신의 덩어리 같은 거였다. 하루 정도 체내에 머물러 생체 정보를 모선으로 보내는 역할이라고 적혀 있었다.
반지.
약지에 끼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서포트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장치였다.
노바 스페이스 연맹이 지구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구로 다가오는 프로페스의 함선과 싸울 수 있는 전사였다. 방법은 어떤 것이라도 좋지만 이겨야 했다. 때문에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벌어지는 시험은 위험으로 가득했다. 잘못하면 죽는다. 그렇기엔 노바 스페이스 연맹은 그들의 법에 따라 서포트 기능을 제공해야 했다.
전투를 속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쉴드가 발동하고 정해진 곳으로 이동되어 치료를 받는다.
그 외에도 통역 기능, 물건의 수납을 위한 공간 왜곡 상자와 긴급 탈출 기능, 장거리 순간 이동 기능, 소환 기능 등이 제공되었다. 때문에 반지를 반드시 착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서포트 기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상자에는 MP3 플레이어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육성으로 유언장 같은 것을 작성하라는 뜻이었다.
노바 스페이스 연맹이 서포트 시스템을 제공하더라도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벌어지는 시험은 위험으로 가득했다. 시험을 치르다 죽을 수 있으니 각오해 두라는 뜻이었다.
남은 상자 두 개는 사용할지 말지를 응시생에게 맡겨두었다. 하나는 DNA 최적화를 통해 보다 싸움에 적합하도록 신체를 개량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들어내는 씨앗이었다. 설명서에는 이를 두고 DNA에 관한 노바 스페이스 연맹의 이론이 주절주절 적혀 있었다.
‘일단 두 개는 무시할까.’
천일은 지금 당장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선택해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천일은 알약을 먹고 반지를 착용하고 마왕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녀는 어째서 괘념치 말라고 한 것일까? 천일은 각오라는 것을 하기로 했다.
반 호뮬이 말한 각오가 무엇인지 짐작되어서가 아니다. 다만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삶이란 겨우 그 정도의 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천일은 알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무언가를 손에 넣을 수 있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있음을.
행복에 겨워, 불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손에서 맴도는 행복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각오가 되었다, 라고 했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믿습니다.”
반 호뮬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마왕 가문의 역사와 그 의의 그리고 어둠의 진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중간 중간 영어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반지의 힘이 영어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야기는 3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끝났다.
“그럼. 힘내세요. 파이팅.”
달칵.
반 호뮬이 통화를 끊었다.
“…….”
천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천일은 이전의 삶에서 무수히 많은 종류의 불행을 보았다. 평범한 소년이 소드 마스터를 지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이르러 늙어 죽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약 1천 년. 어떤 불행도 천일에게 걸리면 세상이 다 그렇지, 라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마왕이 짊어진 숙명과 그녀의 각오에 관한 것은 뼈가 시릴 정도로 불쾌한 내용이었다. 마음이 아파왔다.
동시에.
마왕이 가지고 싶어졌다. 마왕은 표정이 없고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름다웠다. 천일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자신의 목숨과 운명과 그 모든 것을 신념에 바쳤다. 그런 여자가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천일은 그런 상황을 못 본 척 흘려보낼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운명? 후후. 똥보다 못한 단어다. 의미가 없지. 세뇌에 불과한 이야기. 하지만.’
천일은 어떻게 해서든 마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물론 단순히 마왕과 결혼하여 남편인 진왕이 될 생각은 없었다. 마왕을 옥죄고 있는 운명이라는 놈은 가벼운 마음으로 어울리기에는 엿가락 이상으로 엿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운명을 부수어야 했다. 지옥에 가기 싫으니 지옥을 때려 부순다는 소리였다.

학교.
천일은 담임에게 간이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노바 스페이스 연맹이 주관하는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냐. 좋겠구나. 축하한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나중에라도 꼭 졸업을 해야 한다. 알았지?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해. 돈이 많아도 지위가 있어도 학식이 뒤를 받쳐 주지 않으면 말이다.”
담임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천일이 이제부터 걸어야 할 길은 자신이 이러쿵저러쿵 조언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례 시간.
담임은 천일이 노바 스페이스 연맹이 주관하는 간이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휴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
조용.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입학을 하고 수개월 만에 외계인이 등장, 천일은 그 뒤로 한 달을 넘게 수업을 받지 않았다.
아이들이 보기에 천일은 사교성이 제로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반 활동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약간 소극적으로 모범적인 생활에 충실하던 소년이었다.
“축하한다. 지구의 미래는 너에게 달렸다!”
그러나 아이들 중에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반 친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는 녀석이 있었다.
“응. 고마워. 지구의 미래는 나에게 맡겨.”
천일이 답했다.
단지 그것뿐.
천일은 끝으로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왔다. 다시 학교에 돌아오게 된다고 해도 저들과 어울려서 수업 받을 일은 없으려니 했다.
천일이 좀 더 오랜 시간 저들과 어울렸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터였다.
‘그럼 검도부 도장에 가볼까.’
천일은 검도부에도 얼굴을 디밀어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