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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1세기, 소드 마스터와 마왕과 외계인 1권(23화)
7. 바이벨로나 시티 공방전―하(5)


“잡히기만 하거라. 다리몽둥이를 똑 하고 분질러 주지.”
베베도 자존심이 있지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헤에. 그럼 좋다! 보여주지. 강철 2단계! 필살! 아무렇게나 줘 패기!”
기술명이 참으로 재운스럽달까, 눈살을 찌푸리고 싶을 정도로 성의가 보이지 않았지만 위력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의 재운은 강철을 3단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강철은 육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2단계의 경우 진짜 강철과 경도와 강도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3단계는 그 이상이었고. 아무렇게나 줘 패기! 라는 기술은 그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주먹이며 발이며 뻗으며 돌진하는 것을 말했다.
퍼퍼퍼퍽.
“으랴으랴! 흡혈귀 녀석! 나가떨어져라!”
재운이 신나서 소리쳤다. 베베의 외견은 10대 초반의 소녀인데 잘도 때렸다. 죄책감 같은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파. 아프니라. 적당히 하지 못할까. 같은 팀인데도 손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는구나.’
베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옛일을 떠올렸다.
베리도넬 R 베아트리체는 10대 초반에 흡혈귀가 되었다. 그래서 별 힘도 없이 두들겨 맞아가며 무시당하고 실험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망할 스승.
흡혈귀를 연구한답시고 흡혈귀의 피를 어린 제자의 혈관에 주입하다니. 생각하면 쳐 죽여도 시원찮을 스승이지만 나쁜 일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물, 불, 바람, 땅, 에테르. 지금은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4원소설과 에테르를 붙잡고 늘어졌던 연금술사. 언젠가 철을 금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인정받겠다고 큰소리치던 여자였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어리석은 추억일 뿐이로다.’
베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스승의 이론을 떠올렸다.
순간.
우웅.
귀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뭐랄까, 영혼을 울린달까. 머릿속으로 직접 울린달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존귀한 자여. 힘을 원하는가?―
그저 그런 소리가 있었다. 베베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니라. 나에게는 힘이 필요하니라.’고 답했다.
어디서 누가 묻는지도 모르면서, 머릿속 망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우웅.
또, 한차례 이상한 소리가 베베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욱 선명한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당연하다 하지 않았느냐. 줄 힘이 있거든 냉큼 내놓거라!”
베베는 자신도 모르게 목청을 크게 높였다.
“……!”
때문에 재운이 뒤로 물러났다.
고오오.
베베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이어 바람을 타고 불길이 솟구쳤다. 뭘까, 재운은 몇 걸음을 더 물러났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진조란 원소를 지배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었구나.”
베베가 소리쳤다.
불과 바람.
잠시 후 불바람이 사라지며 베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어금니가 삐죽 하고 입술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전형적인 흡혈귀의 모습이었다.
“괜찮은 거냐?”
재운이 물었다.
“인간, 지금까지 잘도 날 때렸겠다! 각오하거라.”
베베가 말했다.
“자, 잠깐. 잠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비겁한 녀석!”
재운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그런 외침을 쏟아냈다.
“파이어 스톰.”
베베가 히죽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콰아아아.
재운을 중심으로 불길로 만들어진 회오리바람이 솟구쳤다.
“크아악! 강철 3단계!”
재운이 강철을 한 단계 올렸지만 베베가 불러낸 파이어스톰을 견딜 수는 없었다. 10초 정도. 베베의 파이어 스톰은 딱 그 정도 재운을 휘감았다.
푸쉬식.
재운이 검게 타버렸다.
“파하.”
그을음 섞인 숨을 토하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호호. 본녀는 불과 바람을 지배하게 되었느니라.”
이때, 베베 자신은 몰랐지만 그녀의 전투 능력은 큰 폭으로 성장하여 마왕을 뛰어넘어 천일의 근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베베는 주변에서 몰려드는 섬뜩한 살기들을 느꼈다. 그렇기에 재빨리 재운을 향해 불덩이를 날렸다.
파앗.
재운이 빛이 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베리도넬 R 베아트리체 님. 아니, 이제는 님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겠지. 데블런 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너희들의 대장을 처리할 때까지 얌전히 있어줘야겠다.”
데블런이 하얀 양복을 입고 있다면 조잘거린 흡혈귀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넥타이, 검은 중절모도 함께.
“많이 컸구나, 도이넬드. 로얄블러드 가문의 일원으로 선택받지도 못한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베베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하지만 허세였다. 도이넬드의 전투 능력이 35만 갤런 정도임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타버리거라, 애송이.”
베베가 말했다.
화아악.
불길이 도이넬드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불은 흡혈귀에게 있어 천적과도 같은 것. 어느 정도는 통하리라 믿었다.
“푸하.”
한심함이 섞인 한숨.
“……!”
베베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불러낸 불길이 어둠에 밀려 도이넬드의 몸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한 때문이었다.
“밤의 가호와 피의 원조를 받는 우리들에게 그런 조잡한 불꽃이 통하리라 생각한 건가? 이거야, 원. 옛날에는 제법 똑똑했었는데. 쯧.”
도이넬드는 한심했는지 혀까지 찼다.
“이것도 받아보거라!”
베베가 손을 휘둘렀다. 궤적을 따라 바람의 칼날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도이넬드에게는 닿지 않았다.
“발악은 그쯤 했으면 좋겠군. 팔팔한 상태로 있어 줘야 데블런 님이 고문할 것이 아닌가. 어설픈 재주로 날뛰면 아픈 꼴을 당하게 될 거야.”
도이넬드는 베베의 기술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보였다.
“큭.”
베베가 신음을 삼켰다. 이제 막 힘을 손에 넣은 참이다. 사용법을 익히고 합당한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스르륵.
베베는 눈을 감았다. 밖에서 보면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이넬드는 베베가 순순히 체념할 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분명 뭔가 꾀를 생각해 내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포위망을 구축한 뒤 가만 놔두었다.
10분 정도가 지났다.
“길을 열어라!”
커다란 외침이 있고 마왕이 등장했다. 그녀는 흡혈귀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둠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검이었다.
“마왕 폐하? 데블런 님도 사람이 나쁘지. 마왕 폐하라 해도 베리도넬 R 베아트리체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음을 아시면서. 쯧.”
혀를 한번 찬 도이넬드가 마왕의 앞에 섰다.
“마왕님, 너무 설치면 곤란합니다. 얌전히 물러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눈감아 드리죠.”
도이넬드가 예의를 갖추었다.
“네놈, 나를 모욕할 셈인가! 가문에도 들지 못한 흡혈귀 주제에. 감히 마왕인 나에게!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죽일 것이다.”
마왕이 준엄하게 소리쳤다.
히죽.
도이넬드는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를 보였다.
“네, 이놈!”
마왕이 소리쳤다. 마왕은 어둠의 징벌이라는 권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에 속한 자라면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대상자는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절대적인 처벌. 하지만 아틀란티스 월드에서 지구인은 전부 서포트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 기술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대상자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하고 의식을 거행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마왕 자신의 수명을 10년 정도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마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특히 적이 이렇게 뻔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럼, 잠시 실례.”
도이넬드가 그런 말을 하고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콰득.
마왕의 복부 갑옷에 균열이 생겼다. 도이넬드의 주먹이 금속판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컥.”
마왕의 허리가 꺾였다.
“얌전히 계셔주세요, 마왕 폐하. 가주께서는 아직 당신을 처분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부디.”
도이넬드가 중얼거렸다. 위협이었다.
쑤걱.
마왕은 썩어도 마왕이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이 들어도 그대로 맞아주기만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얌전히 있어야 할 놈은 너다, 도이넬드.”
마왕이 소리쳤다. 그리고 도이넬드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는 마왕의 검에서 어둠이 줄기줄기 뻗어나와 도이넬드의 전신을 감쌌다. 마왕은 밤의 가호나 피의 원조 같은 것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어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신의 피가 섞인 인간이자 요괴.
어둠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어둠에 속한 모든 생명체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푸쉭.
도이넬드는 자신의 모습을 검은 안개로 변화시켜 마왕의 어둠에서 몸을 피했다. 그러고는 거리를 두고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역시 마왕 폐하. 이제부터는 저도 진심으로 하도록 하지요.”
도이넬드가 잘난 척 지껄였다.
“네 실수는 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는 것이니라, 도이넬드!”
동시에 베베의 외침이 울렸다.
콰아아.
베베의 몸이 밝은 주황빛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크게 솟구친 그 불꽃은 갈래갈래 뻗어나와 도이넬드를 비롯한 흡혈귀들을 덮쳤다.
“크아아악.”
“아아아악.”
도이넬드를 제외한 흡혈귀들이 괴성을 지르더니 빛이 되어 사라졌다. 병원으로 직행이란 소리다.
치이익.
“어둠이! 어둠이 타고 있다?”
도이넬드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불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뿜어낸 어둠이 주황색 불꽃에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본녀는 진조가 되었느니라. 진조라 함은 원소를 지배하는 흡혈귀. 구시대에는 그런 자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지. 배움이 짧은 네가 알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만. 어쨌든 이쯤에서 퇴장하거라. 본녀가 힘의 사용법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 고맙구나.”
베베가 그런 말을 하며 능력의 출력을 높였다. 그러자 잔잔하게 어둠을 태우던 불길이 돌연 급격하게 거세지더니 도이넬드의 몸을 태워 버렸다.
팟.
도이넬드 역시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것이 진조의 힘인가?”
마왕이 물었다.
“그렇더구나. 그런데 몸은 어떠하느냐. 한 방 맞은 것 같아 보이더만.”
“문제없다.”
“문제가 없다 했느냐?”
“나보다는 천일이 걱정이다. 데블런이 그를 노리고 나타났다.”
마왕이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큰일이로구나. 본녀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가보지 않을 수 없구나.”
베베는 그렇게 말하며 한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이 어느 정도 멀어지자 마왕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복부를 움켜쥐었다.
“커헉.”
검붉은 피를 토했다.
‘부디 무사하길.’
마왕은 마음속으로 천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상처 치료에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