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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을 팔았다 1권(25화)
7. 조짐(3)
답안지 작성이 끝나고, 종이 울리자 교사는 회수한 답안지를 가지고 나가 버린다.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답을 맞춰 보기 시작했다. 맞았다, 틀렸다를 연발하며 아쉬워하거나 기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상실은 다음 과목의 필기노트를 꺼내 들었다.
암만 답을 맞춰 봐야 이미 떠나간 배다. 신경을 끊고, 다음 과목을 위해 책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나, 대부분은 떠나간 배를 아쉬워하거나 모자란 수면시간 탓에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소년이 빠르게 노트를 훑었다. 얼마지 않아, 새로운 교사가 들어오며 종이 울렸다.
“잘 봤어?”
시험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온 지현의 물음에 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쉬웠다. 끊임없이 보고, 또 보던 내용을 찾아서 답안지를 마킹하기만 하면 되니, 시간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몇 점?”
소녀가 신 나서 물었다. 그녀도 자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맞춰 보니, 성적이 전보다 더 올랐다. 계속 이런 페이스라면 전교 순위권도 망상은 아니다.
“안 맞춰 봤어.”
“왜!”
지현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반문했다.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서도 성적이 궁금하지 않단 말인가? 소년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공부해야지.”
내일 시험 볼 과목만을 남겨 두고 가방에 넣은 그는, 지현이 뭘 하건 암기에 여념이 없다. 얼마쯤 뒤에 담임이 와서 종례를 하자, 상실도 집으로 갈 준비를 끝마쳤다. 시험기간 동안은 야자가 없으니, 집에 가서 공부할 요량이었다. 지현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집에 가서 공부할 거야?”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같이 할까?”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간 같이 공부했던 거야, 모르는 걸 배워야 하고, 함께 공부하니 편했던 이유가 있었다만, 지금은 명확한 범위만 공부하면 된다. 이미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사항을 꼼꼼하게 암기하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함께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어디서 공부한단 말인가? 야자는 안 되고, 도서관이라면 다른 사람으로 가득할 것이다. 남는 건 자신의 집이나 지현의 집인데, 어느 곳을 가도 식사를 하기 위해선 번거로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
지현이 더는 말 못하고, 맥이 빠져서 말했다.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한마디 해 주며 교실을 나선다.
“시험 끝나면 다시 부탁할게.”
말 한마디에 소녀가 화색이 되어 따라나섰고, 둘은 은근슬쩍 무리로 끼어드는 학생들과 함께 교문으로 향했다.
“씨발.”
교실에 남아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박지원이 욕을 읊조렸다.
분명 상실이 등교거부할 때까진 자신이 교실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뭘 하든 자기 주도로 아이들이 움직였고, 언성을 높일라치면 다들 기가 죽어서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곁에서 알랑거리던 녀석들도 떨어져 나갔다. 한때 벌레처럼 취급했던 상실은 등교한 이후부터 빠르게 변해 나가는데, 자신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억울했다. 학교를 나오지 않는 동안 뭘 했었는지 몰라도,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이게 말이나 돼? 그것만으로 끝났으면 그로서도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현이 그 옆에 찰싹 붙어서 웃고 있는 것을 보면 분통이 터졌다.
내가 먼저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표현하고도 이어지지 못했는데, 저놈은 덜컥 곁에 끌고 다니고, 지현은 그게 좋다고 헤헤거린다. 배알이 뒤틀렸다.
모두가 너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별 볼 일 없어진 것도, 지현이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 것도, 선생들에게 주의를 받게 된 것도 모두가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차라리 학교에 나오지 않고 죽어 버렸으면!
박탈감에 증오가 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설 수가 없다. 무섭다. 아직도 떠오른다.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을 당시의 기억이. 한 손으로 자신을 들어서 노려보는 시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개새끼.”
차마 면전에서는 하지 못한 욕을 홀로 말하며, 지원은 쓸쓸하게 가방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상실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케이유 엔터테인먼트라 써져 있는 작은 종이는 금일 하굣길을 막아선 남자가 건넨 물건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시험기간이 끝나면 연락하겠다는 말로 돌려세웠다.
“세 번째.”
에스지에서 찾아왔던 이후로 두 번째 연예기획사다. 엄마가 밤길을 다니는 것도 불안하고, 고생하시는 것을 더는 보기 싫었기에, 시험이 끝나면 계약을 맺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다.
시험이 끝나는 주말에 날을 잡아, 세 곳의 매니저들과 동시에 만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연예인이라는 감투는 통장의 돈을 빼 오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제일 아쉬운 입장의 회사를 골라 계약하면 그만이다. 만일 그런 곳이 없다면 제일 대가 약한 놈을 잡고 협박하면 그뿐이다. 보통의 인간이 그의 기세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아직 시험이 끝나려면 시간이 필요하기에, 일단은 나중으로 미룬다. 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눌렀다. 잠시 뒤, 파란 바탕화면이 떠오르자 인터넷을 검색하니, 검색어 일 순위에 연쇄살인마가 있다. 바로 밑에 있는 검색어는 부산 살인마.
그에 연관한 기사를 훑는 표정이 불쾌해 보인다. 부산을 중심으로 무작위로 움직이며 살인행각을 벌이는 범인의 정체에 대해 많은 말이 있었지만, 그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무수하게 깔려 있을 경찰을 따돌리며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놈이라면, 먹이를 가로채어 갔던 그놈밖에 없다.
당장에 달려가서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미 하나가 나온 마당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신도 있다. 그런 상황인데, 또 뭔가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 악마가 다른 누군가와 계약을 맺을 수도 있는 거고, 악마가 하나만 있으란 법은 없다. 게다가 악마도 있는 판이다. 천사나 신이 없다고 속단할 수도 없었다.
전이라면 헛소리라 치부했을 사항까지 고려하자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행동은 엄마를 보호하며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좋지 않아.”
점차 위기감이 엄습해 온다. 악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후회할 것이다.”
짧고도 의미심장한 말이 소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성적은 잘 나온 거 같아?”
마지막 시험이 끝난 금요일 종례시간. 담임이 능글맞게 웃으며 묻는다. 이에 울상이 된 학생들도 있었고, 반대로 웃는 이들도 있었다. 지현은 후자에 속했다.
맞춰 본 것이 정확하고, 답안지를 밀려 쓰지만 않았다면 평균이 상위권이다. 전교 삼십 등은 쉽게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상실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잘 본 건지, 못 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물어봐도 맞춰 보지 않았다는 말만 돌아오니, 자기 혼자만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김이 빠졌다.
“성적표는 다음 주에 나오니까, 마음의 준비를 잘 해 둬라. 이상.”
담임이 말을 마치자, 반장이 일어나 인사한다. 반 일동이 동시에 인사하고, 담임은 고개를 끄덕여 받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청소할 아이들이 남아 부산을 떨고, 나머지는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신 나서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최소한 이번 주말은 자유 시간이다.
“시험도 끝났는데, 할 거 있니?”
지현의 물었다. 할 게 없다면 같이 놀았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상실로선 오늘 할 일이 있었다.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응.”
“뭔데?”
“그런 게 있어.”
소년이 대충 둘러대고 가방을 들었다. 더는 알려 주지 않겠다는 행동에 소녀는 아쉬워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가 아는 한 상실이 하는 일이라곤 공부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짧은 기간 동안 진도를 이만큼이나 따라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런 상실이 할 일이 있다니, 뭔가 궁리를 해 봤지만 막상 떠오르는 게 없다. 시험이 끝났으니, 아무리 그라도 이번 주말까지 공부하진 않을 거다. 이성이건 동성이건 친구를 만나는 것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현 자신을 제외한 누구와도 어울리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획사 사람들 만날 거야? 그렇지?”
며칠 전에도 연예기획사 사람들이 와서 명함을 주고 갔음을 상기한 소녀는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들떠서 물었다. 그녀가 함께 본 것만 세 번째였다. 시험도 끝났겠다, 오늘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것이라 짐작하니 그럴듯하다.
예상대로 상실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상실은 매몰차게 소녀의 말을 잘라냈다. 괜히 혹을 달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박에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지현이 입을 삐죽였지만 번복할 생각은 없다. 이런 건이라면 도움은커녕, 같이 가서 상황만 어수선하게 만들 뿐이다.
“나중에 말해 줄게.”
함께 공부하며 신세도 졌고, 앞으로도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여지를 남기자, 그제야 마지못해 납득하는 눈치다. 사실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그로선 상관없었다. 지현이 순순히 협조하는 게 더 낫지만, 협조하지 않더라도 강압하면 그만이다.
“내일 보자.”
먼저 가겠다는 뜻으로 말하자, 지현이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물었다. 이번엔 다른 내용이다.
“주말엔 뭐 해?”
솔직히 말해서 지현은 놀고 싶었다. 그간 상실과 공부하느라 즐겁기는 했지만, 공부보다는 노는 게 더 즐거운 나이다. 시험이 끝났으니, 학창시절 중 몇 없는 자유 시간을 만끽하고 싶은 심정으로 물어본 것이었으나, 소년은 기대를 무참히 깨부쉈다.
“공부해야지.”
담담하게 말하는 상실을 괴이한 생물 보듯이 바라본 지현은 같이 놀자고 말하려 했지만, 어째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같이 공부하자고 말하기엔 지난 시간 동안 줄기차게 파고들었던 공부가 지겨웠다.
“아, 그래?”
다른 친구들과 놀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소녀는 문득, 상실이 오늘 기획사 사람들과 만난다고 했음을 떠올리곤 생각을 바꿨다. 말이야 공부하자고 해 놓고, 만난 다음에는 놀면 되는 일 아닌가? 설마하니 상실도 사람일 건데, 놀자는 말에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같이 놀면서 겸사겸사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물어보고.
좋은 생각이라 결론지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공부할래?”
“좋을 대로.”
공부를 도와주겠다는데, 소년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약속했다? 저녁에 전화할게!”
흔쾌한 승낙에, 소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먼저 교실 밖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내일 입을 옷과 뭘 하며 놀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는 영혼을 팔았다』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