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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화)
Prologue
레이센이 말했다.
“시온 잉그리드 슈마허. 당신을 연구소 폭파 및 방화 살인 혐의로 말살하겠습니다. 저항해도 상관없지만, 그런 건 무의미합니다. 고통의 시간만 늘어날 뿐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말살이라니 살벌한데. 이 행성에선 자기를 변호할 권리도, 재판을 받을 기회도 안 주고 사람을 죽이나?”
“그런 건 모릅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으세요.”
“네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누가 시켰지? 오르펠이냐?”
레이센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께서는 이미 당신의 배신을 눈치채고 계셨습니다.”
“넌 아직도 그 쓰레기를 로드라고 부르는구나.”
“로드는 로드니까요.”
“레이센, 분명 난 상위 개체인 널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도 없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고 나와 함께하자. 놈들이 지금껏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
레이센의 금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내 뜻을 부정했다.
“분명 그 연구소에서 행하던 인체 실험은 제국법과 행성 윤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과 범죄가 용서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테러리스트일 뿐, 정의의 사도가 아닙니다. 시온.”
“레이센. 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목소리가 떨리는 거지? 왜 아직까지 나한테 존댓말을 쓰는 거지? 대답해 봐.”
“시끄… 러워요.”
나는 레이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전신 슈트에 부착된 광선검을 양손으로 뽑아내고 있던 그녀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습니다.”
“생각해 봐.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실험을 받아왔어.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걸 보면서 살았잖아. 너라면, 나를 가장 잘 아는 너라면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먼저 나와 상의했어야 했습니다!”
“난 그저 돌아갈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이야기라면 지금부터 하면 돼. 너를 이해시킬 거라고 약속할게.”
나는 도망치려는 레이센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반항하던 레이센의 몸이 경직된다.
곧 반항은 느슨해지고, 그녀의 전신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허리를 끌어안은 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온…….”
레이센이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녀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육체 개조 실험을 받고 같은 지옥을 헤쳐 온 그녀라면, 분명히 이를 종결시키고자 했던 내 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고마워, 레이센.”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빼앗았다.
“그리고, 미안해.”
“윽……?”
레이센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등 뒤로 피 묻은 손이 비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나노 머신이 장착된 칩을 쥔 나의 우수(右手)였다.
“시, 시온……? 왜……?”
“상위 개체는 체내에 이 퍼스트 오더(First Order)를 삽입하게 되어 있지.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로드라고 부르는 쓰레기는 퍼스트 오더를 이용해서 개체를 강제로 조종할 수 있어.”
빠직!
칩을 움켜쥐어 박살 낸 순간,
“우웩!”
레이센이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서둘러 치료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만… 난 널 치료할 시간이 없어. 정말 미안하다.”
털썩!
배를 뚫은 손을 뽑아내자, 레이센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입을 뻐끔거리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나는 연구소 공방의 타일 문을 열었다.
철컥철컥.
“응?”
그런데 이상했다.
마치 밖에서 열쇠가 걸린 것처럼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잠금장치 따윈 없는 보통 문이었는데 말이다.
화아아악!
이변을 눈치챈 것은 순간이었다.
시야 아래가 번쩍이는 느낌을 받고 내려다보자, 바닥이 온통 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수식과 기호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원형의 진이었다.
“디멘션게이트! 아뿔싸!”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멘션게이트.
그것은 인공적으로 생성해 낸 블랙홀을 이용하여 내부의 물질을 강제적으로 타 차원으로 날려 버리는 문이다.
카메라로 감시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토록 시기적절하게 디멘션게이트가 열릴 수 있을 리가 없다.
‘퍼스트 오더! 그것이 디멘션게이트를 발동시키는 열쇠였단 말인가?’
아무리 상위 개체라고는 하나, 자신을 잡기 위해 레이센을 보낸 이유가 그제야 납득이 갔다.
연구소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있던 연구소장 오르펠은 레이센이 실패할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수도를 세워 문을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전신이 입자로 분해되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Chapter 01 시온(1)
라도네스 왕국.
툴리언 제국 산하, 세 개의 왕국 중 하나로 가장 넓은 영지와 비옥한 농토를 자랑했다.
그에 걸맞은 인구 또한 보유하고 있어, 국력에서도 가장 앞서왔다.
수많은 제후들이 영지를 나누어 다스리고 있으나, 그 균형이 알맞게 유지되고 있어 왕권이 가장 강력한 국가이기도 했다.
그 라도네스 왕국의 남작령인 메이켄 관로를 한 대의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모서리에 금테를 두르고 백마 네 마리가 이끄는 호화스런 마차였다.
마차의 지붕 위에 메이켄 남작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주의 인척이 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워, 워!”
막 성이 보이는 곳으로 진입한 마차가 느닷없이 섰다.
그 뒤로 호위를 하던 기사들이 재빠르게 마차를 에워싸고 각자의 무장을 움켜잡았다.
“무슨 일이죠?”
휘장을 젖힌 마차 안에서 가느다란 미성이 흘러나왔다. 시녀인 미샤였다.
“누군가가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위험한 자일지 모르니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기사 하나가 그렇게 말한 뒤 말 궁둥이를 걷어차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이 속삭였다.
“미샤, 문을 열어 줘. 나도 나가서 보고 싶어.”
“안 돼요, 아가씨. 위험할지도 모른다고요.”
“기사들이 있는데 뭐가 위험하겠어? 계속 마차 안에만 있으니 답답하단 말이야. 바람 좀 쐬고 싶어.”
“끄응. 그러시면 잠깐만이에요?”
마차 문이 살짝 열리고 미샤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 함부로 문을 열지 말라고 했잖아!”
그 모습을 본 기사가 호통을 쳤다.
미샤가 흠칫거리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답답해하십니다. 마침이기도 하니, 잠시 바람을 좀 쐴 수 있을까요?”
“맞아요, 카론 경. 사흘 내내 마차에만 있으려니 엉덩이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미샤의 말을 거들고 나선 것은 남작 영애인 미리엔 엘리자베스 메이켄이었다. 마차 안에는 미리엔과 그 시녀인 미샤,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기사단장 카론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가씨께서 정 그러시다면 잠시만 쉬다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에 수상한 자가 있으니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는 마차 안에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럼 기다릴게요.”
미리엔이 새침하게 대답하더니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카론은 전면을 주시했다.
기실 사람 하나둘쯤 길에 서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길을 가로막고 선 자는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주변에 널려 있는 몬스터들의 시신이 그랬다.
“이봐, 넌 뭐야?”
말을 타고 접근한 기사가 물음을 던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발끈한 기사가 창대로 사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 몬스터들은 네가 이렇게 한 건가?”
“…….”
“묻는 말이 안 들리나?”
“넌… 뭐냐……?”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사내가 비로소 돌아서서 기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기사는 흠칫 놀랐다.
‘눈동자가 금색이잖아?’
갈색, 검은색, 푸른색, 녹색까지 다양한 안색을 봐왔지만 금색은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더구나 사내는 눈동자 색에는 어울리지 않는 칠흑 같은 흑발에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옷을 입고 있었다. 보아하니 무기도 지니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수로 몬스터들을 쓰러뜨린 것인지 영 수상했다.
“너. 잠깐 따라와.”
“따라…와?”
사내가 앵무새처럼 기사의 말을 반복했다.
“그래. 미안하지만 조사를 좀 해야겠다.”
“조사?”
“그렇다니까.”
“따라와?”
“미친놈인가?”
기사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툭툭 던지는 반말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까딱까딱.
손짓을 하자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 중 일부가 달려왔다.
조사를 한답시고 정체도 불분명한 자를 귀족 마차 근처로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주먹을 통한 친근한(?) 대화를 나누며 정체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꼬르르르륵!
흑발 사내의 배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기사가 타고 있던 말이 흠칫할 정도였다.
기사 하나가 사내의 배를 가리켰다.
“그거 거기서 난 소리냐?”
“…….”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바닥에 쓰러져 있던 홉고블린의 팔을 잡더니,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 자식, 뭐하는 거냐!”
경악한 기사들이 소리쳤지만 사내는 요지부동했다.
역겨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 속에서 고블린의 팔이 뼈만 남을 때까지 씹어 먹은 사내가 그제야 흡족한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