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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2화)
Chapter 01 시온(2)
기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 같다. 대장님께 보고하고 처분을 맡겨야겠어.”
“그래.”
기사들이 황급히 마차로 돌아갔다.
“뭐? 고블린을 씹어 먹어?”
거리 때문에 자세히 보지 못한 카론이 기가 찬 얼굴을 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도 어눌하게 단편적으로 툭툭 내뱉는데,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기사들의 물음에 카론이 핀잔했다.
“뭘 어떻게 해? 아가씨께 해가 되지 않는 놈이라면 건드릴 이유가 없지. 놈과 몬스터의 시체를 치우고 길을 비워 놔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길을 치우기 위해 달려가고 나서 카론이 마차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나와도 좋다는 신호에 마차 문이 열리며 미샤와 미리엔이 걸어 나왔다.
“아아! 시원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불어온 돌개바람이 미리엔의 드레스와 머리칼을 부드럽게 흔들고 지나갔다.
탄성이 나올 정도로 맑은 날씨에 좌우로 펼쳐진 드넓은 농지.
며칠을 마차 안에만 갇혀 있어야 했던 그녀에겐 너무도 그립고 기쁜 풍경이었다.
“카론 경, 저 앞에 누가 있다고요?”
“별것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미샤와 기사 분들 외엔 며칠 만에 보는 사람이에요. 얼굴을 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예, 안 됩니다.”
즉답이었다.
애교 미소 띤 미리엔의 웃는 얼굴이 굳었다.
“정말 안 돼요?”
“출신 성분도 모르는 놈입니다. 함부로 아가씨께 접근시킬 수는 없습니다.”
“피이.”
미리엔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시장 구경을 나가서 어린아이를 안아보려 할 때도 ‘출신 성분’을 운운하며 못하게 막았던 카론이었다.
뭘 하려고 할 때마다 사사건건 방해하는 그의 간섭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삐친 미리엔을 바라보던 카론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얼굴만 잠깐 보시는 겁니다.”
결국 백기를 든 카론이 눈짓을 하자, 기사들이 흑발 사내의 양팔을 잡고 질질 끌고 왔다.
굳이 사내가 반항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거칠게 다루는 것은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와. 잘생겼다.’
가까이서 본 사내는 생각 외로 상당히 미남이었다.
칠흑 같은 흑발에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가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광이 나는 특이한 옷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하나, 무엇보다 시선이 가는 곳은 바로 금색으로 빛나는 눈이었다.
결코 탁하지 않은 반짝이는 눈동자는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쉬이 시선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름이 뭐냐?”
카론이 물었다.
“……이름?”
사내가 되뇌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날아드는 한마디 한마디가 생소한 것처럼 눈을 빛냈는데, 그를 바라보던 미리엔은 그의 목덜미 안쪽에서 묘한 소리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직. 지이잉―
그것이 음성 조합기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미리엔은 신기하면서도 조금 무서웠다.
“시온.”
사내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시온? 그것이 이름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
이후로도 카론은 몇 가지를 더 질문했지만 사내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질의는 약 십여 분가량 지속되었지만 얻어낸 대답이라곤 사내의 이름이라고 추정되는 ‘시온’이라는 단어 하나뿐이었다.
카론이 미리엔을 바라봤다.
“이제 만족하셨겠지요?”
“좀 모자라는 사람인 것 같은데, 여기에 두고 가면 집을 못 찾아갈 거예요.”
“그건 저자의 사정입니다. 일일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카론 경. 기사답지 않은 말을 하는군요. 여기가 어딘지 잊었나요? 바로 메이켄 남작령이에요.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전부 우리 영지의 소중한 백성이라고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카론은 곧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깨끗하게 인정하니 보기 좋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말에 태워 성안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치안소에 맡기면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갈 것입니다.”
“그거예요. 그게 바로 기사다운 일이라고요.”
삼십대 중반인 카론을 상대로 십대 후반인 미리엔이 거침없이 훈계를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옳고 그름은 분명하게 따지고 인정할 것은 반드시 인정하는 카론의 성격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카론이 사내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말 등에 올렸다.
사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곧 그들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얌전히 카론의 망토를 붙잡았다.
그를 태운 마차의 행렬이 성을 향해 빠르게 이동해 갔다.
“통과!”
그리운 미리엔의 집. 메이켄 남작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성문을 마차가 통과했다.
열흘에 걸친 여행 끝에 집에 돌아갈 날만을 손꼽으며 기다리던 미리엔이었지만, 마차는 곧장 남작가를 향해 가지 않았다.
마차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성내 치안소였다.
“이상합니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길에서 주운 사내를 데리고 치안소에 들어갔다 나온 기사가 보고했다.
“말도 잘 모르는 것 같고 체구나 골격도 라도네스인과는 차이가 있는 게, 아무래도 외국인인 것 같다고 치안관이 그러더군요.”
“뭐야? 외국인이 무슨 수로 메이켄 영지까지 들어와서 정신이 나간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카론의 단언에 기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입니다. 정신이 나간 것 같지는 않답니다. 하는 행동도 그렇고,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도 그렇고. 말만 모를 뿐이지 지능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더군요. 그래서 외국인 같다는 겁니다.”
“흐음.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군.”
카론이 턱에 손을 대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저분의 집을 찾아줄 방법은 전혀 없다는 건가요?”
잠자코 듣고 있던 미리엔이 끼어들었다.
기사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성으로 데리고 가요. 말을 가르쳐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죠.”
“미리엔 아가씨,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신원도 확실치 않은 자를 성내에 들이다니요. 요즘이야 나라가 평안하니 그렇다 쳐도, 옛날엔 이런 식으로 적국의 하인이 된 다음 귀족을 암살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도 없잖아요? 데리고 왔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치안소에서 직업소개소로 중계를 해서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줄 겁니다. 여기까지 했으면 충분히 하신 겁니다.”
“말도 안 돼요. 그건 버리고 가는 것과 하등 진배없어요. 나는 용납 못해요.”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아가씨. 저는 그렇다 쳐도 영주님은 어떻게 설득하실 겁니까?”
“어떻게든 설득할게요. 아버님은 나한테 약하니 부탁하면 반드시 들어주실 거예요.”
카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엔은 곱게만 자라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모르고 고집이 셌다.
그래도 성정은 올곧고 착한지라 지금까지는 귀엽게 봐 왔지만 이따금씩 이럴 때면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영주님께 따끔하게 한마디 하시라고 말씀드려야겠어.’
미리엔이 천방지축일 수 있는 이유는 팔불출 아버지인 메이켄 남작이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운 이유가 컸다.
그런 것치곤 다른 영지의 자제들에 비해 모범적으로 큰 편이지만, 그래도 야단을 칠 건 쳐야 했다.
카론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아가씨께서 영주님을 설득하지 못하시면 이 사내는 치안소로 되돌려 보내는 겁니다.”
“응! 알았어요. 나한테 맡겨요.”
미리엔이 몸을 꼬며 좋아했다.
아무래도 저 흑발 머리 사내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말을 가르쳐서 내 하인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남작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미리엔이 말했다.
기뻐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샤가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요. 조심하시는 게 좋아요.”
“이상하긴 뭐가?”
“눈빛이 흉악해요, 눈빛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피를 갈구할 것 같은 눈빛이에요.”
“또 시작이다. 생사람 잡기. 미샤 넌 항상 그래.”
“제가 뭘요?”
“기억 안 나? 작년에 드루언 자작가의 아드님을 보고 여자 없이는 못 사는 호색한이니, 정력왕이니 하면서 악담을 퍼부었잖아. 그런데 실상은 소문난 공처가였고.”
“그, 그건 어쩌다 한 번 실수한 거예요!”
“그 한 번뿐만이 아닌데. 재작년에는 황궁 무도회에서 본 록키 후작님네 가신더러 좀생이처럼 생겼다느니 막 퍼부었잖아.”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잖아요?”
“사람을 인상으로 평가하려 들면 안 된다는 거야.”
“우우우.”
미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볼이 부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수상하단 말이에요. 제 동물적인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하지만 잘생겼지?”
“……네.”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인정할 건 하는 미샤였다.
기사들과 지내면서 물들었는지 그녀의 성정도 올곧은 면이 있었다.
미리엔이 생긋 웃었다.
“잘생겼으면 된 거야. 위험한 자라고 해도 기사들이 지켜줄 거고.”
“그건 그래요.”
“그치!”
두 소녀가 그렇게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마차가 저택의 대문을 통과했다.
“미리엔 아가씨께서 돌아오셨다!”
기사와 하인들이 외치는 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리자 미리엔의 얼굴 표정이 환해졌다.
“다 왔다!”
미리엔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앗, 아가씨!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면 위험해욧!”
미샤의 절규가 그 뒤를 따랐다.
신이 나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미리엔은 문득 시온이라는 사내 생각이 나 뒤를 돌아보았다.
“…….”
시온은 상당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에 진입했을 때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하였지만, 마차 안에만 있던 미리엔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미리엔이 속으로 뿌듯해했다.
‘훗, 너무 크고 으리으리해서 놀란 모양이지?’
그때 카론이 말했다.
“저자는 일단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영주님을 만나 뵙고 오십시오.”
“알았어요.”
영주의 허락을 구하지 못하면 치안소로 되돌려 보낸다는 약속이었던 것을 상기한 미리엔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님, 미리엔이 돌아왔습니다.”
“어서 오너라. 내 딸아.”
메이켄 남작은 한눈에 봐서는 어린 미리엔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백발이 희끗희끗한 노중년이었다.
일찍이 부인과 사별하고 늘그막에 예쁜 후처를 얻어 노익장을 과시한 끝에 나온 결과가 바로 미리엔이었던 것이다.
그 위로 오빠가 둘 있기는 하나 딸은 오로지 미리엔 하나였다. 그것도 오십 줄이 넘은 나이에 본 늦둥이니 귀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리엔이 두 팔을 벌린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메이켄 남작이 미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행이 힘들지는 않았니?”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에는 지루했지만요. 그리고요, 그리고요…….”
미리엔이 수다스럽게 여행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메이켄 남작은 검토하던 서류를 잠시 밀어놓고 딸의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누가 딸 사랑 팔불출 아버지 아니랄까 봐 매 순간 미리엔을 우선시하는 메이켄 남작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미리엔은 영악하게도 이야기 중간에 자신의 부탁을 섞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래서요. 미리엔은 그 시온이라는 사내한테 말을 가르쳐서 시종으로 삼고 싶어요. 너무 딱하잖아요. 허락해 주실 거죠, 아버님?”
“흐음. 글쎄다. 새나 토끼라면 모를까. 사람은 좀 그렇지 않니? 아무래도 생각을 해 봐야겠구나.”
메이켄 남작이 선뜻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미리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안 되는 건가요?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지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리엔은 노골적으로 풀 죽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은 놀랄 만큼 호소력이 있었다.
빤히 연기인 줄 알면서도 메이켄 남작은 뜻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좋다. 허락을 하마. 대신 조건이 있다.”
“그게 뭐죠?”
“그의 교육은 수석기사인 카론 경에게 맡기도록 하는 거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
“물론이에요. 기뻐요!”
미리엔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메이켄 남작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는 딸을 쓰다듬으며 메이켄 남작이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