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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3화)
Chapter 02 메이켄의 이방인(1)
메이켄 남작가는 기사 오십 명, 사병 육백 명 정도를 거느린 중견 귀족 가문으로 라도네스 왕국의 건국 년부터 승계되어 내려져 온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 메이켄이 자랑할 수 있는 건 그 역사뿐만이 아니라 강하고 용맹스런 기사도 있었다.
혈족에게만 계승되는 독문검법과 가신에게 전수하는 비전검법이 따로 있었는데, 이 두 가지 검술은 명문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초일류였다.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메이켄에서 유명한 기사들을 많이 배출해 냈고, 그 위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기사 가문으로서 거의 독보적인 입지를 다지고 있는 메이켄이었기에 그 자부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 메이켄 가문이 자랑하는 참군(斬軍) 기사단 단장 카론은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내를 기사로 만들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사 신경이 괜찮고 근육도 고루 발달해 있군. 게다가 맨손으로 몬스터를 쓰러뜨릴 정도의 체술도 갖추고 있고. 잘 키우면 쓸 만한 인재가 되겠어.”
비록 출신이 불분명하고 말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다른 영지와는 달리 메이켄 남작은 기사를 선발할 때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람을 골랐다.
그가 평민이라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메이켄 남작이 가신의 출신 성분을 신경 썼다면 농노 출신이었던 카론이 기사단 단장까지 출세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시온, 잘 들어라. 네가 어디서 온 누구이건 간에 영주님께서 내게 널 가르치라 말씀하신 이상 나는 널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그 실력에 맞는 대가를 주겠다. 하지만 네가 미리엔 아가씨나 영주님께 불손한 마음을 먹는 일이 있다면, 그땐 가차 없이 베어 버릴 것이다. 알겠나?”
“……?”
시온은 카론의 장황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제야 그가 언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한 카론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쓸 만한 일인분이 되려면 일단 말부터 가르쳐야겠군.”
카론은 시온을 서재로 보내고 집사 메이슨을 불렀다.
메이슨은 이십대 중반의 외알 안경을 낀 곱슬머리 사내로 늘 감고 있는 것 같은 작은 눈이 특징이었다.
메이슨이 깍듯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카론 님.”
“바쁠 텐데 미안하오. 부탁이 좀 있어서 보자고 했소.”
“부탁이라, 별일이군요. 무슨 일입니까?”
“아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성에 이방인이 하나 와 있다오. 급히 말을 가르쳐야 할 터인데,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물색을 좀 해 주시오.”
“그런 거라면 헨리 여사에게 맡기면 될 겁니다.”
“헨리 여사?”
“아가씨가 어릴 때도 말을 가르쳤지요.”
“오오. 마침 적임자가 있었군. 이방인은 지금 서재에 있으니 가능한 빨리 의사소통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좀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메이슨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날 오후부터 시온은 헨리 여사, 헨리에타라는 중년 부인에게 글과 언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동안 간혹 한두 단어 정도는 말을 할 줄 알았지만, 헨리 여사가 정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자 시온의 언어 습득 속도는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특별히 헨리 여사가 교육에 엄청난 재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시온의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좋은 것뿐이었다.
열흘 뒤.
시온이 공부방으로 삼은 서재를 찾은 카론은 헨리 여사에게 물었다.
“어떻소. 이젠 좀 소통이 되오?”
“정말 놀라워요. 그는 천재예요.”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자기 이름도 못 쓰던 백지 상태에서 단 열흘 만에 툴리언 제국사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그는 글을 통해서 언어를 깨우쳤어요.”
“벌써 글을 깨우쳤단 말이오?”
“그래요. 어눌하긴 하지만 대화도 가능해요.”
“믿을 수가 없군. 설마 농담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카론 님께 왜 농담을 걸겠어요?”
헨리 여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카론이 직접 시온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는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변화였다. 마치 이미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천재를 만났다 싶어 내심 기뻐한 카론이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봐라. 뭐라고?”
“나는 차원을 넘어왔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카론, 넌 이런 슈트를 본 적이 있나?”
“슈트가 뭐지?”
“옷 말이다. 내가 입고 있는 옷.”
시온이 자신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분명 그의 옷은 이 나라에는 없는 특이한 소재의 옷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알고 있는 카론에겐 그다지 생경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 그런 옷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옷만 가지고 다른 차원이니 하는 말을 믿으라고 하다니.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다른 차원에서 왔다.”
“좋아.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고 치자. 어쩌다가 이런 데로 넘어오게 된 건가?”
“내가 살던 차원은 여기와 달리 과학이라는 문명이 극도로 발달해 있다. 나는 제립 연구소에서 육체 개조를 받은 강화인간이다. 주로 암살과 첩보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연구소에서 행해지는 비인간적인 실험을 알게 되어 그곳을 파괴했다. 하지만 그 직후, 연구소장의 함정에 걸려 디멘션게이트에 빠졌고 이 차원으로 추방당했다.”
“시온, 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라.”
“…….”
시온은 불만스런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카론은 한숨을 쉬며 서재를 나와 헨리 여사를 불렀다.
“저놈한테 존댓말이나 좀 가르치시오.”
카론은 시온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선뜻 믿는 쪽이 바보일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가 하여 화도 났지만, 시온은 진지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진심인 것이다.
“제대로 미친놈이었군.”
천재 중에는 괴짜가 많다더니 저놈이 딱 그 짝이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카론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시온이 글과 언어를 깨우쳤다는 사실은 급속도로 저택 안에 퍼졌다. 그러자 제일 먼저 시온을 만나겠다고 나선 사람은 바로 미리엔이었다.
떼를 써서 그를 저택으로 데리고 온 것도 그녀였으니 시온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아직 시온이 정확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된 상황이기 때문에, 카론과 기사들 몇이 엄중하게 보호하는 가운데 미리엔이 서재에 앉았다.
“안녕, 난 미리엔이에요.”
“시온이다.”
시온은 말을 배우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지만 존댓말을 배우는 속도는 극악할 정도로 느렸다.
여전히 말이 짧은 그를 보고 카론이 인상을 구겼지만 시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리엔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 생활은 좀 어때요? 지낼 만한가요?”
“나쁘지는 않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헨리 유모나 메이슨에게 말하도록 해요. 웬만한 것은 다 준비해 줄 거예요.”
“고맙다.”
시온의 시선을 받은 미리엔이 얼굴을 붉혔다.
단순히 그가 미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리엔은 시온이 풍겨내는 다소 차갑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무척 멋있게 보였다.
“아니에요.”
“나를 여기에 데리고 와준 것도 너라고 들었다. 감사한다.”
“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네?”
“프로페서(Professor)…… 헨리 부인에게 들었는데 너무 길어서 잊어 버렸다.”
“…….”
미리엔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졌다.
“미리엔 엘리자베스 메이켄. 저택에서는 다들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날 미리엔이라고 불러요.”
“그렇군. 미리엔. 좋은 이름이다.”
“이봐. 넌 아가씨라고 불러야지!”
기사 하나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시온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내가 왜?”
“넌 이 저택의 하인이다. 손님이 아니라 하인이란 말이지.”
카론의 부연 설명에 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하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우린 아무런 대가 없이 널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사람이 아니다. 일하지 않을 거면 여기에 있을 수 없어.”
“카론 경, 그만해요.”
미리엔이 만류했지만 카론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말리지 마십시오. 이참에 분명하게 해둬야겠습니다. 시온, 너처럼 똑똑한 놈이 아직도 존댓말을 모른다는 것도 말이 안 돼. 여기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말투부터 바꿔라. 윗사람에겐 존칭을 쓰는 거다. 알겠나?”
“나는 아직 여길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말투를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반말을 했다.”
“여긴 네가 살던 세계가 아니다. 떠나든지, 고치든지 선택해라.”
카론이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다.
시온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카론, 너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에겐 반말을 하는 것 같더군. 반말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 같은 것이 있나?”
“직급이 높으면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할 수 있어요.”
미리엔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질문을 하면서 시온이 자신을 쳐다보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렇군. 그럼 직급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메이켄은 기사의 가문이다. 전장과 마찬가지로 힘의 논리가 우선하지. 존칭을 생략하고 싶거든 나와 싸워서 이기면 된다.”
카론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는 아무리 말해도 말투를 고치지 않는 시온에게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설령 시온이 거절을 하더라도 자신이 데리고 나가서 두들겨 패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런 생각조차도 허무해질 정도로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워서 이기면 되는 건가? 쉽군.”
“뭐라고?”
그 말에는 카론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기사들까지 발끈했다.
카론은 메이켄 영지 최고의 기사였다.
메이켄 영지에서 최고라는 것은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기사라는 의미였다.
그런 카론을 쉬운 상대로 치부해 버리는 시온의 담력은 인정할 만했지만, 내뱉은 말을 책임질 정도의 실력이 없다면 그것은 멍청한 오만에 불과했다.
“좋다. 따라 나와라.”
씩씩거리며 카론이 시온을 데리고 연무장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