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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



시온 1권(4화)
Chapter 02 메이켄의 이방인(2)


카론이 대련을 한다는 소식은 그들의 발보다 빠르게 저택 안을 휩쓸었다. 시온과 카론이 가검을 들고 마주섰을 땐 이미 구경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는 메이켄 남작도 있었다.
“허허. 미리엔이 데려온 이방인과 카론 경이 대련을 한다고?”
“그렇습니다, 영주님.”
메이켄 남작의 곁에는 집사 메이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 자 두 개를 눕혀놓은 것 같은 가느다란 눈을 가진 그는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맨손으로 몬스터를 해치웠다고 합니다. 분명 범상치 않은 체술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호오. 몬스터를 잡았다고?”
“예. 홉고블린과 코볼트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는 조금만 수련을 쌓은 기사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 아닌가?”
“하지만 맨손으로는 힘듭니다.”
“그런가? 기대되는군.”
메이켄 남작과 집사 메이슨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론은 몸을 다 풀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록 가검이지만 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힘껏 후려치면 벽돌도 깨뜨릴 수 있었다. 카론이 진심으로 상대하면 시온이 아무리 강골이라고 해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카론 경, 너무 심하게 하지 말아요.”
미리엔은 못내 걱정스러운 듯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버릇을 고치는 선에서 끝낼 겁니다.”
카론은 자신만만했다.
반면에 시온은 검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카론의 말이 신호가 되었다.
가까이서 구경하려고 근처까지 몰려와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원을 그리며 물러섰다.
카론이 검을 움켜쥐었다.
그때, 시온이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뭐하는 거냐?”
“검은 필요 없다. 맨손으로 족하다.”
“나 따위를 상대하는 건 맨손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냐?”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늘 맨손으로 싸워왔고 이쪽이 더 편하다.”
“마음대로 해라. 나중에 후회하건 말건 그건 내 알 바 아니짓―!”
마지막 말을 기합으로 바꾸며 카론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놀랄 만한 풍압이 시온의 머리칼을 뒤흔들고, 뒤이어 검면이 몸에 작렬했다.
퍼어억!
미리엔에겐 적당히 하겠다고 했지만 카론은 사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죽이진 않겠지만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부러뜨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으로 휘두른 검이었다.
“…묵직하군.”
카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선으로 내리친 검이 시온의 어깨를 쳤는데, 마치 쇳덩어리를 때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것 같은 시온의 음성이었다.
시온은 늘 입던 슈트를 벗어 버리고 시종이 가져온 천 옷 한 장만을 걸친 상태였다. 방어구의 덕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슥― 파파박!
검을 회수한 카론이 재차 공격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목을 노렸다.
하지만 어깨를 때린 것과 마찬가지 반응이 돌아왔다.
조금의 충격도 입히지 못한 듯했다.
“이럴 수가. 대체 어떻게?”
“말했을 터다. 나는 강화인간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것도 할 수 있지.”
시온이 순간적으로 발을 움직여 카론의 뒤로 돌아갔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구경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지 못했다.
퍽!
시온의 수도가 카론의 뒷목에 꽂혔다.
카론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온몸의 맥이 탁 풀려 버렸을 것이다.
“…….”
기사들은 물론, 메이켄 남작과 집사 메이슨까지도 멍해졌다.
“메이슨, 지금 봤나? 저게 대체 뭐지?”
“글쎄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누구보다도 시온의 안위를 걱정하던 미리엔 역시 멍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카론 경이 단 일격에 고꾸라지다니.’
아기 때부터 카론의 신위를 당연한 듯 보아 오던 그녀에게 카론이 스러져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그런 그를 오연히 내려다보는 시온.
“이제 반말해도 되나?”
“아직…… 이다.”
뿌득, 카론이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시온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정하지. 너를 무시하고 방심했었다. 정중히 사과하겠다.”
“상관없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지금부터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바라던 바다.”
시온이 두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격투 자세를 잡았다.
“태권도라는 무술이다. 주로 발을 쓰는 체술이지. 이걸로 상대를 해 주겠다.”
“…….”
카론은 대답을 하지 않고 시온을 노려보았다.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한 이상 대화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화아아악!
시온은 일변된 그의 기세를 느끼고 경직됐다.
지금까지가 잔잔한 호수였다면 변화된 카론은 마치 거센 풍랑 속의 바다와 같았다. 태산 같은 기세가 시온을 짓눌러 터뜨리려는 것처럼 무겁게 압박해 왔다.
‘뭐지?’
시온은 처음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신체가 위험을 감지하고 빠른 고동으로 신호를 알렸다.
스팟!
시온은 카론의 팔이 약간 떨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파각!
시온의 안면을 가격한 가검이 어느새 카론의 손에 돌아갔다. 처음 두 번의 공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공격이었다.
주르륵.
인중을 타고 흘러내리는 찝찔한 액체.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으며 시온이 웃었다.
“재미있군. 어떻게 한 거지?”
“모르고 당하는 건 억울할 테니 가르쳐 주지. 이건 오러라는 것이다. 방금 봤다시피 오러를 끌어 올리면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고 강한 힘을 낼 수 있지.”
“왠지 그것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 검에 주입하면 오러 블레이드라는 것을 뽑아낼 수 있지. 오러 블레이드는 오직 오러 블레이드로만 맞상대할 수 있다. 보통 검으로 막았다간 검이 잘려 나가고 말지.”
“그럼 그걸 사용해라. 오러 블레이드를 쓰지 않고 전력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나?”
“물론 아니지만, 나는 널 죽일 생각이 없다. 내가 오러 블레이드를 쓰면 너는 반드시 죽을 거다.”
“됐으니까 써라. 상대방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하는 것 아닌가? 그럼 내가 너한테 해야지, 네가 나에게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
카론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방금 시온의 그 말로 하여금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나?”
“물론이다.”
“…좋아. 그렇다면 오러 블레이드를 쓰도록 하지.”
“카론 경, 안 돼요!”
미리엔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웬만하면 그녀가 하는 말은 들어주던 카론이었지만, 이건 이미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다.
카론은 검에 마나를 집중하여 오러 블레이드를 발출했다.
우우웅!
카론의 가검이 거칠게 진동하더니, 눈부신 섬광이 검을 타고 쭉 뻗어 올랐다.
시온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에텔 소드?”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카론이 유일했다.
“에텔 소드? 그게 뭐지?”
“이거다.”
시온이 카론을 향해 두 팔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힘을 집중하자 두 팔에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서리기 시작했는데, 눈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명확한 형체를 갖추었다.
카론이 경악했다.
“오, 오러 피스트!”
두 팔을 완전히 뒤덮은 흰 섬광.
그것은 카론의 경지인 소드 익스퍼트에 필적하는 피스트 익스퍼트의 증거였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군.”
지금까지는 시온이 자기류 체술을 조금 할 줄 안다고 생각하여 방심했던 카론이지만, 상대가 피스트 익스퍼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은 채로 피스트 익스퍼트와 맞대결을 했다면 수도로 한두 대쯤 얻어맞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너희는 에텔을 오러라고 부르나 보군. 그걸로 신체 능력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시온은 에텔(오러)를 거두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론도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나 질풍나이트 카론. 검에 대고 명예롭게 싸울 것을 맹세한다!”
“뭐하는 거지?”
“기사로서의 예의다.”
시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시온. 적당히 봐주면서 싸우겠다.”
씩. 카론이 입으로 호선을 그렸다.
“간다!”
시온의 눈앞에서 카론의 신형이 자취를 감추었다.
후우웅!
공기를 갈라오는 감각.
시온은 곧바로 눕다시피 하며 몸을 젖혔고, 그 바로 위를 카론의 오러 블레이드가 휩쓸고 지나갔다.
시온의 대처가 조금만 늦었어도 영문도 모른 채 두 동강이 날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스― 팟!
재빨리 검을 회수한 카론이 내려 베기로 시온의 몸을 쪼개 버렸다.
미리엔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시온!”
그러나 놀람도 잠시, 시온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카론이 벤 것은 잔상이었던 것이다.
파파팡!
카론의 뒤에서 나타난 시온이 화려한 뒤돌려차기로 카론의 옆구리를 두들겼다.
비록 갑옷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카론은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어림없다!”
카론은 그대로 회전하면서 원심력을 이용한 오러 블레이드 쇼크를 날렸다.
오러 블레이드로 공기를 진동시켜 충격파를 쏘아내는 오러 블레이드 쇼크는 피하거나 똑같은 오러 블레이드 쇼크로 상쇄하지 않는 한 적중하는 상대의 내부를 진탕시키는 치명적인 기술이었다.
시온이 굳이 피하지 않고 부딪쳐 가자 카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후파악!
그러나 다음 순간 카론은 다시 한 번 경악해야만 했다.
시온의 돌려차기가 공기의 파동을 걷어찬 순간, 오러 블레이드 쇼크가 그대로 부서져 버린 것이다.
정말 엄청난 강도였다.
오러 블레이드 쇼크를 견뎌낼 정도의 신체라면 말 그대로 전신이 무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온, 너는 피스트 익스퍼트가 아니군.”
“말했을 터다. 나는 강화인간이라고.”
“네 말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이길 수 없다. 그 사실만은 분명히 알겠다.”
카론이 검을 내리며 하는 말에 좌중 모두가 경악했다.
메이켄 영지에서 가장 강한 카론이 출신도 불분명한 이방인에게 패배하다니.
소드 마스터를 목전에 두었다 알려진 극강의 기사였던 그가!
시온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반말해도 되나?”
“그래.”
그제야 시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괜찮은 싸움이었다. 카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카론도 웃으며 말했다.
패배한 것은 쓰라리지만 강한 상대와 싸울 수 있는 것은 검에 목숨을 건 무인으로서 행복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