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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5화)
Chapter 02 메이켄의 이방인(3)


카론은 그대로 메이켄 남작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일어나게, 카론 경.”
카론은 곧 몸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였다.
“자네가 그렇게 쉽게 항복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군. 그렇게도 차이가 많이 나나?”
“저와는 격이 다릅니다.”
“정확히 어떤 면에서 그렇지?”
“저는 오러 블레이드 쇼크를 상쇄해 낼 수 없습니다.”
카론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쇼크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선공을 취한 상대보다도 월등히 높은 경지에 있어야만 한다. 기술의 이름이 같다고 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힘의 배분이나 숙련도까지 모두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타이밍과 힘 조절이 중요한데,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둘 중 한 명은 중상을 면할 수 없는 위험한 기술이었다.
그것을 오러 피스트 쇼크도 아니고 다리에 오러를 씌워서 해냈다는 것은 오러와 몸이 거의 일체화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럼 저 이방인이 피스트 마스터라도 된다는 건가?”
“피스트 마스터와는 다릅니다. 다르지만 강합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시온은 피스트 익스퍼트를 능가했다는 겁니다.”
“어렵군.”
메이켄 남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패장을 앞에 두고 어떻게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도 생각이 나질 않는 그였다. 그 곁에 서 있던 메이슨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외알 안경을 치켜올릴 뿐이었다.
“배가 고프군.”
시온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리엔이 황급히 그를 이끌었다.
“어서 식당으로 가요. 내가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 줄게요.”
미리엔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는 시온의 뒷모습을 세 남자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딸아. 넌 도대체 뭘 주워 온 거니.”



Chapter 03 미리엔의 혼담(1)


메이켄 남작의 금지옥엽인 미리엔은 요즘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흑발에 금색 눈이 잘 어울리는 신비한 이방인으로, 시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반면 그런 시온 때문에 연일 심통이 난 사람도 있었다. 주근깨가 콧잔등을 귀엽게 덮고 있는 빨간 머리 소녀로, 미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가씨, 그자를 가까이 하지 마시라니까요. 그자의 혀가 왜 붉은색인지 아세요? 피가 묻어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미샤. 사람이라면 누구나 혀는 붉어.”
“아무튼 그자는 위험한 냄새가 풀풀 난다고요! 카론 님도 당해내지 못했어요. 그런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아가씨처럼 연약한 분은 아무런 힘도 못 쓰고 당할 게 틀림없다고요!”
“시온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내가 특별히 조심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은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에요. 참군 기사단이 모두 나서면 그깟 싸움꾼 하나가 대수겠어요?”
참군 기사단 전체의 무력이라면 피스트 마스터라고 해도 5분이면 제압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미리엔은 왠지 시온이라면 그들 모두가 덤벼들어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쿠키나 구워. 오늘 시온한테 쿠키를 주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아가씨! 제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하신 거예요?”
“네― 네. 들었다니까.”
뿌―! 하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던 미샤는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사실 미샤도 딱히 그 시온이라는 사내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전에는 자신에게 쏟던 미리엔의 관심이 시온에게 옮겨가는 것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자신이 추해지는 것 같아서 따로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것은 질투라는 이름의 괴롭힘이었다.
크고 작은 두 소녀가 그렇게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였다. 주방의 문이 살짝 열리더니, 메이슨이 들어왔다.
“미리엔 아가씨. 잠깐 괜찮으십니까?”
“메이슨? 무슨 일이에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메이슨이 습관처럼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표정과 분위기를 볼 때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챈 미리엔이 말했다.
“미샤, 넌 잠깐 나가 있어.”
“네, 아가씨.”
미샤가 메이슨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주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미리엔이 밀가루 묻은 손을 털어내고 메이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메이슨.”
“헬리언 백작가에서 이런 게 도착했습니다.”
메이슨이 품 안에서 한 장의 봉투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비단 겉봉에 향수를 뿌린 봉투 안에는 최고급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펼쳐 읽어본 미리엔의 안색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혼담이라면 지난번에 분명히 거절했을 텐데요?”
“그들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중앙의 귀족 관리 중 하나인 헬리언 백작가에서 온 혼담 편지였다.
메이켄 남작가가 명문 기사 집안이라고 해도 그 영지는 라도네스 왕국의 변방에 위치해 있다.
반면 헬리언 백작가는 수도 훼리스에 바로 인접한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유력 제후 중 한 명으로, 정재계를 두루 걸친 넓은 인맥과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미리엔을 시집을 보내라고 끊임없이 혼담을 제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어이없는 사람들이군요. 한 번 싫다고 했는데 또 혼담을 청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뒷장도 마저 읽어보십시오.”
메이슨의 말에 미리엔은 그제야 양피지 뒤에 한 장이 더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완전히 협박이로군요.”
첫 번째 장은 지난 차에 거절했던 혼담과 다를 바 없는 미사어구로 정중히 부탁하듯 써놓았지만 뒷장은 달랐다. ‘하지만’으로 시작하여 자신들이 내민 혼담을 거절한 것에 대한 불쾌감을 피력하며, 이번에야말로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겠다는 말로 끝맺음이 되어 있었다.
“아버님께서도 이 편지에 대해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영주님께서 아가씨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시겠다고 하셔서 제가 온 것입니다.”
“저는 싫어요. 헬리언 백작은 서른 살이 넘었잖아요. 게다가 소문도 좋지 않고요. 그런 사람의 세 번째 부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메이슨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혼담은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메이슨이 편지를 도로 받아서 품에 넣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메이슨.”
“왜 그러시죠?”
“혹시 내가 이 혼담을 거절했다고 해서 우리 영지에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메이슨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아가씨.”
“네, 고마워요.”
미리엔도 그제야 조그맣게 미소를 띠었다.
메이슨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연약해 보이는 인상이라 미덥지 못하게 보이는데도, 그가 이따금씩 단언을 할 때면 정말로 믿음직했다.
“그럼.”
메이슨이 나가자 그와 교대하듯 미샤가 들어왔다.
그녀는 그사이 식자재 창고에 다녀왔는지 초코 칩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미샤, 그건 뭐야?”
미리엔의 물음에 미샤가 생긋 웃었다.
“기왕 하는 거 초코 쿠키를 만들어 보려고요. 혹시라도 그 남자 입에서 맛없다는 소리 나오지 못하게 이 미샤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 볼게요!”

시온은 연못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정자 위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달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달이라는 행성과는 전혀 다른 색깔과 모양을 띠고 있었다.
“푸른 달이군.”
헨리 여사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의 달은 계절에 한 번씩 그 색깔을 바꾼다고 했다.
라도네스 왕국에는 봄과 가을, 딱 두 개의 계절만이 있고 지금은 시기상으로 추수가 막 끝난 참이었다. 그렇다면 봄이 오면 달의 색은 붉게 변할 것이다.
달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가 살던 곳의 달은 계절에 관계없이 늘 흰색이었다.
“푸른 달은 신목(信穆)의 달. 평화와 안식의 상징이다. 창조신 에쉬아 님의 의지가 깃들어 있지.”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건 사람은 기사단장인 카론이었다. 그가 꽤 오래전부터 서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시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늘 보던 은빛 갑주가 아닌 평범한 옷차림의 카론이 다가오더니 시온의 옆에 앉았다.
“왜 나와 있지? 잠이 안 오나?”
“그냥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
“털어놔서 편해지는 거라면 내가 들어주지.”
“별로 그런 건 아니다.”
“그래?”
카론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더니 시온처럼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봤다.
검은 캔버스에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은 별들이 저마다 존재를 뽐내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은 시온의 고향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에쉬아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
“뭐?”
“창조신이라는 거 말이다.”
“아아, 그렇지.”
카론이 씩 웃었다.
처음에는 시온의 이런 거침없는 말투가 참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일말의 악의도 없이 순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당연한 듯이 생각되었다.
“그라면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을까?”
“에쉬아 님이라면 가능하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의지로 조종하는 분이니까 말이야.”
“카론, 너는 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 같군.”
“존재하고 계시니까.”
“어디에?”
“에쉬아 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분의 뜻은 남방의 신성교국에서 내려오는 신탁을 통해서 들을 수가 있지.”
“신성교국이라.”
그 또한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오직 에쉬아의 이름 하나로 형성된 종교 국가.
그들이 소유한 템플 기사단은 만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로 개개인이 모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성스러운 신의 사도들이라고 했다.
신성교국을 제외해도 에쉬아의 신도들은 제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당장 메이켄 영지만 하더라도 에쉬아 신전이 존재했다.
환자가 생기면 사람들이 찾는 곳이 바로 신전이었으니 그들에게 있어 신앙과 종교는 이미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살던 곳에도 종교가 있었다. 하지만 너희의 신과는 달리 철저한 방관자였지. 덕분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불행해졌다.”
“불행해져? 왜?”
“신관이라는 자들이 멋대로 불신자를 악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것이지. 그래서 난 종교에 깊은 회의를 갖고 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신성교국은 다르니까 안심해라. 에쉬아 님을 안 믿는 자들에게도 신성의 축복은 공평하게 내려진다.”
“차라리 그게 진짜 신답군.”
시온의 음성은 깊은 자조가 내재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과거를 반추할 자격이 있을까?
지금 시온의 관심사는 오직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아직 그곳에서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완수를 하지 못했다. 오르펠을 살려두고 온 이상 연구는 언제든 다시 재개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