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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6화)
Chapter 03 미리엔의 혼담(2)
돌아가서 그를 없애 버려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낙후된 곳에서 디멘션게이트를 다시 열 수 있을 만한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을 리 없다.
설령 디멘션게이트를 연다 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좌표가 없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차원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어렵군.”
카론이 흘끔 시온을 보았다.
“이봐, 시온.”
“왜 그러지?”
“나는 말이다. 솔직히 나는 네 말을 다 믿는 건 아니다.”
“…….”
“나를 꺾은 무력에 생전 처음 보는 옷. 열흘 만에 글과 언어에 통달할 만한 지능.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나오는 생각과 사상. 나는 널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너 같은 놈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네가 딴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솔직히 나는 두렵다.”
퐁당!
카론이 연못에 돌을 던졌다. 흔들리는 물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더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네가 미리엔 아가씨를 지켜주었으면 한다. 네가 영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메이켄의 기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나는 널 진심으로 환영할 거다. 메이켄 영지와 참군 기사단의 힘을 빌어서라도 널 왕국 최고의 기사로 키워줄 의향도 있다.”
“음.”
“신뢰는 신뢰로, 배신은 응징으로 보답하는 것이 우리 참군 기사단의 원칙이다. 그리고 난 너와 신뢰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카론이 손을 내밀었다.
건틀릿을 끼지 않은 투박하고 굳은살 박힌 사내의 손. 악수를 나누는 순간 그는 시온을 진심으로 신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맙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다.”
“왜지?”
“나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내게 그 손을 잡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반대로 너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겠지. 요는 서로 간의 간극이다. 그 의미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건 아무런 약속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카론은 손을 거두고 타는 듯한 눈동자로 시온을 바라봤다. 시온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달빛 아래서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본 채 그렇게 있었다.
카론이 시선을 거둔 것은 한참만의 일이었다.
“그렇군. 네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겠다. 그렇다면 네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언젠가 다시 내 손을 잡을 때까지 나는 널 신뢰할 순 없을 거다. 그 점은 알아두도록 해라.”
“상관없다. 이 저택의 누구에게도 손을 댈 생각은 없으니까.”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카론이 일어났다.
밤이 깊어 저택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있었다.
“나는 먼저 들어가지.”
“그래. 들어가라.”
카론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푸른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시온은 말을 익힌 뒤로 저택의 이런저런 잡일들을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잠은 고용인들이 머무는 방을 배정 받아서 썼고 음식은 기사들과 함께 먹었다.
메이켄 남작이 특별히 배려를 한 덕분에 다달이 평기사가 받는 만큼의 금화도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하는 일은 정원을 가꾸거나 저택의 내실을 청소하는 일 등이었다. 때때로 음식 재료를 손질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기도 했다.
저택의 하인들은 그 유명한 기사단장 카론을 쓰러뜨린 시온에게 자신들의 일거리를 나누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였지만 시온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밥을 얻어먹고 돈을 받는 이상 일은 해야 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화장실 청소 같은 몸을 더럽혀야 하는 일도 묵묵히 해내는 그를 보고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던 하인들도 점점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편하게 말을 거는 사람도 생겨났다.
시온은 가공할 힘과 빠른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달리 보면 효율이 뛰어난 일꾼이라는 뜻과 같았다. 게다가 웬만한 건 가르쳐 주는 즉시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그를 보며 다른 하인들이 분발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방인이 꽤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군요.”
메이슨은 매우 흥미로운 눈으로 시온을 관찰했다.
보통 피스트 익스퍼트 급의 무력을 지니고 있는 자라면 상대와 자신을 보면서 등급을 매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정 레벨 이하의 일은 절대 안 하려 드는 것이 정상인데, 시온에겐 그런 관념이 없었다. 오히려 그를 본받은 기사들이 연무장 청소를 스스로 하려고 들 정도였다.
함께 멀찍이서 지켜보던 카론이 말했다.
“근성도 있고 책임감도 강해서 상당히 쓸 만하다고 시녀장이 칭찬하더군.”
“단순히 하인으로 부리기에는 아까운 사내죠.”
“기사가 되지 않겠냐고 넌지시 떠봤는데 딱 잘라 거절당했소. 그는 이 영지에 머무를 그릇이 아니오.”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슨이 외알 안경을 만지며 말했다.
안경을 만지는 것은 그가 진지해질 때면 늘상 나오는 버릇이었다.
“떠나겠다고 하면 잡을 수야 없지만, 미리엔 아가씨께서 실망하실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는군요.”
“그야 아가씨께서 이겨내셔야 할 문제 아니겠소? 우린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지.”
집사와 기사단장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정성껏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시온을 향해 다가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시온! 와악!”
뒤에서 확 덮쳐 그의 눈을 가린 것은 바로 미리엔이었다. 시온은 진즉에 그녀의 접근을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그녀가 등 뒤에 매달리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누구∼게?”
“이 탁하고 나이든 목소리는 헨리 여사로군.”
“뭐야?”
“목소리가 앙칼진 걸 보니, 혹시 미샤인가?”
미리엔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며칠 간 가까이 지내면서 마치 오누이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된 두 사람이었다.
미리엔이 화가 난 듯 몸을 떨자 시온이 자신의 눈을 가린 손을 치우며 말했다.
“농담이다. 그보다 일하고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나. 미리엔.”
“요새는 소처럼 일만 하잖아. 나랑은 언제 놀아줄 거야?”
“난 항상 바쁘다. 메이슨이나 카론하고 놀아라.”
“메이슨은 책벌레고 카론은 싸움바보라서 재미없어. 난 시온이랑 놀고 싶어.”
멀리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망연자실해졌다.
“책벌레…….”
“싸움바보…….”
미리엔은 두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털어놓은 것이지만 시온은 알고 있었다. 풀이 죽은 두 사람이 안쓰러웠는지 그는 분무기를 내려놓고 미리엔의 손을 잡았다.
“알았다. 놀아주지. 대신 오후에는 방해하지 마라.”
“응!”
“뭐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전에 하다가 만 이야기를 마저 해줘. 시온의 고향에서 히트 쳤다는 로맨스.”
“견우와 직녀 말인가. 알았다. 따라와라.”
시온이 미리엔을 데리고 정원 쪽으로 사라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메이슨과 카론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는 간만에 운동을 좀 하고 싶군요.”
“나는 서재에 가서 책을 좀 읽어야겠네.”
두 사람도 황급히 자신의 할 일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Chapter 04 헬리언의 망나니 백작(1)
라도네스 왕국의 수도 훼리스.
그중에서도 헬리언 백작가는 고급 저택들이 즐비한 왕궁의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백작 저택의 최상층, 헬리언 백작의 집무실에서는 노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쾅!
“감히 내 청혼을 두 번이나 거절하다니!”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고급 마호가니 책상이 단숨에 박살 났다. 이는 그가 최소한 오러를 다루는 유저라는 의미였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 헬리언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이토록 안하무인이란 말인가! 백작가가 변두리 남작가 따위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헬리언 백작.
그는 삼십대 후반이지만 머리가 벗겨지고 좀 살이 쪄서 실제로는 사십대 중반으로 오해를 받곤 했다. 메이켄 남작가의 금지옥엽 미리엔 엘리자베스 메이켄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을 당한 사내이기도 했다.
“크으윽…… 미리엔!”
작년 국왕의 탄신을 기념하는 무도회에서 미리엔을 처음 본 그는 나이도 잊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뒤, 한동안 상사병을 앓다가 얼마 전 정식으로 청혼을 넣었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정중히 거절한다는 답신이 돌아왔다.
불쾌한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담아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러자 이번엔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매우 단적인 어조의 거절 답신을 되돌려 받았다. 지금 막 그 답장을 마지막까지 읽은 참이었다.
“건방진 것들. 감히 남작가 주제에!”
지금껏 어디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는 분노로 인해 격앙된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헬리언 백작이 소리쳤다.
“집사! 집사!”
“예! 부르셨습니까?”
잔뜩 긴장한 채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황급히 들어왔다.
헬리언 백작은 성정이 불같은 자였다. 조금이라도 기다리게 했다간 머리를 향해 무엇이 날아올지 몰랐다.
“오늘과 내일, 예정되어 있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마차를 준비해라.”
“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메이켄 남작령에 다녀올 것이다. 직접 가서 따져야 할 것이 있다.”
“알겠습니다. 메이켄 저택에 기별을 넣어 둘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남작가 따위에 무슨 양해를 구한단 말이냐?”
“그럼 마차를 대기하라 이르겠습니다.”
집사는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채 집무실을 나갔다. 그 뒤로도 한참을 씩씩거리던 헬리언 백작은 이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만약 내가 직접 갔는데도 미리엔을 얻어 오지 못하면 너희는 날 무시한 오만방자함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