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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7화)
Chapter 04 헬리언의 망나니 백작(2)


시온이 오전 내 마당과 정원을 쓸고 점심을 먹으러 저택에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 과일 바구니를 든 미샤가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여 시온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지? 다들 바빠 보이는군.”
“백작님께서 오셨대요. 기별도 없이 갑자기 오시는 바람에 다들 준비하느라 난리예요.”
“그렇군. 내가 뭐 도와줄 일 있나?”
“있어요. 당신은 백작님 눈에 안 띄게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숨어 있어요.”
“내가 왜?”
“백작님한테도 반말할 거잖아요!”
“알았으니까 밀지 마라.”
시온은 막무가내로 떠미는 미샤에게 이끌려 저택의 뒷마당으로 끌려갔다.
“당신은 그냥 안 나타나는 게 도와주는 길이에요. 백작님 가실 때까지 여기 조용히 숨어 있으세요.”
“그냥 여기 있으면 되나?”
“그래요. 좀 있으면 아가씨도 오실 거예요. 백작님은 아가씨한테도 껄끄러운 인간이거든요.”
“나는 여기서 애나 보라는 거군.”
“우쭐해하지 말아요. 아가씨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베! 하고 혀를 낼름 내민 미샤가 황급히 저택으로 돌아갔다.
취급은 험하지만 미샤도 나름대로 시온과 친해져 있었다. 심심하면 먹으라고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두고 간 것이 그 증거였다.
잠시 후. 시온이 바구니 안에 든 포도를 우물우물 먹고 있는데 미리엔이 나타났다.
어두운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던 그녀는 돌아서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시온을 보자 언제 우울했냐는 듯 안색이 환해졌다.
살금살금 다가간 미리엔이 뒤에서 양손으로 시온의 눈을 가렸다.
“와악! 누구∼게?”
“이 빈약한 가슴 감촉은 미리엔이군.”
“으아아악!”
미리엔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시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 나이를 생각하면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모, 몰라. 바보!”
“과일 좀 들겠나? 혼자 먹기엔 많군.”
“으으…….”
홍당무처럼 상기된 얼굴로 신음하던 미리엔은 머뭇거리며 다가와서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
두 사람은 곧 나란히 앉아서 우물거리며 바구니를 비워 갔다.
한참 뒤에 시온이 말했다.
“아까 미샤가 좀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군.”
“의미심장한 말?”
“지금 온 백작이란 자가 미리엔 너한테 좀 껄끄러운 인간이라지?”
“미샤가 그런 말을 했어?”
“했다. 딱 그 말만 하고 가서 그런지 호기심이 생기는군.”
“별일은 아닌데… 듣고 싶어?”
“네 일에는 흥미가 있다.”
시온의 말에 미리엔이 몸을 꼬며 부끄러워했다. 흥미가 있다는 말을 묘한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원래 아버님하고 메이슨만 아는 얘긴데, 시온한테는 특별히 얘기해 줄게.”
미리엔이 자신을 안주로 오간 혼담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이야기 자체는 금방 끝났다. 문제는 거기에 섞인 미리엔의 고민과 푸념으로, 그것만으로 약 삼십 분 정도 이야기가 이어졌다.
묵묵히 듣던 시온이 말했다.
“미리엔. 너는 백작과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냐?”
“당연히 없지. 헬리언 백작님한테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아들이 있단 말이야. 난 아버지뻘 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 아버님도 강요하진 않으시고.”
“그렇게 생각하면 거절하면 될 게 아닌가.”
“이미 두 번이나 거절했어. 그랬더니 직접 찾아온 거야. 여기서 아버님이 지면 난 꼼짝없이 끌려가게 될지도 몰라.”
“죽여 줄까?”
“뭐?”
“그 백작. 죽여 버리면 간단히 해결될 일 같은데.”
너무나 엄청난 일을 간단히 말하는 시온이었다.
미리엔이 그 말에 대답을 하려 하자 시온이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뒤에서 묵직한 저음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잠깐. 지금 감히 이 몸을 살해하겠다는 것인가?”
머뭇, 미리엔의 시선이 시온을 따라 천천히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헬리언 백작과 미리엔의 아버지인 메이켄 남작이 서 있었다.

“환영합니다, 헬리언 백작님.”
“하하. 너무 갑작스럽게 들이닥쳐서 놀라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메이켄 남작의 집무실로 안내받은 헬리언 백작이 껄껄 웃었다.
실제로 귀족이 다른 귀족의 저택에 방문하면서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은 엄청난 실례였다.
메이켄 남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상대가 백작이라 차마 나무라지도 못하고 웃는 낯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좀 놀라기야 했지만 괜찮습니다. 일단 앉아서 차를 좀 드시지요.”
“아닙니다. 저도 아버님과 마주 앉아 한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밀린 일처리를 위해 곧바로 돌아가 봐야 해서요. 집무실 책상이나 지키는 인생은 그저 시간이 금이지요. 하하! 그래서 말인데, 바로 용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님?’
메이켄 남작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러시다면야…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말씀을 해 보시지요.”
“아마 아버님께서도 익히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제가 두 차례에 걸쳐서 보낸 혼담을 전부 고사하셨더군요.”
“예에. 그랬지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편지에 적힌 형식적인 말들이 아니라, 제 면전에서 알아듣게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저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지 말입니다.”
메이켄 남작은 한숨을 쉬었다.
답장을 보내는 순간부터 상대가 이렇게 나올 줄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예상대로 움직이는 상대를 목전에 두고 보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가족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내린 결정입니다. 특히 제 딸아이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반영하였습니다.”
“미리엔 양이 거절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미리엔은 아직 혼기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입니다. 혼기가 차면 우리 영지의 기사들 중에 그 아이가 원하는 상대와 짝을 지어 줄 생각입니다.”
“잠깐만요. 아버님의 말씀은 만약 미리엔 양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결혼을 허락해 주실 거라고 들리는군요. 제가 느낀 게 맞습니까?”
“미리엔이 원한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백작님 건에 대해서는 미리엔이 분명히 거절을…….”
“제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미리엔 양과 진솔하게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지요. 저와 시간을 좀 보내다 보면 분명 마음을 돌려줄 거라고 확신합니다. 미리엔 양을 불러주십시오.”
“일단 그 아이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그 아이가 백작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승낙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묻는 자리에 저도 동석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미리엔 양이 허락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메이켄 남작은 난처했다.
헬리언 백작이 저런 요구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의견을 묻는 척만 하고서 ‘원치 않는다’고 대답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떳떳하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맞지만, 백작이 직접 대화를 청하는데 미리엔이 거절하는 것도 쉬울 리 없었다.
결국 손해 볼 게 없는 사람은 헬리언 백작이었다.
메이켄 남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미리엔을 불러오지요.”
“그럴 것 없습니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저택의 뒷마당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아직 그곳에 계실 테니 제가 직접 가 보도록 하지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저도 함께 가지요.”

그렇게 해서 저택의 뒷마당으로 온 헬리언 백작과 메이켄 남작은 곧 미리엔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곁에 연인처럼 다정하게 앉아 있는 흑발 금안의 사내도 볼 수 있었다.
“죽여 줄까?”
“뭐?”
“그 백작. 죽여 버리면 간단히 해결될 일 같은데.”
헬리언 백작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거기서 부터였다.
“잠깐. 지금 감히 이 몸을 살해하겠다는 것인가?”
“네놈이 헬리언 백작이라면 그렇다.”
시온이 헬리언 백작을 일별하며 말했다.
너무도 태연하게 말한지라 모두가 멍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순간 미리엔과 메이켄 남작의 심장은 동시에 철렁 내려앉았다.
“하하하하하!”
헬리언 백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감히 일국의 백작을 살해하겠다고 선언한 것인가? 감탄스러워. 그 배짱 한 번 대단하구나.”
호기로운 말과는 달리 헬리언 백작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바로 면전에서 ‘죽이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미리엔도 마찬가지였다.
“시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간단해. 원흉은 제거해 버리면 된다.”
시온은 미리엔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헬리언 백작에게 다가갔다.
“어딜!”
시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을 헬리언 백작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 기사이기도 한 헬리언 백작은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다. 허리에 찬 레이피어를 뽑아 시온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려 했다.
기긱―!
그러나 다음 순간 헬리언 백작은 숨을 삼키며 굳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다가온다고 생각했던 그가 어느 순간 눈앞에 있었다.
“뽑지 마라.”
시온이 발로 레이피어의 폼멜을 찼다. 그러자 반쯤 뽑혀 나오던 레이피어가 다시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감히!”
노호한 헬리언 백작이 오러를 끌어 올려 두 주먹에 모았다. 안개 같은 녹색 오러가 서린 주먹을 휘두르자 시온이 뒤로 물러났다.
‘흥! 그럼 그렇지. 오러를 사용하면 너 따위는!’
득의만만한 헬리언 백작의 생각과는 달리 시온은 오러를 보고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여유가 담긴 그의 시선을 마주한 헬리언 백작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순간 시온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쉬이이익!
물러난 거리를 단숨에 좁힌 시온이 몸의 회전을 이용해 가속도가 붙은 돌려차기를 날렸다.
파악!!
건틀릿을 낀 손으로 막아냈지만, 그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머리를 보호한 자세 그대로 헬리언 백작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시온이 자세를 낮추고 따라붙으며 팔꿈치를 세워 흉갑을 올려 찍었다. 동시에 주먹을 질러 같은 곳을 가격했다.
그 모든 공방은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촤아아아아아악!
엄청난 충격을 받고 주르륵 밀려난 헬리언 백작이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웨에에엑!”
복부 쪽을 집중적으로 가격을 당했기 때문에 위액이 역류하고 토사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엎드린 그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기 위해 다가가려는 시온을 메이켄 남작과 미리엔이 황급히 붙들었다.
“당장 멈추지 못해!?”
“시온, 그만둬!”
“왜 말리는 거지?”
시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메이켄 남작이 뒤늦게 수습을 위해 나섰다.
“미리엔, 그자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 어서!”
“네. 알았어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미리엔이 시온을 마구 잡아끌었다. 미리엔과 시온이 저택의 그림자 뒤로 사라졌을 때, 소란을 눈치챈 헬리언 백작가와 메이켄 남작가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메이켄 남작이 황급히 기사들을 가로막았다.
“아무 일도 아닐세. 잠시 사소한 문제가 있었을 뿐이니 안심하고 물러들 가게.”
“물러가라!”
헬리언 백작도 소리쳤다.
메이켄 남작이 대놓고 기사들을 물린 것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다. 가신들에게 주인이 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판단이었다.
기사들이 물러간 것을 확인하고 메이켄 남작이 황급히 헬리언 백작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백작님.”
“놓으시오!”
메이켄 남작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헬리언 백작이 부릅뜬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내 오늘 남작령에 들러 아주 좋은 선물을 받아가는 것 같소! 메이켄 남작!”
“오해이십니다.”
“오해는 무슨 얼어 죽을 오해! 사람을 시켜 나를 공격해 놓고 이제 와서 오해라고?”
메이켄 남작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 지금 진 이 빚은 이자를 톡톡히 쳐서 갚아드릴 것이오. 기대하셔도 좋소!”
원한과 독기가 서린 눈으로 소리치는 헬리언 백작.
메이켄 남작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헬리언 백작은 이 일을 귀족 사회에 공론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미리엔에게 구애해 온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현 시점에 남작가에 찾아갔다가 구타를 당했다는 것이 소문이 나면 체면이 심하게 손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써 그가 메이켄 남작가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면 크나큰 손실이 뒤따를 것은 명백했다.
어떻게든 붙잡아서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헬리언 백작은 그대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메이켄 남작은 마음이 착잡했다.
“하아.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