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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8화)
Chapter 04 헬리언의 망나니 백작(3)
마음이 진정된 메이켄 남작은 곧 미리엔과 시온을 집무실로 불렀다. 그야말로 십 년은 감수한 듯 안색이 시꺼멓게 죽은 미리엔과 태연한 시온이 집무실 의자에 각각 앉았다.
“아버님, 죄송해요.”
메이켄 남작이 입을 열기 전에 미리엔이 먼저 말했다.
그녀에게는 시온을 저택으로 끌어들인 것과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는 일차적 책임이 있었다.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를 메이켄 남작은 담담하게 바라봤다.
“자네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게.”
메이켄 남작의 말이었다.
시온은 살며시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카론과 싸웠던 날, 나는 그에게서 메이켄이 기사의 가문이라고 들었다.”
“그 말은 사실일세.”
“하지만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무슨 뜻이지?”
“언어를 배울 때 책에서 읽었다. 기사라는 건 상대가 누구든 굴하지 않는 자라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상대의 고하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자. 이것이 바로 기사도 아닌가?”
“그것이 기사도인 것은 맞네.”
“그런데 남작.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떤가?”
“……?”
“헬리언 백작이라는 놈이 얼마나 잘난 놈인지, 얼마나 대단한 세력을 갖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놈이 어떤 놈이건 간에 미리엔을 탐내고 귀찮게 구는데 한 대 패주지도 못하면서 강강약약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가? 한 대 패줬다고 전전긍긍하는 게 기사로서 보여야 하는 모습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네. 하지만 그건 자네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 되어 보면, 아니, 작은 가정이라도 꾸려 보면 느끼게 될 걸세.”
“무엇을 어떻게 느낀다는 말인가?”
“나도 젊었을 땐 자네처럼 혈기가 앞섰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내 말 한마디, 내 행동거지 하나에 부하와 가족들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네. 그런 상황에서까지 막무가내일 수는 없는 거야.”
“아니, 내 생각은 다르다.”
시온이 단언했다.
“주군이 기사라면, 아버지가 기사라면, 남편이 기사라면. 누군가는 기사이고 기사의 아들이고 기사의 아내인 것이다. 그들이 살려달라고 매달렸나? 당신의 그 생각 하나로 명예롭게 죽을 수도 있는 자들을 구차하게 메어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메이켄 남작은 말이 없었다.
시온은 다시 말했다.
“부득이하게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 영지의 그 누구도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그 헬리언이라는 놈이 개수작을 부린다면 똑같이 두들겨 패서 보내 버리면 되는 것이다. 누구든 메이켄 영지의 사람을 건드리면 얻어맞고 구토하게 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면 된다.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더 이상 미리엔에게 그런 놈 뒤에서 비참한 표정 짓는 당신을 보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네 설마, 헬리언 백작이 그곳에서 들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나?”
“물론 알고 있었다.”
“으음!”
메이켄 남작은 낮게 신음했다.
시온의 행동이 머리로는 화가 나면서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시온이 말한 것들은 평소 메이켄 남작이 가져왔던 딜레마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에 동조하고 넘어가기엔 사안의 중대함이 너무도 컸다. 확실하게 벌하지 않으면 비슷한 상황이 도래했을 때 같은 짓을 저지르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어쨌건 자네는 이 메이켄 남작령 안에서 영주인 나를 능멸하고 손님을 폭행한 죄가 있다. 뜻은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수단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야.”
시온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서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죄라면 처벌은 받아들이겠다.”
“카론 경.”
메이켄 남작이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론을 불러들였다. 그도 이미 모든 사정을 전해들은 뒤였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이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삼 일 동안 지하 감옥에 구금하라. 이의 있나? 자네는 정식 영지민이 아니니 불복하겠다면 남작령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무마해 줄 수도 있네.”
“아니, 받아들이지.”
시온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아직 메이켄 영지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론 경, 끌고 가게.”
“예.”
카론이 시온의 두 팔을 밧줄로 묶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런 형벌은 집행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카론이 할 일은 시온을 감옥으로 데려가 가두어놓는 것뿐이었다.
철컥.
감옥의 열쇠를 잠그고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카론이 시온을 바라봤다.
시온도 카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메이켄 남작은 내 행동이 그리 탐탁지 않은 것 같더군. 카론, 너도 비난하고 싶거든 해라.”
“내가 왜?”
카론이 싱긋 웃었다.
시온의 행동으로 인해 메이켄 남작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왠지 카론은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헬리언 백작은 자기보다 작위가 낮은 귀족을 업신여기고 권력을 남용해 대기로 유명한 쓰레기 같은 놈이다. 영주님께서 곤란하신 건 안타깝지만 이걸로 아가씨의 혼담도 쏙 들어가겠지. 솔직히 나는 속이 후련해.”
씨익.
시온의 입가도 비로소 호선을 그렸다.
“기사단장이 그래도 되는 건가?”
“어, 돼. 난 그저 영주님을 해치려는 놈들을 박살 내면 그뿐이거든. 영주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생하는 건 집사인 메이슨이 할 일이지.”
“속 편해서 좋겠군.”
“불만 있으면 너도 기사해라. 그럼 되잖나.”
“거절한다. 약삭빠른 친구.”
두 사내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낄낄 웃던 카론이 이내 등을 돌렸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감옥에서 나오면 보자.”
“그러지.”
카론이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온이 낡은 짚더미 위에 몸을 눕혔다.
다음 날.
헬리언 백작가로부터 한 장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지난날 있었던 불미스런 일에 대한 유감을 표하는 편지였다.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화해를 하고 싶다면 미리엔과 시온을 헬리언 영지로 보내고 어떻게 처우하든 관계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라고도 적혀 있었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이며, 거절할 시 영지전도 불사하겠다는군.”
메이켄 남작이 편지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의 집무실에는 집사 메이슨과 기사단장 카론, 부단장인 오리온을 포함하여 영지의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메이켄 남작이 불러 모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어떻게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미리엔 아가씨를 인질로 잡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건 이미 우리 메이켄 영지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카론이 분기를 터뜨렸다.
오리온을 비롯한 기사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다.
“메이슨, 자네 생각은?”
메이슨이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요. 화해의 조건이 인질이라면 협상이 성립될 여지는 없습니다. 저쪽도 당연히 거부당할 것을 예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영지전으로 몰고 갈 생각이란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메이켄 남작이 안타까운 탄성을 발했다. 그것은 메이켄 남작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결과 중 하나였다.
“만약 거절하고 영지전으로 돌입한다면 승산은 있을 것 같나?”
“다행히 헬리언 백작령에는 수도군 제약이 걸려 있어 기사가 백 명 이상 움직이지 못합니다. 사병들까지 총동원해도 천 명 이상은 운용하지 못할 테니, 성문을 닫아걸고 수성으로 응수하면 승산은 있습니다.”
수도군 제약은 왕성 인근에 영지를 가진 제후가 병력을 다수 운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 둔 제약을 말한다. 반역을 대비한 안전장치였다.
만약 운용 가능한 최대 병력인 천 명에서 단 한 명이라도 추가로 움직이는 기미가 보여도 헬리언 백작가는 수도방위군과 근위기사단에 의해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천 명이라…… 그래도 너무 많군.”
메이켄 남작가의 병력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숫자다. 병사와 기사들 개개인의 역량은 메이켄 남작가가 월등히 앞서지만, 수천 명이 뒤엉키는 난전이 시작되면 그런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라면 모를까, 군사훈련을 좀 받은 사병들의 한계는 극명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싸워보기도 전에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적입니다!”
망설이는 메이켄 남작을 향해 기사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메이켄 남작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메이켄 남작이 메이슨을 바라보았지만 그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집사인 동시에 참모이기도 한 그였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선택을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카론이 말했다.
“영주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건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히 한마디 하자면, 저희는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주십시오.”
“…….”
메이켄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모르겠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쯤. 다만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보니 자꾸만 망설이게 되는군. 지금부터 답장을 쓰도록 하겠소.”
그날 오후.
메이켄 남작 저택으로부터 한 필의 마기가 떠났다.
헬리언 영지를 향해 가는 말과 기사를 바라보며 메이켄 남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