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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9화)
Chapter 05 영지전의 시작(1)


이틀 뒤.
구금을 끝내고 감옥에서 나온 시온이 태양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지하 감옥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가 뒤에서 말했다.
“카론 님께서 출옥하시는 대로 곧장 들르시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시온은 미리엔의 방을 먼저 찾았다. 삼 일 전 같이 있던 자리에서 감옥으로 끌려왔으니, 그녀가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시온이 미리엔의 방문을 살짝 두드렸다.
“미리엔, 있나?”
“시온? 앗, 안 돼. 아직 문 열지 마!”
안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부산스럽게 허둥대는 소리가 나더니, 한참 만에야 미리엔이 나왔다.
“내가 방해한 건가?”
물으면서 시온이 슬쩍 미리엔의 어깨너머로 방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러자 미리엔이 걸음을 움직여 시야를 차단했다.
“아냐. 난 그냥… 그래, 그냥 있었어. 시온, 언제 감옥에서 나왔어?”
“방금. 그동안 별일 없었나?”
“응…….”
시온의 물음에 미리엔이 어두운 얼굴을 했다.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미리엔은 머뭇거리면서도 시온에게 헬리언 백작가와 영지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재는 헬리언 백작의 영지전 허가 요청이 왕궁에 접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 모두 국왕의 신하이기 때문에 왕의 허락 없이 군사를 움직여 싸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국왕은 영지전을 중재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조금 시일만 늦춰졌다 뿐이지 요청이 접수된 이상 영지전이 벌어질 것은 이미 확정적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은 그렇게 된 건가?”
“카론 경이 직접 기사들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어.”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시온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미리엔이 그의 옷을 잡았다.
“벌써 가려고?”
“얼굴만 보러 온 거니까.”
“지금 가도 카론 경은 만나기 힘들 텐데…….”
“그가 보자고 했으니 시간은 자기가 내겠지.”
“응…… 알았어.”
할 수 없다는 듯 미리엔이 시온의 옷을 잡은 손을 놨다.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분명히 해라, 미리엔.”
“응?”
“표정이 답답해 보여서 하는 말이다.”
시온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미리엔을 쳐다봤다.
다소 언짢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머뭇거리던 미리엔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하고 싶은 말 없어.”
“알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시온은 돌아보지 않고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벌한 인생을 걸어온 그였다. 미리엔의 그런 반응이 미묘한 여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척! 후우웅! 척!
“으아아아압!”
“이야합!”
채앵! 챙챙챙!
창이 호선을 그리고 검광이 번득였다. 너른 연무장을 가득 메운 기사들이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시온이 연무장에 나타난 뒤에도 훈련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우연히 카론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기사들은 시온이 온 것도 모른 채 계속 검무에 몰두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 이제야 왔군. 모두 쉬어! 잠시 휴식한다!”
카론이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땀범벅이 된 기사들이 하나둘씩 투구를 벗어 던지고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출옥했다는 보고를 받은 지 꽤 됐는데 왜 이제야 온 거지?”
“잠깐 미리엔을 보고 왔다.”
“그래? 그건 잘한 일이군.”
카론이 웃으며 시온을 벤치로 이끌었다.
연무장 안에는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앉아서 구경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미리엔에게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곧 영지전이 시작된다지?”
“헬리언 그놈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왔다.”
“어떤 요구?”
“너와 미리엔 아가씨를 내놓으라더군. 하! 이 카론이 눈을 부릅뜨고 살아 있는 한은 안 될 말이지.”
“날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너 말고 미리엔 아가씨 때문이다.”
카론이 피식 웃었다.
“너는 헬리언 영지에 던져 놓으면 백작의 목을 들고 돌아올 것 같아서 오히려 바라는 바인데 말이야.”
“불가능한 건 아니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시온이었다.
그저 자신감의 표출이라고만 생각했는지 카론은 그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온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지?”
“적의 전력은 우리의 약 두 배에 육박한다. 성문을 닫아걸고 수성에 집중해야지.”
“웃기는군. 카론, 네가 할 말 같지는 않고. 그 안경 집사가 내놓은 계책인가?”
“메이슨이 말한 건 맞지만, 뭐가 웃긴다는 거냐?”
“병사들이 성안에 숨어 있으면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도 모두 성안으로 대피시킬 거다. 지금 구호소와 임시 거처를 짓고 있는 중이지.”
“그럼 그들의 집과 밭은?”
카론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약탈당하겠지. 가질 수 없는 건 태워 버릴 테고.”
“그걸 감수하겠다는 건가?”
“달리 방법이 없잖아. 전면전으로 갔다간 깨질 게 뻔한데.”
방법에 불만이 있는 건 카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 시점엔 정말로 그것이 최선이었다.
수성은 최대 세 배까지 병력 차를 커버할 수 있으니, 성을 지키면서 싸우면 최소한 지지는 않을 터였다. 이기지 못하는 상대와 싸워서 지지 않는 것. 그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저들이 회군할 때 후미를 잡아서 피해를 입히면 돼.”
“나라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은 안 할 것이다.”
“그럼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단 말이냐?”
시온이 씨익 웃었다.
“들어보겠나?”
“궁금하니까 말해봐라.”
“아니, 너한테는 안 돼.”
“뭐?”
“메이슨을 불러와라. 그가 보는 앞에서 시뮬레이트 해 주지.”
“시뮬레이트……? 그게 뭐냐?”
시온은 한숨을 쉬었다.
“…됐으니까 메이슨을 불러와라, 카론.”

곧 공사 업무를 접고 달려온 메이슨이 시온의 생각을 듣더니 예의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카론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그럴 듯한 방법이긴 하군요. 그런데 이게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그래. 내가 보기에도 무모해 보인다.”
메이슨과 카론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런 반응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시온이 선선히 대답했다.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겠지. 카론. 지금부터 기사들에게 몇 가지 임무를 주겠다. 그것을 빈틈없이 수행하도록 지시를 내려라.”
“그건 어렵지 않지만, 어째 말투가 좀 거슬린다.”
“네가 좋아하는 힘의 논리다. 불만이 있으면 도전해라. 나를 이기면 선처해 주지.”
“쳇. 알았다, 알았어.”
혀를 차면서도 카론은 시온이 말하는 대로 계획을 짜서 기사들을 나누었다.
곧 시온을 중심으로 열다섯 명이 진을 짜고, 나머지 사십오 명은 적으로 상정한 모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십여 명이 공동으로 사용할 만큼 넓은 연무장이긴 하나 모의 전투를 치르기엔 협소한 공간이라 다소 어설픈 감은 있었다.
그렇지만 시온의 지휘는 메이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서, 결과는 그가 의도했던 거의 그대로 연출되었다. 약 삼십 분에 걸친 시뮬레이트가 끝나자 시온이 메이슨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지? 수성한답시고 밭과 집을 다 태워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싸움이라고 보는데.”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집중적으로 훈련한다면 엄청난 성과를 낼 수 있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요. 그리고 실전은 싸움의 규모가 다릅니다. 지금처럼 딱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요.”
“충분히 가능하다. 왜 그런지는 지금부터 보여주지. 카론, 국왕의 승인이 떨어지기까지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카론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무리 늦어도 사흘이면 결과가 나올 거다. 이동 시간을 감안하면 닷새에서 엿새 사이에 선발대가 남작령에 도착하겠지.”
“그럼 앞으로 사흘 간 기사들의 훈련은 내가 지휘하겠다. 메이슨, 카론. 이의 있나?”
“그 안에 성과를 낼 자신이 있다면 찬성합니다. 대신 카론 경이 확실히 감독을 해 주신다는 조건 하에서요.”
“메이슨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이의 없다. 다만 그동안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기존에 이야기했던 대로 성문을 닫고 수성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은 확실히 해 두자.”
“좋다. 어차피 작전 중에도 수성은 필요하니까. 메이슨은 수성을 중심으로 사병들을 훈련시켜라.”
“알겠습니다.”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지.”
시온이 그들을 놔둔 채 연무장을 나갔다.
그곳에 남겨진 메이슨과 카론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메이슨,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자신의 말을 지킬 능력이 있다면 싸움의 전황은 크게 바뀔 겁니다. 저 역시 수성을 하는 동안 마을들이 입을 피해가 신경이 쓰였는데, 그 작전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역으로 헬리언 영지에까지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요.”
“난 그것보다도 시온에 너무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메이켄 영지를 지켜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인데 말이오.”
“의지하는 게 아니라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애당초 이건 그가 뿌린 씨앗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런가?”
시온이 헬리언 백작을 두들겨 팸으로서 시작된 일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시온이 받은 처벌은 그야말로 경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메이슨, 아마 헬리언 그놈은 시온이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우리 영지를 침범했을 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메이슨은 의외로 선뜻 긍정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이 단초를 제공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빌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헬리언 백작은 그런 쪽으로 악명이 높은 자였다. 젊은 나이에 권력을 등에 업은 부작용인지는 몰라도 마음에 안 드는 영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짓밟고 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어쨌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그렇죠. 일단 시작되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테니까.”
“우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예. 그래야겠지요.”

다음 날부터 시온은 오전에는 기사들의 훈련을 지휘하고 오후에는 서재에서 카론, 메이슨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시온은 메이슨과 이야기를 하면서 현재 메이켄 영지의 상황과 왕국의 정세에 관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라도네스 왕국은 대륙을 지배하는 툴리언 제국에 복속된 국가로서, 인근 포르가스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 페론 왕국이 포르가스와 맞닿아 있는 형태였다.
그 외에 국가의 형태를 지닌 곳들로 신성교국과 자유연방, 해양 국가들이 존재하나 그 모든 것이 제국의 통치력 아래에 있었다. 그러니 사실상 툴리언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도네스 왕국은 세 왕국 가운데서 가장 왕성한 국력을 자랑하지. 때문에 제국 산하에서 삼국 체재가 안정되고부터는 줄곧 평화가 지속돼 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모습일 뿐. 귀족들 간의 암투는 도저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심화되어 있는 상황이지.”
“원래 흘러야 할 물이 고여 있으면 썩는 법이지.”
시온의 말에 카론이 메이슨을 보았다.
“메이슨, 물도 썩나?”
“글쎄요. 아마 오염된다는 표현을 빗대어서 하신 것 아닐까요?”
“…….”
잠시 침묵하던 시온이 다시 말했다.
“어쨌건, 카론의 말대로라면 이런 사소한 일로 영지전이 발발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좀 들려줄 수 있나?”
“그거라면 여기 어딘가에 서류로 정리해 둔 것이 있을 겁니다. 제가 찾아오죠.”
일어나서 서가를 뒤적거리던 메이슨이 한 권의 파일을 뽑아 시온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