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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0화)
Chapter 05 영지전의 시작(2)


펼쳐서 좌라락 훑어본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귀족들은 체면이 목숨보다 중요한 모양이군.”
메이슨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둔 자료들을 보니 대부분의 영지전 원인이 귀족 간의 체면 문제였다.
면전에서 모욕을 가했다던가, 사교 모임에서 험담한 사실이 들켰다던가. 심지어는 말다툼 한 번에 영지가 쓸려 버린 경우도 있었다.
카론이 말했다.
“체면은 중요해. 영지를 가진 귀족은 그 그룹의 리더다. 리더에게 중요한 건 아랫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 즉, 체면이지. 체면의 상실은 통솔력의 부재로 이어지고 가문과 영지의 가치를 깎는 굴욕적인 결과로 귀결된다. 체면에 목숨을 거는 게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카론의 변명처럼 장황한 말을 한마디로 일축시킨 시온이 읽어본 자료를 다시 메이슨에게 건넸다.
“중요한 건 이 웃기지도 않는 싸움에 아무 상관없는 자들이 말려든다는 거다.”
“시온 님. 영지민들과 부하들은 모두 영주님의 소유이니 아무 상관없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메이슨의 말이었다.
그는 카론과는 달리 시온을 영지의 손님으로서 정중하게 대했다. 그가 시온의 말에 끼어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온이 메이슨을 바라보며 냉소를 흘렸다.
“멍청한 생각을 하는군.”
“뭐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바로 남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거다. 충성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참기 힘든 모욕입니다.”
“당연한 말에 모욕감을 느낀다면 그건 네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감히!”
탕!
메이슨이 탁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론이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진정하오, 메이슨. 그는 우리와 다른 곳에서 살던 사람이오.”
“실례란 걸 알면서도 말하는 건 곧 모욕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아니, 모욕을 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시온이 말했다.
변명이 아니라 순수한 그의 본심이었다.
“그저, 난 그렇게 스러져 가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그 끝에 무엇이 남는지도. 그래서 더 이상 가까이서 숨 쉬는 사람들이 그런 전철을 되밟기를 바라지 않을 뿐.”
“…….”
흥분했던 메이슨이 입을 다물었다. 늘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 힘든 시온이었지만,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표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쓸쓸함이었다.
이런 얼굴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메이슨은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강요하진 마십시오. 당신에게 당신의 신념이 있듯이, 우리에겐 우리의 신념이 있습니다.”
시온은 메이슨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짙은 에메랄드 빛깔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곧은 시선을 하고 마주봐 왔다.
잠시 후,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나의 실언을 사과하지.”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메이슨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저야말로 무례했습니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숙이고 들어올 줄은 몰랐는지 메이슨은 허둥대며 일어났다.
“차가 식었군요. 과자도 새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메이슨이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서재를 나갔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카론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한판 붙나 했더니 실망이군. 그렇게 쉽게 사과할 줄은 몰랐어.”
시온이 웃었다.
“그저 한 번쯤 생각해 보기를 바랐을 뿐이다.”
“난 네놈이 무슨 말을 하건 별로 놀랍지 않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니까 조금은 신경을 써. 난 메이슨이 그토록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
“명심하지.”
두 사내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새로 끓인 홍차와 초콜릿 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메이슨이 돌아왔다. 잠깐 사이 진정이 됐는지 그의 모습은 보통 때로 되돌아와 있었다.
“방금은 죄송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오지. 서류에 적힌 대로라면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 건가?”
“그래. 영지전을 하다 보면 어느 한쪽이 항복해서 조기에 종전되어 버리는 수도 있으니까. 섣부르게 한쪽의 편을 들면 다른 한쪽과는 두고두고 원수를 맺게 되거든.”
“한편으론 언제 자신도 같은 입장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죠.”
카론과 메이슨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욱 쉽지. 어차피 양측의 전력이 공개된 싸움이다. 잘만 대처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기사들의 훈련은 어떻습니까?”
“순조롭다. 다들 잘 따라와 주고 있으니까.”
“그렇습니까? 그건 다행이군요.”
“메이슨, 메이켄 남작령 주변의 상세한 지도가 필요하다. 구해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그것도 서고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담당 서기를 시켜서 찾아놓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세부 사항을 더 논의해 보자.”
세 사람의 설왕설래는 밤이 깊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온이 막 기사들의 기동 훈련을 끝마치고 카론에게 인계를 넘겼을 때쯤, 왕성에서 보낸 전령이 헬리언 백작가와 메이켄 남작가에 각각 도착했다.
메이켄 남작을 필두로 친서를 펼쳐본 모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예상대로 영지전이 승인됐다. 이제 남은 것은 선전포고뿐인가.”
카론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쪽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헬리언 영지로 진격하는 건 어려울까?”
“그건 불가능하다. 시온.”
“어째서?”
“헬리언 백작령까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의 거리가 있어. 그사이에 있는 영지들이 길을 내주지 않으면 지나갈 수가 없다.”
“내달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길을 내줄 리가 없으니까 문제지. 길을 내줘서 헬리언 영지가 피해를 입는다면 영지전이 끝나고 심각한 보복을 받을 수도 있어. 영주들은 아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거다.”
“보복? 그거야 우리가 이기면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병력 차이를 봐라. 그들은 아무도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헬리언 영지의 군사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마찬가지로 그들이 길을 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맞아. 그리고 우리와는 달리 헬리언 영지군에겐 선뜻 길을 비켜주겠지.”
시온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즉, 메이켄 영지를 만만히 보고 있다는 거군.”
“어쩔 수 없습니다. 상대가 헬리언 백작이니까요.”
부단장 오리온이 말을 받았다. 그는 단장인 카론과 지위 상 맞먹는 시온에게 매우 정중했다.
“만약 우리 영지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럼 이런 긴급 상황에 메이켄 영지의 편이 되어 줄 우방이 단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메이켄 영지는 자급자족이 가능해서 주변 영지들과의 교류가 적어. 우방인 영지라면 하나 있지만…….”
“왜 말끝을 흐리는 거지? 카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분명하게 해라.”
“호센 남작가라면 헬리언과 척을 지는 한이 있어도 우릴 도와줄 수 있는 우방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금 상황엔 도움이 되지 못할 거야.”
“호센 남작가?”
“미리엔 아가씨의 모친께서 호센 남작님의 누님이 되십니다.”
메이슨의 설명을 듣고서야 시온은 비로소 자신이 미리엔의 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이켄 남작 부인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고 보니 미리엔에겐 오빠가 둘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걸 이제야 물어보냐는 듯 핀잔 섞인 투로 카론이 대답했다.
“영부인께선 두 아드님과 함께 호센 남작가에 가 계신다. 미리엔 아가씨도 함께 가셨었지만 조금 이르게 돌아오셨지. 돌아오면서 널 발견한 거고.”
“휴가라도 가는 건가?”
“매년 이맘때면. 영주님께선 영지를 오래 비울 수 없어서 남아 계시지만 말이야.”
“그렇군.”
시온은 고개를 끄덕일 뿐, 남작 부인에 관해서는 신경을 껐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어쨌든 선수를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군.”
“후수가 나아. 선공을 취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작전이나 훈련이 무의미해지고 위험도만 높아진다. 그걸 생각해야지.”
“그야 그렇지만, 메이켄 영지에 피해를 미치지 않게 하려면 영지 바깥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좋다.”
“방법이 있습니다.”
메이슨이 지도의 한 지점에 동그라미를 쳤다.
“남작령 외곽, 헬리언 영지군의 진입로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거기서부터 전투를 시작해서 영지의 바깥쪽으로 유인해 가는 방식으로 싸우면 영지 쪽의 손실은 제로로 만들 수 있죠.”
“놈들이 유인에 응할까?”
“약을 올리면 됩니다. 기사들 몇이 그런 데 일가견이 있죠.”
“그렇다면 현재로써는 그 방법이 최선인 것 같군.”
카론과 기사들 모두가 동의했다.
시온이 고갯짓을 했다.
“재료가 완성됐으니 어떻게 요리할지 궁리해야겠지. 가 보자.”

그날 오후.
헬리언 백작으로부터 선전포고문이 도착했다.
헬리언 백작의 이러한 만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많은 귀족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헬리언 백작의 세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선전포고를 알리는 편지에는 ‘화해의 길은 언제든지 열려 있으며, 인질들을 거칠게 다루지는 않겠다’는 조롱 섞인 문구도 들어 있었다.
파즈즛!
양피지가 메이켄 남작의 손에서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어린놈이 정말 막돼먹었군!”
“그가 당신을 얼마나 얕보고 있는지 좀 알겠나?”
메이켄 남작이 던져 버린 양피지를 훑어본 시온의 말이었다. 메이켄 남작이 움찔했다.
“한 방 먹여줬는데도 이 정도다. 참고 넘어갔으면 더욱 심했겠지. 하지만 이 싸움이 끝날 땐 놈은 바닥을 기게 될 거다. 침은 그때 뱉어 줘도 늦지 않아.”
시온의 어조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태도는 모두에게 여유를 전염시켰다.
“맞는 말입니다, 영주님. 놈이 건방질수록 박살 나는 꼴을 볼 땐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하하하!”
카론은 이미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껄껄 웃어댔다.
메이슨이 말했다.
“헬리언 영지군은 이미 출정했다고 합니다. 아마 내일 오후 중에는 남작령의 끝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놈들의 무덤이 되겠지.”
“네, 그렇게 돼야겠지요.”
“메이슨, 성을 부탁한다.”
“제 목숨을 다 해서라도. 반드시.”
그의 결연한 음성은 듣는 이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념을 행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