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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1화)
Chapter 05 영지전의 시작(3)


밤.
손톱을 깎아서 걸어놓은 것 같은 푸른 빛 초승달이 희미한 월광을 뿌려냈다. 테라스의 난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온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쥐들이 바쁘군.”
보통 사람의 몇 배는 뛰어난 오감을 지닌 그다. 저택의 담을 넘는 여섯 개의 인기척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은밀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행동을 개시한 것은 좀 의외였다. 분명 자신감에 취해 메이켄 남작가를 너무 우습게보고 있는 것이리라.
툭.
3층 테라스 난간에서 뛰어내린 시온이 조용히 바닥에 착지했다. 때마침 바로 정면에서 두 마리 쥐가 담을 타넘어 들어오던 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복장을 뒤집어쓴 그들의 모습은 시온이 알고 있는 어쌔신(암살자)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조심스럽게 사위를 주시하던 그들은 곧 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시온이 싱긋 웃었다.
“좋은 밤이지?”
그와 동시였다.
타다다닥!
쉬이익! 쉭!
시온의 좌우로 몸을 날린 어쌔신 둘이 양쪽에서 동시에 대거를 투척했다.
어느 한쪽을 막는 동안 다른 쪽에 당할 수밖에 없는 능숙한 연계기.
그들은 시온이 대거에 맞는 것도 확인하지 않고 사선으로 펄쩍 뛰어 다시 한 번 대거를 던졌다. 전, 후, 좌, 우를 완벽하게 봉쇄하는 훌륭한 살인기예였다.
시온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터터텅! 팁!
복면 안에 감춰진 어쌔신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시온이 맨손으로 칼날을 쳐낸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 한 자루를 손가락 두 개로 잡아채더니, 손목을 꺾어 그대로 되돌렸다.
무광의 대거가 밤의 어둠을 갈랐다.
쐐애앵―
푹!
“……큭.”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심장을 꿰뚫린 어쌔신 하나가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절명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절제된 모습. 분명 뼈를 깎는 혹독한 수련을 거친 자들이 틀림없었다.
동료가 죽는 모습을 목도한 나머지 한 명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표독스런 눈으로 품 안에서 대거를 꺼냈다.
시온에게 투척했던 대거와는 달리 핑거링이 부착된 검이었다.
시온이 말했다.
“항복해라. 목숨은 살려 주겠다.”
정보를 캐낼 입이 하나는 남아 있어야 했다. 여섯 인기척은 두 명씩 세 조로 나뉘어 정문을 제외한 삼 방향으로 침투를 했다. 네 명을 더 잡아야 하기에 오래 끌 시간은 없었다.
“…….”
어쌔신의 복면 아래쪽이 씰룩거렸다.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우습나? 지금은 그렇겠지.”
시온은 입가에 띠고 있던 희미한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검지를 세워 그를 겨냥했다.
“……?”
어쌔신의 눈에 의문이 스쳐 지나간 순간, 손가락 끝으로 희미한 연녹색 오러가 모였다.
탕!
동그란 오러가 그대로 발사됐다.
“큭!”
극한의 반사 신경으로 몸을 튼 어쌔신의 어깨에 정확히 동전 크기만 한 구멍이 뚫렸다.
쏴아아아!
휘청!
피가 쏟아지는 가운데, 어쌔신이 중심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시온은 정신을 수습할 일각의 유예도 줄 생각이 없었다.
탕! 탕탕!
정확히 반대쪽 어깨와 양쪽 허벅지를 관통한 오러가 어쌔신의 사지에 동일한 크기의 구멍을 남겼다. 깨끗한 관통상이었다.
팔다리가 꿰뚫리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어쌔신은 이를 악물기만 할 뿐,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자라.”
다음 순간,
순식간에 접근한 시온이 그의 뒷목을 수도로 내리찍었다.
털썩!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쌔신을 잠시 보던 시온은 곧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따라 빠르게 몸을 날렸다.
저택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이동하는 도중 시온은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하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목숨을 잃은 자들은 별로 없었지만, 쓰러진 자들 대부분이 상당량의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쌔신들은 하인들뿐 아니라 하녀들에게도 거침없이 손을 썼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흘린 피에 젖어 온통 번들거리는 로비를 지나면서 시온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잔뜩 헤집어놓는 것…….’
그런 짓을 해서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메이켄 영지의 기사들은 머리끝까지 분노하여 복수의 칼을 갈게 될 것이다.
적당한 분노는 공포를 마비시켜 주기에 도움이 되지만 극도의 분노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적진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메이켄 남작의 저택까지 숨어듦으로써 심리적인 위축을 가하려는 의도 또한 뻔히 보였다.
자신들은 언제든지 너희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쌔신을 보냄으로써 피력한 것이다.
시간과 거리를 생각해 볼 때, 선전포고문과 함께 어쌔신들이 출발을 했으리라.
“헬리언…… 위험한 인간이군.”
목표를 정하자마자 빠르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추진력은 과연 일국의 백작다웠다.
“아아아악!”
그때였다. 시온이 서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정문에서 멀지 않은 휴게실 쪽이었다.
시온이 달려갔을 땐 이미 마지막 하녀가 쓰러지는 중이었다. 어깨와 다리를 찔렸는지 온통 피로 흥건했다.
휴게실에 있던 하녀들을 도륙을 낸 어쌔신은 둘이었다.
그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시온을 발견하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처음 만났던 자들과 같이 대거를 손에 쥐고 양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시온은 이미 그들의 방식을 알고 있었다.
한발 먼저 몸을 날린 시온이 어쌔신 한 명의 바로 정면으로 따라붙어 그대로 주먹을 질렀다.
“죽어라.”
콰드득!
“……!”
오러가 실린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가격당한 어쌔신은 해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즉사했다.
그 일합의 공방으로 서로의 실력 차를 파악한 다른 한 명은 그대로 대거를 던지는 동시에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시온은 그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탕!
손가락 끝에서 발사된 에텔(오러)의 탄환이 대거를 날리고 그대로 어쌔신의 뒤통수까지 꿰뚫었다. 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털썩!
그대로 엎어져 죽은 어쌔신의 시체를 노려보던 시온이 직전에 쓰러진 하녀를 일으켰다.
“괜찮나?”
“흑흑…….”
하녀는 겁에 질린 채 울기만 했다. 아프고 두려워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
하녀에게 뒤처리를 부탁하려던 마음을 접고 시온은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위험하니까 여기서 기다려라.”
시온은 그곳을 그대로 방치한 채 마지막 두 명의 인기척이 같이 느껴지는 이층을 향해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이층은 미리엔과 메이켄 남작의 방이 있는 층이다.
귀족 간의 영지전에서 상대 영주를 죽이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일.
어쌔신들이 메이켄 부녀의 목숨을 해치지는 않겠지만, 어쌔신이 영주의 방에까지 침입을 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엄청난 치욕이었다.
다행히 시온이 갔을 땐 이변을 눈치채고 모여든 기사들이 철통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다.
다들 이층을 지키느라 아래층에서 하인들이 당하고 있는데도 달려오질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온!”
완전 무장을 한 카론이 달려오는 시온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시온은 그대로 카론을 지나쳐 훌쩍 뛰어올랐다.
퍼어억!!
거의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각도까지 떠오른 시온이 공중제비를 돌며 천장을 찼다. 그러자 그 위에 은신하고 있던 어쌔신 하나가 기사들 사이로 떨어졌다.
어쌔신이 바로 머리 위에 숨죽이고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론, 뒤!”
시온이 신호하기도 전에 카론은 뒤에서 날아오는 대거를 건틀릿 낀 손으로 쳐냈다. 동시에 천장에서 뛰어내린 어쌔신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빠각!
엄청난 울림이었다.
시온이 차서 떨어뜨린 어쌔신은 이미 기사들에게 처참히 난도질을 당해 숨이 끊어진 뒤였다. 카론이 바닥에 내친 어쌔신은 척추가 부러진 듯했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시온, 어쌔신이 침입했다.”
“알고 있다. 마당에서 둘, 로비에서 둘 해치웠다.”
“크윽! 빌어먹을 헬리언 놈. 감히 영주님의 저택에 어쌔신을 보내다니!”
“카론, 입 다물고 이빨 깨물어라.”
“뭐?”
퍼어억!!
의아하게 되묻던 카론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무슨 짓이냐!”
기사들이 분노하여 검을 움켜쥐었다. 카론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시온을 쳐다봤다.
시온이 말했다.
“지금 일층에 몇 명이 쓰러져 있는지 알고나 있나? 네가 생각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최소한 이중 반절은 일층을 지키라고 내려보냈어야 했다.”
“…….”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카론. 너는 지금 집과 밭을 포기하고 성문을 닫아걸자는 멍청한 수성 계획과 똑같은 우를 범한 거다.”
카론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메이켄 남작 저택이 습격을 받은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이층을 지키고자 기사들을 전부 집결시켜 모은 것은 그 자신의 판단이었다. 때문에 입지 않았어도 될 피해가 쌓여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꾸물대지 말고 내려가서 부상자들을 도와!”
시온의 일갈에 찔끔한 기사들이 카론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해.”
카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간부급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우르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미안하다. 그건 분명히 내 실수야.”
잠시 후, 카론이 사과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그래. 그 말이 맞아.”
“메이켄 남작은?”
“미리엔 아가씨와 함께 방으로 모셨다. 메이슨이 같이 있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시온이 남작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온!”
네글리제 위에 얇은 외투를 걸친 미리엔이 달려왔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것을 보니 불안에 떨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온이 그녀의 머리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별일 없었나?”
“여기야 별일 없었네만, 어떻게 되었는가?”
시온의 말은 메이켄 남작이 대신 받았다. 그는 살짝 경직된 얼굴이긴 해도 침착했다.
카론이 얼른 대답했다.
“침입했던 어쌔신은 처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불찰로 인해 하인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저런……. 서둘러 부상자들을 신전으로 보내서 치료를 받도록― 아니, 신관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론이 고개를 숙인 뒤 부관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후속 처리를 위해 부단장 오리온과 몇몇 간부들이 영주의 침실을 나갔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오늘 밤은 기사들을 시켜 밤새 교대로 순찰을 돌게 하겠습니다. 영주님과 아가씨께서는 이만 침소에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닐세, 카론 경. 이런 상황에 어찌 잠이 오겠는가? 나도 나가서 처리를 거들도록 하겠네.”
“저도요.”
메이켄 남작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자 미리엔도 덩달아 나섰다.
“아, 안 됩니다. 영주님. 그런 일은 그냥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카론 경.”
“예, 옙!”
“내려가세.”
“……예.”
카론은 마지못해 메이켄 남작과 미리엔을 아래층으로 인도를 했다. 그들을 따라 나온 시온이 메이슨을 봤다.
“메이슨.”
“말씀하십시오, 시온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시온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메이슨은 의아한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일층으로 내려오자 난장판이 된 로비를 포함, 비릿하게 올라오는 피 냄새에 미리엔이 몸을 떨었다.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의 딸로서 검술을 익혔고 다소의 부상 정도는 일상처럼 보아온 그녀다.
하지만 이런 난장판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다친 사람들이 평소 자신을 모시던 하인과 하녀들이 아닌가?
“아아……! 로니! 마리엘! 제시! 괜찮아? 많이 아파?”
미리엔은 옷에 피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하인들을 손수 안아 일으켰다.
부상을 입어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경상에 그친 사람도 많았다. 정신이 있는 사람들은 미리엔이 억지로 일으키려고 하자 고통에 신음했다.
“아가씨, 그렇게 억지로 일으키려고 하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져요.”
“이거 놔요! 아, 이런! 쿠드……!”
보다 못한 기사들이 만류할 때까지 미리엔의 극성은 계속 이어졌다. 경험은 없고 마음만 앞서는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