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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2화)
Chapter 05 영지전의 시작(4)


반면 메이켄 남작은 능숙하게 환자들을 돌보았다. 기사들이 있었지만 다친 하인들에 비해서는 그 수가 많이 부족했다.
지금 이곳에 모인 기사들은 스무 명 정도로 늘 남작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인원들이었다. 나머지는 출퇴근 형식으로 저택을 오가는 자들이었고 사병들도 대부분 그랬다. 사태를 수습할 손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신전에서 신관들이 도착하였다.
이미 야심한 시각이라 모두들 자다 말고 끌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저택에서 있었던 참사에 대하여 들은 신관들은 두말 않고 흔쾌히 달려와 주었다. 그 모습에 시온은 메이켄 남작이 상당한 인덕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론, 잠깐 나 좀 보지.”
시온은 환자를 돌보느라 바쁜 카론을 불러냈다.
“왜 그래?”
“보여줄 것이 있다. 따라와라.”
시온은 처음 어쌔신을 상대했던 테라스 아래로 카론을 데려갔다. 거기엔 시신 한 구와 정신을 잃은 어쌔신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카론은 놀란 듯 헛숨을 삼켰다.
“사로잡았구나.”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이 상처는 뭐지?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관통상을 입힌 거냐?”
“이렇게.”
시온은 풀숲을 향해 손가락을 세우고 오러의 탄환을 발사했다.
핑!
생전 처음 보는 오러의 운용에 카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한 거냐? 방금?”
“이렇게.”
시온이 다시 한 번 오러를 발사해 보였다.
핑!
카론의 입이 더욱 벌어졌다.
“오러를 체외로 분리해서 발출해 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시온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너야말로 이상하군. 오러를 다룰 줄 알면서 이게 안 된다는 건가?”
핑! 핑!
시온의 손가락 끝에서 자그만 오러 탄환이 연속으로 쏘아졌다.
“이 쉬운 게 왜 안 되지?”
핑!
“간단하잖나.”
핑! 핑! 핑!
시온이 의아하여 묻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쏘는 오러의 탄환이 풀숲과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만! 그만햇!”
카론이 황급히 제지하지 않았다면 정원을 초토화시켜 버릴 기세였다.
카론은 시온의 팔을 잡아 멈추게 한 다음, 쓰러져 있는 어쌔신을 가리켰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보다 지금은 이놈을 심문하는 것이 먼저야. 분명 헬리언에서는 시치미를 떼겠지만, 뭔가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건질 수 있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잡아놓고 말하긴 뭐하지만, 일개 어쌔신이 쓸 만한 정보를 알고 있을까?”
“귀족가에서 어쌔신을 키울 리는 없어. 그렇다면 길드와 결탁했다는 뜻인데, 귀족이 어쌔신 길드와 손을 잡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이놈이 어느 길드 소속인지만 알아낼 수 있다면 두 곳을 엮어서 왕궁에 고발할 수 있을 거야.”
“백작가에선 시치미를 뗄 거라며?”
“백작가에서는 그렇겠지. 하지만 길드에서도 그럴까? 놈들은 궁지에 몰리면 망설임 없이 백작가를 팔아먹을 거다. 계약 관계라는 게 어차피 그런 거거든.”
“그렇군. 그 부분은 전적으로 카론 네게 일임하지.”
“그래. 내 밑에 아주 쓸 만한 고문 기술자가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흐흐흐…….”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어쌔신이니 쉽지는 않겠지만 고문사는 또 그런 자들을 상대하는 직업이다. 어느 쪽이 더 유능한가에 따라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밤의 참사 때문에 다들 잠을 못 잤는지 퀭한 얼굴들이었지만, 저택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시온은 어젯밤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신관들을 구경하면서 신성력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목도하였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철철 흐르던 피가 순식간에 멎고 쩍 벌어진 자상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무는 것이 아닌가?
본래라면 아무리 못해도 칠 일은 요양을 해야 하는 상처를 입은 하인들이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말끔히 나아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업무를 시작하는 것이다.
“정말 신기한 곳이로군.”
시온은 좀 더 신성력이란 것에 대해 연구를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헬리언 영지의 선발대가 메이켄 남작령에 도달하는 날이었다.
전날의 습격으로 극히 예민해진 기사들이 비분강개하여 적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무장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말 위에 올라탄 그들이 저마다 긴장된 얼굴로 성 앞에 도열해 서서 카론과 시온을 주시했다.
은빛 갑옷에 투구를 눌러쓰고 거대한 할버드를 움켜쥔 카론의 기세는 실로 사나웠다.
반면 시온은 자신의 슈트 위에 이곳 사람들이 입는 평범한 천 옷 한 장을 걸치고 있을 뿐으로 두 사람의 모습은 차이가 컸다.
카론이 먼저 길고 장황한 출정식을 진행했다. 뭐 대단한 싸움이라고 의식씩이나 치르는지 시온은 영 못마땅했지만, 그것이 기사의 예의라니 어쩔 수 없었다.
투지를 일깨우는 카론의 명예로운 다짐에 기사들이 한차례 함성으로 보답한 뒤, 시온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너도 한마디 해라, 시온.”
“내가 왜?”
“다들 네 힘을 믿고 있다. 훈련을 지휘하고 계획을 세운 것도 바로 너잖아. 한마디쯤 보태 주면 사기 진작에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런가? 그럼 그러지.”
시온이 앞으로 나섰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온의 눈과 입으로 쏠렸다.
“알다시피 난 말주변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짧게 하겠다.”
시온은 천천히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메이켄 영지의 기사들은 모두가 정예였다.
잘 벼린 칼날 같은 기세로 각을 잡고 대열해 있는 그들의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위축됨이 있었다.
“어젯밤, 나는 카론 단장과 굳은 약속을 했다. 오늘 싸움에 승리하면 나중에 카론 단장이 크게 한턱을 내기로 말이다. 얼마든지 먹고 마셔도 된다고 한다. 혹시 불참하고 싶은 사람 있나?”
“…….”
기사들 사이에 깊은 침묵이 자리했다.
“뭐, 뭣이라……!”
카론도 말문이 막혔다.
“우와아아아아아!”
카론이 황급히 손을 내저어 시온의 말을 정정하기도 전에, 기사들 사이에서는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입니까? 단장님!”
“메이켄 역사상 처음 일 아닙니까! 짠돌이 단장님께서 한턱을 내다니!”
“이거 못 얻어먹으면 억울해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에쉬아 님께 맹세코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기사들이 광적으로 흥분했다.
사기는 극도로 올라갔고, 흥분하여 벌겋게 달아오른 기사들의 얼굴을 마주보며 카론은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한턱 내마.”
함성은 더욱 커졌다.
시온은 카론의 원망스런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말 궁둥이를 찼다.
히히히힝!
말이 한 차례 힘차게 울고는 발굽으로 땅을 차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은빛 물결이 그 뒤를 밀물처럼 따랐다.



Chapter 06 한 번 해볼까?(1)


메이켄 남작령의 초입은 시온이 처음 발견된 곳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길게 난 관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풀숲이 우거져 있고, 조금 더 가면 골짜기와 강이 나온다.
시온이 주목한 곳은 바로 이 골짜기였다.
관로가 이어지지만 길이 좁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매복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뜻. 저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조심하겠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시온이 볼 때 이 세계의 기사들은 전략과 전술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희박했다.
기사들은 싸움에 임할 때 수적 우위나 승산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저 돌진하여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장렬히 죽는 것을 대단한 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시온이 보기에 그런 건 굉장한 바보짓이었다.
조금만 머리를 쓰면 이길 수 있는 싸움에 허례허식은 필요가 없다. 훈련을 지휘하는 동안 시온은 기사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주입시켰다.
“저기 오는군.”
시온이 먼 곳을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메이켄의 기사들 중 누구도 다가오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보통 사람에 비해 시력이 월등한 시온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수는 대략 삼백 명에 기마병이 열 명… 함정을 확인하러 보낸 놈들이군.’
선발대는 멀리서 좌우로 쫙 갈라지더니, 백 명씩 나뉘어 골짜기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골짜기 위에 투척물이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시온과 기사들은 그들이 투척물이 없음을 확인하고 내려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관찰했다.
시온을 위시한 메이켄의 기사들은 골짜기 요소요소에 잘 숨어 있었다. 일찌감치 와서 철저하게 지형을 분석한 결과였다.
시온은 그들이 골짜기 위로 경계병을 몇 명 남겨두지 않을까 우려하였지만 기우였다. 어설프게 얼쩡거리다가 메이켄 영지군에게 발각당할 것을 우려한 듯, 그들은 전 병력을 모두 회수해서 돌아갔다.
전군이 썰물처럼 빨려나간 골짜기 위로 시온과 기사들이 올라갔다. 그리고 다 같이 힘을 합쳐 바닥에 묻어둔 바윗덩어리들을 뽑아내어 설치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중노동이었으나, 인간 같지 않은 괴력을 발휘하는 시온의 존재 덕에 작업은 무척이나 수월하게 끝났다.
“자. 이제 무대는 갖춰졌다.”
“크큭. 그래. 말 잘했다, 시온. 그 빌어먹을 헬리언 놈들에게 화끈한 환영식을 해 주자고!”
쿵! 쿵! 쿵!
그에 화답하듯 기사들이 발을 구르자, 지평선 너머까지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했다.

한편.
헬리언 영지군의 선두에 선 헬리언 백작은 원인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군. 너무 조용해. 슬슬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멀리 메이켄 영지로 진입하는 골짜기가 보이자 그는 말을 멈춰 세웠다.
척후로 보냈던 선발대가 회군하고 있었다.
기마병 열 명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더니 말에서 내려 헬리언 백작의 발아래 부복했다.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중간에 누군가와 마주치지는 않았느냐?”
“예, 영주님.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입니다.”
“샅샅이 뒤져본 것이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역시 성문을 닫아걸고 수성전을 벌일 생각인가 보군.”
헬리언 백작이 웃었다.
“큭큭. 뭐가 기사 가문이냐. 기사답게 싸울 줄도 모르는 것들이. 진군하라!”
헬리언 백작은 방심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비단 처음이 아니었던 탓이다.
수차례의 영지전을 치렀지만 헬리언 영지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려 한 영지는 없었다. 대부분 수성으로 응수를 하려 했고, 그러다가 헬리언 영지군의 ‘모종의 수’에 패하여 무릎을 꿇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는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전투에 임할 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망각하고 말았다.
화려한 깃발과 치장을 단 말과 그 등에 오른 헬리언 백작을 필두로 천 명에 달하는 대군이 천천히 골짜기 초입에 들었다.

“어리석은 것들.”
헬리언 영지군이 자리도 확보하지 않고 당당하게 골짜기를 지나는 모습을 보며 시온은 조소를 머금었다.
시온과 메이켄의 기사들은 골짜기 위에 서 있었다. 발아래 펼쳐진 절벽 사이로 헬리언 영지군이 지나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시온이 말했다.
“놈들의 선두가 절벽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바위를 굴려 허리를 끊는다. 카론에게도 신호해서 알려라.”
“예, 시온 님.”
그를 보좌하는 부단장 오리온이 재빨리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기사가 깃발을 흔들자, 절벽 너머 반대편에서도 같은 색깔의 기를 흔들어 화답했다.
헬리언 영지군은 무방비한 모습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 있는 수십의 시선들이 그들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 발걸음 하나까지 세세하게 좇으며 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