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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3화)
Chapter 06 한 번 해볼까?(2)
“영주님,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냐?”
잡생각에 빠져 있던 헬리언 백작은 상념을 깨는 부관의 목소리를 성가시다는 듯 받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기사 페로스는 기죽은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너무 조용합니다.”
“그야 우리들밖에 없으니 조용한 것이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 동물들 말입니다. 계곡을 벗어나면 곧 숲입니다. 그런데 새나 동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 듣고 보니 그렇군.”
막 계곡을 빠져 나온 헬리언 백작은 그제야 뒤쫓아 오는 자신의 병사들을 돌아봤다.
선발대가 이미 계곡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계곡 안에 진입하여 있는 지금 상황이야말로 기습을 당한다면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기감을 느낀 헬리언 백작이 뭔가를 명령하려던 찰나, 저만치 뒤쪽에서 자욱한 모래 먼지가 일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끄아아아악!”
“뭐냐!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매복! 매복입니다! 바위가!”
“비, 비켜! 비켜랏. 아아악!”
“악!”
말 위에 올라앉아 있던 헬리언 백작은 볼 수 있었다.
절벽 위에서 수도 없이 굴러 떨어지는 육중한 크기의 바윗덩어리들을.
그에 깔려 압사하는 부하들의 처참한 죽음을!
“비키란 말이야!”
바윗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리자 병사들 사이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계곡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고 하면서 아우성을 쳤다.
그 와중에 깔려 죽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넘어지면서 날카로운 돌부리에 찍혀 부상을 입는 자들도 속출했다.
“모두 진정해라!”
헬리언 백작과 함께 무리의 선두로 계곡을 빠져나왔던 기사들이 아비규환 속으로 황급히 몸을 날렸다.
기사들 개개인이 모두 소드 익스퍼트 급의 검사였다. 그들이 뿜어낸 색색의 오러가 떨어져 내리는 바위들을 양단해 버림은 물론, 난폭하게 아우성치는 일부 병사들의 목까지 일거에 잘라 버렸다.
촤아아아아악!
여기저기서 피 분수가 솟구쳐 올랐다.
비명은 물론 소란마저 침묵시키는 압도적인 무위.
눈 깜짝할 새 사태를 정리해 버린 기사들의 신위에 완전히 겁먹은 사병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기사들이 소리쳤다.
“대열을 갖추고 자리를 지켜라. 명령을 어기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항명죄로 다스릴 것이다!”
시범으로 사병 몇의 목을 자른 것은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한 사병들이 공포에 잠식되어 기사들의 통제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들! 계곡을 올라라. 놈들을 처참하게 도륙을 내버려!”
헬리언 백작이 소리쳤다.
“나머지는 어서 계곡에서 나와라. 부관들은 피해 상황 점검해서 보고해!”
기사들이 개입하면서부터 더 이상 바위는 떨어지지 않았기에, 헬리언 영지의 사병들은 허겁지겁 계곡을 빠져나왔다.
헬리언 백작의 앞에 도열한 병사들이 황급히 상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본대에서 칠십 명 정도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선발대와 후발대는 전원 무사합니다!”
헬리언 영지군은 선발대 삼백, 본대 사백, 후발대 이백의 편성이었다. 선발대는 이미 계곡을 빠져나왔고 후발대는 막 계곡에 진입하려던 참이었으니, 본대 쪽에 피해가 고스란히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 본대가 보급 부대라는 데 있었다. 식량을 실은 수레와 그를 지키는 병사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젠장……. 할 수 없지. 식량은 현지에서 조달한다. 기사들이 돌아오는 대로 진군할 것이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대기하도록.”
“충!”
부관이 땅을 울리며 경례를 취했다.
“온다.”
시온과 메이켄의 기사들은 몸을 낮춘 채로 적의 기마대를 노려봤다.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백여 구의 기마.
반면 오십 기의 메이켄 기병은 그나마 양쪽으로 스물다섯 명씩 분산되어 있는 상황. 아무리 분전해도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지켰다.
두두두두두!
“지금이다. 당겨!”
때를 가늠하던 시온은 기마들이 지척에 이르자 힘껏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땅속에 몸을 묻고 있던 두 명의 메이켄 기사가 일어나 밧줄을 세우고 바위에 묶었다.
그 결과는 처참 그 자체.
“으, 기아아아악!”
다리에 밧줄이 걸린 말들이 속절없이 고꾸라지면서, 거대한 관성이 선두열의 기사들을 확 잡아당겼다.
전력 질주를 하던 도중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여과 없이 배가되었다.
털썩! 빠지직!!
순식간에 말 등에서 날아간 기사들 수십이 바닥을 구르면서 목이 부러졌다. 일부는 능숙하게 오러를 전개하여 바닥을 딛고 서기도 하였지만, 눈 깜짝할 새 죽은 기사의 수가 십여 명을 헤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뒤따라오던 기마가 쓰러진 선두의 말에 걸려 서로 뒤엉키며 넘어졌다. 선두가 휘청하는 순간 대다수는 기수를 돌려 무사하였지만, 그 찰나를 놓친 일부는 또다시 허공을 날거나 바닥을 구르며 처참한 시체로 변했다.
으드득!
살아남은 헬리언의 기사들이 이를 갈며 태세를 정비했다.
단 일수에 스무 명이 넘는 정예 기사가 죽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아직도 팔십이라는 숫자가 남아 있었다. 헬리언 백작의 명령대로 저들을 도륙 내고 돌아가기엔 충분할 정도의 숫자였다.
“죽여 버려!”
선두를 고꾸라뜨린 밧줄을 끊어낸 한 기사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하나, 헬리언의 기사들은 그 누구도 적을 향해 돌격할 수 없었다.
두두두!!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이십여 구의 군마!
등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말이었다.
메이켄의 기사들이 저마다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겨 헬리언의 기사들에게로 달려 보낸 것이다.
철갑을 두른 건마였고 그 속도가 빨라 충돌하면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사람도 아니고 고작 돌진하는 말 따위에 겁먹을 기사들이 아니었다.
“쳐랏!”
제각기 무기를 꼬나 쥐고 오러 블레이드를 흩뿌리며 말들을 처리해 나갔다.
잘 훈련된 군마는 꽤 값나가는 자산이기에 보통 때라면 어떻게든 포획을 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을 향해 창칼을 휘두르는 기사들의 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촤아아악!
뿌히히히힝!
말들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금세 마지막 말이 반쯤 목이 잘려 뼈를 드러낸 채로 쓰러지자, 이번에야말로 돌격하기 위해 기사들은 말고삐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러나 그땐 이미 메이켄의 기사들이 절벽을 향해 몸을 날린 뒤였다.
“이, 이런!”
헬리언 기사들은 아연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오러를 능숙하게 전개하는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에게 있어 절벽을 내려가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저들은 현재 중갑옷조차 갖춰 입지 않은 상태.
그제야 메이켄 기사들이 말을 희생시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튀어나온 돌부리 요소요소에 발을 딛고 능숙하게 달려 내려가는 그들에 비해 완전군장에 말까지 탄 헬리언의 기사들은 돌아서 내려가야 했다. 아무리 못해도 5분은 걸리는 거리다.
그렇다면 그 5분을 저들은 어떻게 이용할까?
답은 일목요연.
메이켄 기사들은 단 일 각의 유예도 없이 헬리언 영지군 후발대를 덮쳤다.
상황을 주시하던 카론과 반대편 골짜기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 역시 때를 맞춰 절벽을 내려온 참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앞세운 메이켄 기사들의 돌진에 사병들의 목이 속수무책으로 잘려 나갔다.
그것은 학살.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학살에 다름 아니었다.
“크아악!”
“뭐해 새끼들아! 어서 창을 들어! 막아야 한다!”
“방진 유지해! 방진 유지햇!”
여기저기서 장교들의 고함이 터지고 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체계적인 대응이 이루어졌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일렬도 펼쳐져 대응하려는 군진 사이로 오러 블레이드가 휩쓸고 지나가자 비린내 나는 혈선만이 남았다.
달리 참군(斬軍) 기사단이 아닌 것이다.
전쟁터에서의 5분.
헬리언의 기사들이 오기까지 5분.
그 별것 아닌 짧은 시간. 메이켄의 기사들은 후발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소드 익스퍼트 급 기사와 일개 사병의 차이는 일당백과 같다더니, 메이켄 기사들에겐 오히려 그 말이 부족한 감이 있었다.
“후퇴! 후퇴하라!”
시온은 멀리서 헬리언의 기사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압도적인 공세로 상대를 몰아붙여 가던 와중이었음에도 기사들은 일말의 주저 없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시온의 뒤를 따랐다.
지금의 승기는 어차피 저들의 주력과 맞부딪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
같은 기사들끼리 붙기 시작하면 오래지 않아 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메이켄의 기사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쫓아! 당장 저놈들을 잡아서 끌고 왓!”
본대에 가로막혀 후발대가 도륙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헬리언 백작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헬리언의 기사들이 다시 말을 이끌고 골짜기 아래로 돌아왔을 땐 이미 메이켄 기사들은 전원 모습을 감춘 뒤였다.
메이켄의 기사들은 숲으로 숨어들었다.
“이겼다. 대승이다!”
카론과 기사들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두 명의 경상자가 있을 뿐, 메이켄 영지군의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적의 기사 중 스무 명을 잡아내고 후발대를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게다가 이쪽이 실질적으로 움직인 병력은 고작 오십.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성과였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싸운다면 헬리언 영지군을 전멸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시온은 전혀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도 여기까지다. 함정과 기습으로 거둘 수 있는 효과는 이제 다 봤다고 봐야겠지.”
들뜬 분위기에 초를 치는 말이었다.
기사들 모두가 숙연해졌다.
그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들에겐 아직도 아군이 초라해 보일 만큼의 대군이 남아 있고, 기사들의 전력도 예봉이 꺾여 나갔을 뿐, 몸통은 무사하다는 것.
정면으로 맞상대한다면 필패를 면할 수 없는 전력의 차가 아직도 굳건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지금부터가 실전이라고 생각해라. 훈련했던 것들만 잊지 않으면 된다. 알겠나?”
“…….”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무기를 힘 있게 움켜쥔 그들이 숲 속에서 빠르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