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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4화)
Chapter 06 한 번 해볼까?(3)


“이런 빌어먹을!”
헬리언 백작이 분통을 터뜨리며 기사들을 걷어찼다.
손도 못 써보고 수백의 병력들을 잃은 헬리언 백작의 심정은 폭발 일보직전이었다. 그의 발치엔 이미 화풀이의 희생양이 된 척후대의 책임자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구르고 있었다.
“기사란 자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유인책을 써? 어찌 이리도 비겁하단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메이켄 남작가는 기사의 명가다. 참군 기사단에 속한 자들 중 정예 아닌 자 없고 왕성에 올라가면 황궁 기사단도 한 수 접어주는 것이 바로 참군 기사단이었다.
그런 자들이 설마 비겁하게 등을 보이고 도망을 칠 줄 누가 알았던가!
하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헬리언 기사단이 계곡 위로 올라가 있을 때, 그의 사병들은 참군 기사단 오십에 그야말로 무참히 쓸렸다.
그때 그들이 후발대가 있는 곳이 아니라 지금 헬리언 백작 자신이 서 있는 선발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면?
그랬다면 분명 이처럼 무사히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말로만 듣던 명가의 검술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헬리언의 기사들에게 맡긴다 해도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괘씸한 놈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나는 헬리언 백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자체가 분했다. 왜 이기는 싸움에 임하면서 적에게 두려움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지는 싸움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다. 이런 굴욕적인 두려움을 안긴 메이켄 놈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냐? 이 정도 저항쯤은 예상했던 바가 아니냐? 어서 진군들 계속해!”
헬리언 백작의 호된 일갈에 찔끔 놀란 군세가 다시금 이동을 재개했다. 병사들의 표정에도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저나 기사들이 죽다니…….’
헬리언 백작은 기사 스물이 함정에 걸려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기가 막혔지만 그들을 치죄하지는 않았다. 기사들을 절벽 위로 올라가도록 지시한 게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임 소재는 둘째치고 소드 익스퍼트 급의 부하들을 스무 명이나 잃은 것은 끔찍한 손실이었다. 이걸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앞이 막막해졌다.
그러던 중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영주님, 놈들입니다!”
관로를 따라 정직하게 숲길로 진군하고 있던 헬리언 영지군이었다.
숲 속에서 크로스보우를 든 메이켄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우왕좌왕 서 있는 영지군을 향해 강궁 세례를 퍼부었다.
쉬쉬쉬쉭……!
사병들이 앞으로 나서며 방패를 세웠다. 그렇지만 어딜 가나 눈먼 화살에 맞는 불운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아아아아악!”
히히힝!
화살에 허벅지와 팔을 뚫린 사병들 몇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기사들이 타고 있는 일부 말들이 놀라 발버둥을 쳤다.
“워! 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헬리언의 군사들이 안간힘을 쓰는 사이, 교활하게도 한 발씩 화살을 날린 메이켄 기사들은 그대로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뿌드득!
헬리언 백작이 이를 갈았다.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들이 감히……!”
그때였다. 풀숲 사이로 한 사내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헬리언 백작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시릴 정도로 선명한 금색의 눈동자.
“저, 저놈은!”
기억에 있는 자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감히 백작인 자신을 두들겨 패 바닥에 엎드려 구토하게 만든 그 빌어먹을 자의 얼굴을!
바로 시온이었다.
씨익.
그가 볼을 비틀어 웃는다.
시온은 매우 거만한 자세로 손가락을 까딱까딱 하더니, 그대로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디 와 보라는 것이다.
그 모습에 헬리언 백작은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기사들! 풀숲을 샅샅이 뒤져라. 못 찾으면 불을 놓는 한이 있어도 저놈만은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 버려!”
“충!”
헬리언의 기사들 중 백작을 지킬 스무 명이 남고 나머지 육십 명이 말에서 내려 풀숲으로 진입했다.

“놈들이 온다.”
풀숲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시온과 카론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이 지척에 숨어 있는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기사들이 근처의 동료들에게 다시 수신호를 보내는 식으로, 신호의 전파는 물결처럼 퍼져 갔다.
사라락. 사라락.
헬리언의 기사들이 풀과 나뭇가지를 밟고 접근해 오는 것을 오감으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메이켄을 만만히 보고 방심하였던 저들이지만, 이제는 극도의 긴장감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더 이상 기습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슥.
시온이 근처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주변을 수색하는 헬리언 기사 하나의 뒤통수를 노리고 던졌다.
땅!
돌멩이가 투구를 때리자 철기를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조금 거리를 두고 분산되어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 순간, 메이켄 기사들이 풀숲에서 뛰쳐나왔다.
“습격이다!”
굳이 누군가 소리칠 것도 없었다.
움직임이 느껴진 순간, 헬리언의 기사들은 무기의 방향을 돌려 기다렸다는 듯이 메이켄 기사들과 격돌했다.
검과 검이, 창과 창이 맞부딪치며 둔탁한 파열음이 작렬한다.
순식간에 숲 속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그 안에서 시온의 활약은 단연 발군이었다.
나무가 많고 공간이 협소한 숲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시온은 극한까지 이용했다.
검극을 사용하는 기사들과는 달리 시온은 맨주먹. 아무리 오러를 다루는 기사라고 해도 다람쥐처럼 나무 사이사이를 누비는 시온을 어쩌지는 못했다.
텅! 따다당!
반면 시온은 일격을 내지를 때마다 한 명씩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철갑옷을 움푹 찌그러뜨리는 그의 주먹은 헬리언의 기사들 사이에 공포를 전염시켰다.
기사들이 저마다 상대를 찾아 몇 합 정도 공수를 교환하였을 무렵, 카론이 소리쳤다.
“후퇴하라! 모두 후퇴!”
외침을 알아들은 메이켄 기사들은 각자 상대하던 적을 내버려 두고 숲 외곽을 향해 전력으로 달아났다.
너무도 급작스런 도주에 헬리언의 기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서랏!”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헬리언의 기사들이 노호성을 지르며 뒤쫓았다. 하지만 무거운 철갑주를 갖춰 입은 그들이 경갑주의 메이켄 기사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메이켄 기사들을 모두 놓친 그들은 허탈하게 본대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뭐야? 전부 놓쳐?”
헬리언 백작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기사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놈들이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영주님.”
“아니, 기사란 자들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할 말이 없기는 헬리언의 기사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늘 이름을 대고 정당하게 돌진만 해온 그들에게 이런 식의 전략은 너무도 생소하고 당황스런 것이었다. 어떻게 기사가 전장에서 도주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한탄을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피해는 계속 누적되고 있다. 어떻게든 대처를 해내지 못하면 메이켄 성에 당도하기도 전에 모두 당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기사들 중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전원 무사합니다.”
“좋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헬리언 백작은 기사들 이십을 추려 사병 백 명과 함께 전방과 좌우방을 샅샅이 수색하도록 했다.
척후의 허술함으로 한 차례 쓴맛을 보았으니 더 이상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로써 안심할 수 있었던 것도 아주 잠시였다.
요소요소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치고 빠지는 메이켄 기사들의 기습에 척후대는 오래지 않아 큰 피해를 입었다.
기사가 스무 명이나 지키고 있었지만 유일한 강점이었던 수적 우위가 사라지자 헬리언의 기사들은 메이켄 기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척후대마저 회군시킨 헬리언 백작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야영지를 정해서 잠을 자는 것도, 어디 한군데 앉아서 밥을 지어 먹는 것도 불가능했다. 매 순간순간 기습에 대비하느라 혀가 바짝 타고 몸이 들썩거렸다.
시온이 의도한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함으로써 그들을 임전 상태로 만들어 체력을 깎아가는 것.
잠깐이면 모를까, 그 상태가 열 시간이 넘게 이어지면 인간의 정신은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때 생길 수 있는 판단력의 상실. 생각의 빈틈. 그것을 노릴 수만 있다면 이 싸움은 메이켄의 승리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헬리언 영지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메이켄의 기사들이 주위를 배회하며 끊임없이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에 맞서기 위해 헬리언의 기사들은 아예 중갑주를 모두 벗어던진 상태였다.
밤새 한숨도 잠을 못 잔 사병들의 눈은 시체처럼 퀭했다. 밤새 죽어나간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하도 당하다 보니 헬리언 백작의 얼굴에는 짜증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부관 페로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주님.”
“뭐냐?”
“아무래도 회군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싸움은 우리에게 너무 불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많은 수로 그깟 오십 명을 못 당해내고 돌아간다는 게 말이나 돼!”
“여긴 저들의 영지이고 우린 수세에 몰렸습니다. 이대론 메이켄 성까지 무사히 당도한다고 해도 수성전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돌아가서 정비를 하고 다시 출진하는 쪽이.”
“쓸데없는 소리 마라. 설령 그렇다 해도 이쪽엔 아직 저들의 두 배에 가까운 기사들이 있다. 싸울 수 있는데도 후퇴했다간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거야.”
“하오나!”
헬리언 백작이 기사 페로스를 노려보았다.
“페로스 경.”
“예.”
“경은 늘 생각을 하지.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기사로서 전장에 선 지금은 몸 사릴 궁리하기보단 그 빌어먹을 할버드와 방패로 어떻게든 적을 물리칠 생각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알아듣겠나?”
“……예.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페로스는 결국 기가 죽어서 기사 대열로 돌아갔다.
헬리언 백작은 이대로 후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체면도 체면이지만 그는 이번 싸움에서 이기고 미리엔을 잡아다 자신의 후처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간의 기다림이 길었기 때문에 더는 조금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결국 이 싸움은 그의 사랑을 위한 전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으드득!
“시온이라고 했겠다. 두고 보자. 미리엔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녀가 보는 앞에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말 테니까.”
광기가 내비치는 헬리언 백작의 충혈된 두 눈이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