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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5화)
Chapter 06 한 번 해볼까?(4)


시온이 말했다.
“슬슬 때가 된 것 같군.”
그는 헬리언 영지군이 점으로 보일 만큼 먼 곳에서 헬리언 백작의 중얼거림을 전부 듣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청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다들 무기 들 힘은 남아 있나?”
“물론입니다. 피곤하긴 하지만 이런 피로는 오히려 반갑죠!”
“어서 헬리언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부단장 오리온과 기사들이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들은 연이은 선전에 잔뜩 고무되어 있는 상태였다. 안 그래도 역량이 뛰어난 기사들이 사기까지 올라가자 그 기세가 사뭇 대단했다.
시온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기회를 주지. 다들 준비해라.”
척!
기사들이 발을 구르며 검극을 고쳐 쥐었다.

아직 관로를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날이 저물고 있었다.
“놈들입니다!”
병사 하나가 소리치자 헬리언 영지군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영주와 기사들의 앞이라 감히 자리를 이탈하거나 경거망동하는 자는 없었으나, 사병들의 만면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헬리언 백작은 한 손을 들어 행렬을 정지시켰다.
“…….”
길목을 가로막고 선 메이켄의 기사들.
그들이 깔보듯 오연히 서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새로 준비한 군마에 올라 할버드를 겨눈 그들의 기세는 실로 매섭다.
그러나 헬리언 백작은 기죽지 않았다.
그들에게 당한 것이 쌓이고 쌓여 이미 공포심을 지워낸 지 오래다.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와 증오뿐이었다.
“기사들. 놈들을 죽이고 와라.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남김없이 베어버려라. 놈들을 전멸시키기 전엔 돌아올 생각은 버려라.”
“충!”
헬리언의 기사들이 말을 걷어차 돌진해 나갔다.
동시에 메이켄 기사들도 마주 달려왔다.
헬리언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정면으로 격돌할 수만 있다면 헬리언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저들이 그대로 움직여 줄지는 아직 미지수인 상황.
수백 쌍의 눈동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사들이 맞붙었다.
챠아앙! 차강!
창창! 챙챙챙!
여기저기서 검광이 번득이고 불꽃이 튀었다.
양측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뒤섞이면서 살벌하게 격돌했다.
맨 무기로 첫 수를 겨루고,
부우우웅!
그다음부터는 소드 익스퍼트의 기사들답게 오러 블레이드가 발출되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난무하는 전장!
결코 쉽게 보기 힘든 진기한 광경에 사병들은 물론 헬리언 백작까지도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심에 서서 싸우던 카론이 우렁찬 고함을 지르자 메이켄 기사들은 재빨리 한곳으로 길을 뚫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아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여긴 관로다. 숲과는 다르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싸우다 달아나는 적을 마상의 기사들이 놓칠 리는 없었다. 헬리언의 기사들은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들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메이켄 기사들은 도망을 치다가 갑자기 뒤돌아서 기습하는 식으로 몇 차례 더 접전을 벌였다. 그러던 끝에 헬리언의 기사들을 몰고 영지군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유인책이었다. 그렇지만 피로와 분노에 찌든 흥분된 머리로 그것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사들 전원이 먼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에야 헬리언 백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이 습격해 온다면?’
불길한 예감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기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관로 저편에 다시금 다섯 명의 메이켄 기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섯 명.
고작 다섯 명.
별것 아닌 숫자 같아도 이게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인 병장기로는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사병들만으로 상대하려면 오로지 쪽수로 완전히 덮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일당백이란 말은 다소 과한 감이 있지만, 완전무장한 소드 익스퍼트 하나를 잡기 위해선 최소 사병들 이삼십 명은 죽어나갈 각오를 해야 했다.
“제길…….”
하지만, 괜찮다.
이쪽엔 아직 육백이 넘는 사병들이 있다.
비록 밤새 시달리느라 그 수가 줄고 지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헬리언 백작을 중심으로 사병들이 둥글게 원진을 짰다.
“영주님, 물러서십시오.”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사병대장의 말에 따라 헬리언 백작은 얌전히 그들의 뒤로 가 몸을 숨겼다.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인 그가 가세를 하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이런 싸움에 영주가 직접 뛰어들었다가 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수습 불가능해 지기에 일찌감치 몸을 뺀 것이다.
헬리언 백작이 소리쳤다.
“기사들이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놈들을 막아라!”
메이켄의 기사들 다섯이 목을 우두둑 꺾으며 다가왔다. 잘 벼린 칼 같은 기세의 다섯 기사.
형형히 발광하는 오러 블레이드!
긴장한 헬리언 영지군이 각자의 병장기를 있는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내,
싸움이 시작되었다.
쓰긍― 팟! 스팟!
스파팟!
“카아아악!”
“으악!”
그것은 차라리 학살이라고 해도 좋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하고 순식간에 피 분수가 비산한다. 먼저 달려들면 죽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병사들은 다섯 기사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메이켄의 다섯 기사는 순식간에 헬리언 영지군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종횡무진 휘두르며 지나는 곳마다 여지없이 피바다를 만들었다.
시체의 수가 삼십 구를 넘어가자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은 누구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메이켄의 기사들은 완전히 포위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등을 맞댄 채 거칠게 도발했다.
“어떠냐, 헬리언의 개새끼들아. 이것이 메이켄의 검이다!”
“하하하하! 어서 덤벼라! 덤벼!”
빠드득!
그 모습을 지켜보는 헬리언 백작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기사단이 받치고 있을 땐 꽁지 빠져라 도망이나 다니던 주제에 잔챙이들을 상대하며 자신을 모욕하다니!
“이놈들. 어서 저 잡것들을 해치우지 않고 무엇 하는 거냐! 놈들은 다섯이다. 고작 다섯이란 말이다. 몸으로 덮고 난도질하면 이길 수 있어!”
헬리언 백작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주춤주춤 물러서는 병사들 두엇을 베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나머지 병사들은 감히 물러서지 못하고 다섯 기사를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헬리언 백작은 정확히 그 부분까지가 시온이 의도한 바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헬리언 백작의 주위를 지키던 호위병들마저 기사들을 제압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순간,
척.
뒷덜미에 와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헬리언 백작은 숨을 삼키며 돌아보려 하였으나, 뒤통수를 잡는 손에 의해 제지당했다.
“뭐, 뭐냐?”
“움직이면 죽는다.”
대체 언제? 어느 틈에?
그런 의문을 제기할 틈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두 다리를 걷어차여 무릎을 꿇은 헬리언 백작은 어깨를 긁고 지나가는 화끈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팟! 핏줄기가 솟구친다.
그의 어깨를 벤 시온이 헬리언 백작의 목을 팔로 감은 채 피 묻은 대거를 들어 보였다.
“영주를 살리고 싶은 놈은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지금부터 셋을 세겠다. 한 놈이라도 무기를 들고 있으면 이걸로 영주의 온몸에 애플파이 무늬를 새길 것이다.”
“……빌어먹을 잡놈이 감히!”
노호한 헬리언 백작이 팔꿈치에 오러를 실어 시온의 복부를 가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시온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이자,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흐려지면서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꺼걱…… 컥!”
“영주님!”
질식하여 얼굴빛이 하얘지는 헬리언 백작의 모습에 헬리언 영지군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시온은 헬리언 백작이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팔을 풀어 주었다.
시온이 수를 셌다.
“하나.”
“동요할 필요 없다! 영지전에서 상대 영주를 죽이는 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이놈은 절대로 날 어쩌지 못한다. 상관 말고 공격해! ……까악!”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헬리언 백작은 다시금 시온에 의해 강제적으로 입을 닫았다. 시온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네놈의 눈엔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으로 보이던가?”
“끅……! 허세부리지마라. 일국의 백작을 죽이면 국법에 따라 네놈의 구족까지 처형돼. 네놈이 아무리 배짱이 대단해도 미치지 않은 이상 과연 내 목을 꺾을 수 있을까?”
시온은 그와 눈을 마주하고 씩 웃었다.
“한 번 해 볼까?”
“…….”
헬리언 백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온의 섬뜩한 웃음이 그의 뇌리에 깊은 공포심을 새겼다. 허세냐 진심이냐를 가늠할 여지도 없이 시온의 눈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말을 한마디만 잘못해도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헬리언 백작은 확신하였다.
“둘.”
“……무기를 버리고 물러서라.”
헬리언 백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쩔그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마치 헬리언 백작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오직 다섯 명의 기사와 시온, 그리고 헬리언 백작만이 서 있을 뿐.
수백 명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린 그 모습은 그들끼리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장관이었다.
“이 싸움은 메이켄의 승리다. 너희 헬리언 놈들은 메이켄 영지를 짓밟고 미리엔을 빼앗으려 시도한 것에 대한 사죄와 대가를 메이켄 영지에 줘야 할 것이다.”
“…….”
“안 됐군. 날 찢어죽이지 못해서.”
헬리언 백작이 힘없이 목을 늘어뜨렸다.
다섯 기사가 달려와 그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고 팔다리에 구속구를 채웠다. 기사들의 손은 흥분에 의해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시온이 먼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훗. 이제야 오는군.”
때마침 헬리언의 기사들을 유인해 갔던 메이켄 기사들이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