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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6화)
Chapter 07 빚은 갚았으니까(1)


메이켄 기사들과 함께 돌아온 헬리언의 기사들은 시온의 손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들의 영주를 보자 두 말 없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했다.
적당한 지점까지 그들을 유인해 간 카론이 사정을 설명하고 피차 인명 피해 없이 돌아온 것이다.
그들을 모두 구속한 메이켄의 기사들이 헬리언 백작을 선두에 세워 성으로 돌아오자, 메이켄 남작을 비롯한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환호를 보냈다.
단 기사 오십으로 천 명을 막아낸 것이다. 이 엄청난 성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속구에 꽁꽁 묶인 채 카론의 말 등에 얹혀 가던 헬리언 백작이 표독스런 눈으로 시온을 노려봤다.
“하나만 묻자.”
“듣고 있다.”
“넌 대체 뭐냐.”
“시온.”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
시온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헬리언 백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헬리언 백작은 움찔하였으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네놈이 나타나서 일이 이렇게 됐다. 만나는 족족 내 일을 방해해대는 네놈의 정체가 대체 뭐란 말이냐!”
“알 거 없다. 하는 일이 족족 실패한 이유는 네놈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뭐라고?”
헬리언 백작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껏 그의 면전에서 이토록 무심하고 거만하게 대답을 한 상대는 없었다. 설령 라도네스 국왕이라 할지라도 백작인 그에게는 존중을 갖추어 대우를 했다.
헌데 이런 태도라니!
“시온.”
“뭐냐.”
“네 이름을 기억해두마.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해라.”
“너야말로 기대해라. 나와 또 적으로 만나게 되면 그땐 진짜 악몽을 선사해 줄 테니까.”
빠득!
헬리언 백작은 이를 갈면서 카론에게 끌려갔다.
그는 한동안 저택의 모처에 연금되어 있다가 헬리언 가문의 사절이 도착하는 대로 몸값 협상의 재료가 될 것이다.
같은 왕국의 귀족이니 터무니없는 액수를 때려 넣을 수는 없지만, 선전포고를 한 것은 헬리언이기 때문에 메이켄 영지는 거액을 보상받을 수 있을 터였다.
천여 명의 침략군이 사용하던 무구들을 몰수한 것만 하여도 이미 어마어마한 이득이었지만, 그 이상의 막대한 수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온!”
저택으로 돌아오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미리엔이 달려왔다.
작전 중에도 수시로 성과 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세한 사정은 그녀도 들어 알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미리엔의 작고 흰 얼굴엔 미처 숨기지 못한 수심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에게 시온이 말했다.
“다녀왔다, 미리엔.”
“어… 어디 다친 덴 없어?”
“보는 대로.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시온이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공치사는 열심히 싸운 기사들에게 해라.”
살짝 붉어졌던 미리엔의 얼굴이 시온의 무신경한 말에 금세 원래 색을 되찾았다.
미리엔이 치마 끝을 잡고 기사들을 향해 교양 있게 인사를 했다.
“오리온 경. 그리고 기사 분들, 모두 정말 수고하셨어요. 경들은 우리 영지의 영웅들이에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저흰 그저 신나게 싸운 것밖에 없습니다. 머리 쓰는 일은 단장님과 시온님이 다하셨죠!”
“영지를 지킬 수 있어 오히려 영광입니다.”
기사들이 제각기 폼을 잡으며 답례를 했다.
시온은 그들의 내심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해 실소를 머금었다.
메이켄 영지에 소속된 기사들치고 미리엔을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메이켄 남작도 미리엔을 기사들 중 한 명과 짝지어 줄 것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해 왔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미리엔의 신랑 후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선지 그들은 틈만 나면 미리엔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들을 했다.
그때, 남작의 집무실에 갔던 카론이 돌아왔다.
“다들 피곤할 텐데, 우선은 푹 쉬어라. 저녁엔 파티가 있으니까 늦지 말고 참석들 하고.”
“저, 단장님. 내시기로 했던 한턱은?”
“엉? 그건 다음에. 오늘 밤은 파티라잖아.”
기사들이 카론을 양쪽에서 붙들었다.
“저흰 지금부터도 끄떡없습니다!”
“그럴 게 바로 아니라 술집으로 가시죠!”
“시온님도 나중에 합류하십쇼!”
“어, 엇? 왜들 이래?”
어리둥절한 카론이 기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로비를 가득 채웠던 은빛 기사들의 물결이 사라지고 북적대던 저택에는 시온과 미리엔, 그리고 미샤만이 남았다.
“……그렇게 됐으니,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난 이만 갈 테니까 이따 저녁에 보자. 미리엔.”
“자, 잠깐만!”
미리엔이 황급히 시온의 팔을 붙들었다.
“왜?”
“미샤, 그걸 가져 와.”
“네, 아가씨.”
미샤가 못마땅한 얼굴로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물건을 미리엔에게 건넸다. 미리엔은 그것을 다시 시온에게 건넸다.
작은 금팔찌였다.
“줄게.”
“이게 뭐지?”
“보면 몰라? 팔찌야.”
“아니, 그 정도는 보면 안다.”
“내가 만든 거야.”
“뭐?”
“비단실에 사금을 입혀서 만들었어. 비단과 금은 궁합이 좋대. 부와 행운의 상징이야. 사실은 시온이 전장에 나가기 전에 주려고 했는데 하필 완성 직전에 사금이 떨어져서 시간이 걸렸어.”
“흠…… 그렇군.”
시온이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그간 미리엔이 방 안에 틀어박혀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아무래도 이것을 만드느라 그토록 분주했던 모양이었다.
미리엔이 살짝 인상을 썼다.
“안 받을 거야? 나 팔 아파.”
“영문을 모르겠군. 내가 왜 이걸 받아야 하지?”
“그야! 내가 시온 주려고 만들었으니까지.”
“괜찮나? 비싸 보이는데.”
“행운의 상징을 돈과 결부 짓지 말아.”
미리엔이 부루퉁해서 말했다.
시온은 말없이 팔찌를 건네받았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팔찌라기보단 금줄에 가까운 가느다란 물건이었다. 반짝거리는 팔찌를 팔목에 채우자, 몸이 싸― 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뭐지?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후훗. 놀랐지? 신전에서 에쉬아 님의 축복을 받은 거야.”
“그럼 뭐가 달라지나?”
“행운을 안겨주는 것도 있지만 독으로부터 시온을 지켜줄 거야. 만약 주변에서 독이 감지되면 팔찌의 색이 보라색으로 물들거든. 약한 독은 해독도 돼.”
미리엔이 빈약한 가슴을 쓱 내밀며 웃었다. 꽤 공을 들인 물건인 듯했다. 의기양양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고맙다. 분에 넘치는 선물이군.”
“고맙긴 뭘. 나야말로 우리 영지를 위해서 싸워 줘서 고마워, 시온.”
“미리엔, 궁금한 게 있다.”
“뭐, 뭔데?”
“너는 왜 나한테…….”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시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
그것이 내심 궁금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 버리고 나면 왠지 그녀와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골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럴 바에야 그냥 안 듣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시온은 공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이번엔 미처 붙잡을 새가 없어 눈 뜨고 놓쳐 버린 미리엔이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미샤가 말했다.
“오늘도 말을 못하셨네요, 아가씨.”
미리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둔한 것도 그의 매력인걸.”

밤.
메이켄 남작 저택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렸다. 멧돼지를 통째로 잡아서 바비큐를 굽고 값비싼 고급 와인도 여러 병 땄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카론을 벗겨 먹느라 이미 흥청망청 취해 버린 영지전의 주역, 메이켄의 기사들이 일찌감치 뻗어 버렸다는 것 정도였다. 덕분에 신이 난 것은 저택의 하인들과 사병들이었다.
시온도 모처럼만에 긴장을 풀고 파티를 즐겼다.
늘 경직된 삶을 살아온 시온에게 이런 기회는 평생을 통틀어 몇 번 되지 않았다. 파르스름한 달 아래서 화기애애하게 떠들며 마시는 술맛이 썩 괜찮았다.
그렇게 하인들과 어울려 취하고 있을 때였다.
“시온.”
뒤에서 누군가 시온의 옷을 잡아당겼다.
미리엔이었다.
“미리…….”
무심코 돌아본 시온은 말문이 막혔다. 같이 있던 하인들도 입을 쩍 벌렸다.
탄성.
미리엔은 등과 가슴이 넓게 파인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취기 때문일까?
새하얀 어깨너머로 부드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그 모습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여자의 겉모습만을 보고 동요할 시온이 아니지만, 미리엔의 청초한 모습은 시온의 뇌리에 박혀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레이센…….’
“시온?”
잠시 멍해 있던 시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리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미리엔이었나? 차림이 달라서 몰라봤다.”
“뭐? 그럼 달리 누구로 보였다는 거야?”
미리엔이 울컥했다.
영지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딸임에도 그녀는 평소 수수한 옷만을 즐겨 입어왔다. 파티나 무도회에서 입는 예복을 처음 보는 시온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연히 속상하고 화가 났다.
시온이 황급히 말했다.
“아니, 오해하지 마라.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겹쳐 보인 것뿐이다.”
“…….”
어깨에 힘을 주고 씩씩거리던 미리엔은 곧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곤 새침하게 물었다.
“어… 어떤 것 같아?”
“잘 어울린다.”
“정말?”
“…….”
시온이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옷이 사람을 입고 있는 것 같긴 하다.”
“…큭! 이 나쁜!”
울컥 화가 치민 미리엔이 시온을 발로 찼다.
공격을 피하며 시온이 말했다.
“진정해라. 난 묻는 말에 대답했을 뿐이다.”
“몰라. 피하지 마! 이 해삼! 멍게! 말미잘!”
둘이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한 손에 술잔을 든 메이켄 남작이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가 참 좋아 보이는군. 그렇게 나란히 서 있으니 마치 연인 같은걸.”
“어머, 여, 연인이라니. 아니에요!”
미리엔이 당황한 듯 도리질을 치더니, 황급히 도망쳐 버렸다. 이런 놀림에 익숙하지 않은지 달아나는 옆얼굴이 귓불까지 빨갰다.
메이켄 남작은 그런 미리엔을 보며 웃다가, 이내 시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잔이 비었군. 한 잔 따라주겠나?”
“그러지.”
쪼르륵.
시온이 와인 병을 기울여 메이켄 남작의 글라스에 술을 채웠다. 투명한 선홍색 액체가 그윽한 포도 향을 풍겼다.
“그동안 자네와 단둘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지. 미리엔과의 좋은 시간을 빼앗은 건 미안하네.”
“별로 상관없다. 그보다 나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마침 잘됐군.”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왜 놀라지? 할 말이 있으면 안 되나?”
“그럴 리가 있겠나?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슬슬 여길 떠나려고 한다. 아무래도 당신에게는 양해를 구해두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아니, 떠난다고? 왜?”
“빚은 갚았으니까.”
“빚?”
의아한 듯 반문한 메이켄 남작은 곧 시온의 말뜻을 이해했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떨어져 당신의 딸과 영지에서 많은 것을 받았다. 이제야 말하지만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말 말게. 우린 아무도 자네에게 빚을 지웠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메이켄 남작은 뒤늦게야 아차 싶었다.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얼떨결에 그의 등을 떠민 셈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