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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7화)
Chapter 07 빚은 갚았으니까(2)
시온이 말했다.
“이 왕국은 오랜 시간 평화로웠다고 들었다. 평화는 칼을 무디게 만들지. 영지전을 일으켜 심난케 한 점은 미안하지만 난 내가 받았던 것들의 대가로 당신들이 잊고 살던 그것을 일깨워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헬리언 백작을 때려 문제를 만든 것인가?”
“마침 상황이 좋았지.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난 같은 짓을 했을 거다. 노년의 영주를 등 뒤에 세우는 놈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후후. 자네는 역시 재밌는 친구로군.”
메이켄 남작은 글라스를 기울여 와인을 넘겼다.
그 잔을 시온이 다시 채운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자네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네. 굳이 떠나겠다면야 말릴 수는 없지. 하지만 우리 미리엔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다니?”
“그 애도 이제 혼기가 찼어. 지금껏 사내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던 그 애가 자넬 유난히 잘 따르고 있네. 난 미리엔이 좋아하는 남자와 짝을 이루게 해 주려고 늘 생각해 왔지.”
“그 말은 미리엔이 날 좋아한다는 뜻인가?”
“아직은 그저 작은 호감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하네. 자네도 그것을 모르진 않겠지?”
시온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변명처럼 술을 들이켰다.
탁!
메이켄 남작이 조금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난 메이켄의 영주이기 이전에 미리엔의 아비라네. 그래서 이런 부탁을 안 할 수 없군. 내 딸을 울리지 말게.”
“아무래도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뭐라고?”
“내가 이 영지에 온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그동안 미리엔과 붙어 있던 게 아니니 실제로 함께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지. 미리엔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남녀 간의 애정이라고 부를 만한 게 아니다. 그녀는 그저 처음 보는 외지인이 신기할 뿐이고, 그 외지인이 자신과는 달리 조금 강하고 특이하기 때문에 호기심을 갖는 거다. 이게 내 해석이다.”
“확실히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당신과 토론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시온이 조금 불쾌한 듯이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었다.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맺고 끊음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미리엔에게 어떤 책임도 약속도 지울 수 없음을 분명하게 피력을 한 것이다.
메이켄 남작이 말했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원래의 용건으로 넘어가세. 영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자네의 책략과 전술 덕분이라고 알고 있네. 영주로서 감사를 표하고 싶네.”
“감사라면 이 파티를 받았으니 충분하다. 간만에 마음껏 취할 수 있어 좋았어.”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메이켄 남작은 씁쓸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파티의 주인공들이 모두 뻗어버린 지금 상황에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언제 떠날 생각인가?”
“조만간.”
“생각이 정해지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게.”
“그러지.”
메이켄 남작은 잔을 놔둔 채 빈손으로 떠났다.
다시 혼자 남게 된 시온은 잔을 든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좋군. 오늘도.”
푸른 달이 쓸쓸히 빛나고 있었다.
Chapter 08 협상과 제안(1)
다음 날 아침.
시온은 숙취로 괴로워하는 카론과 함께 지하에 있는 고문실을 찾았다.
고문사가 전날 사로잡은 어쌔신을 하루 동안 요리했다고 했다. 뒤를 캐서 헬리언 백작과의 연결고리를 만들면 몸값 협상에서 한층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패했을 경우 보험으로 사용하려 했던 어쌔신은 싸움에 승리한 지금은 협상의 재료로서도 요긴했다. 시온이 한 명을 사로잡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던 것이다.
카론은 고문실의 문을 열기 전 미리 경고했다.
“너무 큰 기대는 마.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까. 지금쯤이면 아마 독이 잔뜩 올랐을 거야.”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다.”
씩 웃은 카론이 녹슨 철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린 순간 확 풍겨오는 악취에 시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피와 오물, 녹슨 철 냄새가 지저분하게 뒤섞인 냄새였다. 특히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시온을 불쾌하게 했다.
“오셨습니까.”
들어서는 시온과 카론을 음울한 얼굴의 고문사가 맞이했다. 사십대 중반의 근육질인 고문사 맥은 대대로 이 일을 해왔다고 했다.
사람을 고문할 기회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온갖 기술들은 절대로 믿을 만하다고 카론이 큰소리를 땅땅 쳤었다.
고개 숙인 맥을 향해 카론이 말했다.
“죄인을 보러 왔다. 지금 깨어 있나?”
“예. 방금 찬물을 뿌려 두었습니다. 가시죠.”
맥의 안내를 받아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적당한 크기의 방이 나왔다. 창문 하나 없이 벽을 까맣게 칠한 어두운 석실이었는데, 그 정면 쪽 벽에 사지를 활짝 벌리고 매달려 있는 사람이 보였다.
시온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카론, 우린 어쌔신을 보러 온 거 아니었나?”
“이 녀석이 그 어쌔신이야.”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카론이 킥 웃었다.
시온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여자잖아?”
“그래, 여자야. 나도 복면을 벗겨 보고 깜짝 놀랐다.”
어쌔신은 젊은 여자였다.
나이는 고작해야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 정도에 불과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금발이 산발이 되어 있었지만, 그사이로 표독스럽게 번쩍이는 눈빛만은 선명하다. 자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지 입에는 두터운 재갈이 물려 있고 양손에는 털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 외에는 전라였다.
맥이 말했다.
“정말 독하더군요. 보통은 이렇게까지 포박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년은 틈만 나면 자살을 하려고 해서 꼼짝도 못하게 묶어두고 포션도 스무 병이나 준비했습니다.”
“포션?”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야. 신성력이 담겨 있어서 환부에 붓기만 하면 신관의 기도를 받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내지.”
카론이 설명을 하며 구석에 놓여 있는 술병 크기의 유리병들을 가리켰다. 붉은 액체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니 그것이 포션인 모양이었다.
“상처를 계속 치료하면서 고문하는 건가?”
“그렇지요. 어차피 입과 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요.”
맥은 그렇게 말하며 여자 어쌔신의 따귀를 호되게 올려붙였다. 상대가 여자라는 인식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운 듯했다.
“……!”
뺨을 얻어맞은 어쌔신이 살벌한 눈으로 맥을 노려봤다. 그러자 맥은 손가락으로 어쌔신의 눈을 콱 찔렀다.
“크끄으으으으읏―――!”
입에 재갈을 문 상태에서도 소름끼치는 신음이 좁은 석벽을 울린다.
출혈을 일으킨 흰자위에서 피눈물이 철철 흘러나왔다. 지독한 통증에 어쌔신이 몸부림을 쳤다. 맥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포션 병의 마개를 하나 따더니 어쌔신의 얼굴에 부었다. 그러자 정말로 신관들이 치료할 때처럼 저절로 출혈이 멎고 상처가 아물었다.
맥이 어쌔신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재갈을 풀겠다. 혀를 깨물려면 깨물어. 포션으로 치료하면 그만이니까. 대신 허튼짓을 할 때마다 고통의 강도가 점점 올라간다는 사실만 기억해.”
철컥.
맥이 어쌔신의 입 주위에 채운 자물쇠를 풀고 침 묻은 재갈을 빼내어 바닥에 팽개쳤다.
“퉤!”
어쌔신이 곧바로 맥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맥은 살벌하게 웃으며 허리춤에서 메스를 꺼내 응징하려 했다.
그것을 카론이 만류했다.
“그만 됐어. 이제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할 테니 나가 주겠나?”
“알겠습니다. 옆방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문을 두드리십시오.”
맥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석실을 나갔다.
시온은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다. 고문을 한다고 듣기는 하였지만 이런 비인도적인 방식일 줄은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잠시 어색하게 서 있던 카론이 입을 열었다.
“어쌔신, 내 말 알아듣겠나?”
“…….”
어쌔신은 대답 대신 예의 표독스런 시선으로 카론을 노려봤다. 입이 말라 있지만 않았다면 카론에게도 침을 뱉을 기세였다.
카론이 말했다.
“우선 통성명부터 하지. 난 참군 기사단장 카론이다. 이름이 뭐지?”
“죽여라.”
어쌔신의 음성은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겉모습은 멀쩡한데도 목소리가 완전히 간 것이, 고문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충분히 짐작케 했다.
“죽여라.”
“난 이름을 물었다.”
“그런 거 없다. 어서 죽여라!”
“흠.”
카론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우리가 파악한 바로 왕국에서 귀족가와 결탁할 만큼 지명도 높은 살인 청부 길드는 세 곳이 있다. [다크 로즈], [듀란], [마할릭]이지. 그중 [마할릭]은 어쌔신들 전원의 혀를 자르기 때문에 지금처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마할릭]은 제외. 넌 [다크 로즈]와 [듀란], 둘 중 하나에서 파견된 어쌔신일 것이다. 그렇지?”
“…….”
카론의 일목요연한 정리에 어쌔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곧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카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카론은 히죽 웃었다.
“지금 위에 헬리언 백작이 잡혀와 있다. 이미 너희가 소모된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어. 헬리언 백작은 당연히 너희의 존재 자체를 외면할 테고, 길드에서도 고작 어쌔신 하나를 구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진 않을 거다. 넌 도대체 누구한테 의리를 지키고 있는 거지?”
“…….”
“가진 정보가 얼마나 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 그저 네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만 가르쳐 주면 충분하다. 사실대로 실토하기만 하면 협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널 석방해 주겠다. 아마 네 길드에도 피해가 미치는 건 없을 거야. 어때, 괜찮은 조건 아닌가?”
“…….”
어쌔신은 요지부동이었다.
카론이 재차 몇 마디로 살살 구슬려 보았지만 절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유부리는 척 웃음 짓던 카론이 슬그머니 주먹을 말아 쥘 무렵, 시온이 그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비켜 봐라. 내가 이야기해 보지.”
“그러겠나?”
카론이 얌전히 물러섰다.
시온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마주보고 섰다.
가만히 서서 눈만 빤히 들여다보자 조금 머뭇거리던 어쌔신은 곧 시선을 피했다.
시온이 말했다.
“시선을 피한다는 건 곧 두려움이다. 죽음을 각오한 주제에 뭐가 두렵지?”
“…….”
그 말에 어쌔신은 다시 시선을 들어 시온을 노려봤다. 무섭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만, 시온은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 속에 섞인 깊은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시온에 의해 처참하게 당해서 여기에 잡혀 온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를 기억하는군. 나는 카론처럼 말재간이 좋은 편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겠다. 네가 여기서 끝까지 함구한다면 나와 참군 기사단은 [마할릭]을 제외한 나머지 두 길드를 박살 내 버릴 것이다. 협상 전까진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하니 인도적인 방법은 쓸 수 없겠지.”
“…….”
어쌔신의 눈이 다시금 동요로 인해 흔들렸다.
시온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작 어쌔신 길드 두 개 쓸어버리는 게 어려울 것 같나? 모두 죽여 버리고 지금의 너처럼 딱 한 명씩만 살려서 끊임없는 고문을 가할 거야. 그 한 명은 각 길드의 대장. 놈들이 고문 받는 장소는 바로 이곳, 너의 눈앞이다. 그때, 난 놈들에게 똑똑히 주지시킬 것이다. 너희들이 고문을 받는 이유는, 바로 네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라고.”
“……!”
“그렇게 되면 네가 그렇게 의리를 지키려는 길드의 우두머리들은 반대로 널 저주하겠지. 그때의 반응만 봐도 누가 널 보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로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어. 지금 듣느냐, 나중에 듣느냐의 차이일 뿐. 그래도 입 다물 텐가?”
그 말만을 하고 시온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가자, 카론.”
“엉? 어어, 그래.”
뭔가를 눈치챈 카론이 그에 동조하면서 시온의 뒤를 따라 석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잠… 잠깐.”
어쌔신이 말했다.
“우리 길드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쓸어버린다는 거지?”
“우리가 설마 그 정도도 파악 못하고 있을 것 같나?”
“고작 기사단 하나로…….”
“‘고작 기사단’이 아니라 ‘참군 기사단’이다. 물론 그들만이 아니지. 왕성에도 협조 요청을 할 거고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력은 다 동원할 것이다.”
“흥. 허세 부리지 마.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어.”
“이 자리에서 널 납득시켜야 할 필요도 없지. 늦어도 네 대장과 직접 대질하고 나면 생각이 바뀔 테니까. 곧 맥이 올 거다. 그때까지 거기서 편히 쉬도록.”
“기다려!”
시온이 걸음을 멈췄다.
어쌔신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시온을 노려봤다.
“이제야 말할 생각이 드셨나?”
“내,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길드는 손 안 대는 거지?”
“글쎄.”
“확실히 대답해!”
“헬리언 가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먼저 공격해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다.”
“……좋아. 말하겠어.”
카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온이 씩 웃었다.
“카론에게 전해라.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