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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8화)
Chapter 08 협상과 제안(2)


어쌔신은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카론의 핵심적인 질문엔 거의 대답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첼이며, 왕국 삼대 어쌔신 길드인 [듀란]에 소속된 삼급 어쌔신이라고 했다.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카론이 말했다.
“어쌔신 길드와 손을 잡다니. 헬리언 놈들, 배짱 한 번 두둑하군. 아주 두둑해.”
“귀족은 어쌔신과 손을 잡으면 안 되는 건가?”
“당연히 안 되지.”
“어째서?”
“생각해 봐. 귀족이 어쌔신과 손을 잡아서 하려는 일이 뭐겠어? 바로 암살이야. 귀족이 어쌔신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판명된 순간 왕궁에서 특사가 파견돼. 정치적으로 반대 노선을 걷는 귀족 중 의문사나 돌연사를 당한 사람은 없는지 그 사돈의 팔촌까지 샅샅이 파헤치지.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뒤집어쓰는 죄가 있고 드러나는 죄가 있어.”
“그도 그렇군. 고용해서 써먹지 않으면 손을 잡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바로 그거야.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만 넌지시 흘려도 헬리언 놈들은 똥줄이 바짝 마를걸? 이걸로 헬리언 백작의 몸값은 네 배 이상 올라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그건 잘됐군.”
“다 네 덕이지.”
“내가 뭘?”
“어쌔신을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 넘길 수 있는지 감탄스러울 지경이야. 가끔은 네놈의 의뭉스러움이 무서울 때가 있다. 하하하!”
“그럴 때도 있는 거지.”
후르르.
시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차를 마셨다.
카론은 영지전에서 큰 전과를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다시금 큰 공을 세운 것에 들떠서 싱글벙글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시온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론,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정보를 실토해 낸 어쌔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이지. 시가지로 끌고 나가 돌을 던져서 죽여.”
“그녀도 그렇게 죽일 건가?”
“그럴 생각이었는데. 뭐 잘못됐나?”
“우린 그녀를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거야 고문실에서 한 약속이잖아.”
“고문실에서 한 약속은 약속이 아닌가?”
“자넨 죄인을 고문하는 걸 처음 본 모양이군. 원래 고문을 할 땐 지독한 고통을 안겨준 다음 달콤한 거짓말로 죄를 실토하게 하는 방법이 유효하지. 난 자네도 당연히 그런 식으로 구슬리는 줄 알았는데?”
“…….”
“아니면 진심이었나?”
시온은 말없이 차를 마실 뿐이었다.
카론이 껄껄 웃었다.
“어쌔신이 여자라고 해서 동정할 필요 없어. 어쌔신이라는 족속은 함부로 풀어놓으면 어쨌든 또 사람을 죽이게 되어 있거든. 잡히는 족족 죽이는 것이 좋아.”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카론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뜻이야?”
“내가 책임지겠다. 협상이 끝나는 대로 그녀를 풀어줘.”
“흠…… 뭐, 안 될 건 없지. 좋아. 풀어주마. 어차피 그녀를 붙잡은 것도 너니까.”
카론은 의외로 선선히 승낙을 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론 그런 약속은 신중하게 해야겠군.”
“어떤 상황이든 신중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카론은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나는 슬슬 연무장에 가볼 건데, 같이 가겠나?”
“아니, 선약이 있어서.”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지.”
카론이 서재를 뒤로 했다.
홀로 남겨진 시온은 식어가는 찻잔을 비우며 상념에 잠겼다.
“어쌔신이라.”

끼이이익!
녹슨 철문이 비명을 질렀다.
홀로 석실 안으로 들어온 시온은 뒤에 서 있는 맥에게 눈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문을 두드리십시오.”
맥은 낮과 같은 말을 하고는 문을 닫았다.
시온은 벽에 걸린 등잔에 불을 붙여 석실을 밝혔다.
화르륵!
불이 타오르고, 석실 안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
어쌔신 레이첼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팔에는 수갑을 차고 발목은 벽과 연결된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낮처럼 벽에 매달려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조금이지만 정보를 받았으니 그 대가로 구속을 느슨하게 풀어준 것이리라.
시온이 말했다.
“편해 보이는군. 이제 자살할 마음은 버렸나?”
레이첼이 무섭게 시온을 노려봤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제안을 하러 왔다.”
“제안?”
“카론이 그러더군. 어쌔신은 함부로 풀어놓으면 또 사람을 죽일 테니 죽이는 게 낫다고. 나도 같은 생각이다. 널 풀어줘서 다시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면 넌 여기서 죽는 게 낫지.”
“그럼 날 죽이러 온 거냐?”
“말했을 터다. 제안을 하러 왔다고.”
“무슨 제안?”
“널 내가 갖겠다.”
“뭐?”
“죽을 목숨을 살려줬으니, 그 목숨은 내 것이다. 앞으로 나를 섬기겠다고 하면 이 감옥에서 꺼내주지.”
“미친놈. 내가 그런 말에 덥석 충성을 맹세할 것 같아?”
“네가 이 석실을 빠져나갈 방법은 그것뿐이다.”
“…….”
“카론은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듣자 하니 고문실에서 한 약속은 아무 효력이 없다더군. 그러니까 나를 따라서 나오지 못하면 넌 이 안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래도 좋은가?”
레이첼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하는 그녀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 주듯이 시온이 말했다.
“물론 충성 같은 건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신성교국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대륙을 여행하기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동행자가 필요하다. 신성교국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든 상관 않고 널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것도 고문실에서의 약속인데.”
“내가 신성교국까지 데리고 가서 널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나? 의심스럽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난 카론이 네게 한 약속을 대신 지키고 싶을 뿐이니까. 네가 필요 없다고 한다면 그걸로 됐다.”
“자, 잠깐. 필요 없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럼 응하는 건가?”
“그렇지만 너와 난 적이야. 만약 네가 잠든 틈에 내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그땐 어쩔 거지?”
“그건 네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잠든 널 죽일 수도 있어.”
“그것도 괜찮겠지. 죽는 건 억울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순순히 죽어줄 마음은 없지만, 할 수 있으면 어디 해봐라.”
자신감으로 확고한 시온의 눈.
레이첼은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고민했다.
뒤늦게 삶의 애착이라도 생겨난 것일까?
죽고 싶어 안달인 듯하던 낮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곧 레이첼이 말했다.
“날 속이면 죽어서도 계속 저주할 거야.”
“마음대로.”
쩔그렁!
시온은 그녀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구속구를 풀어 주었다. 포로로 잡힌 이래 처음으로 몸의 자유를 되찾은 그녀가 황급히 바닥에 널려 있는 더러운 천 쪼가리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떠나는 건 언제?”
“사흘 뒤.”
“그렇군.”
“옷과 음식을 넣어 주지. 푹 쉬어 둬라.”
시온은 석실을 뒤로 했다.
그가 사라진 문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레이첼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발렌…….”

다음 날.
헬리언 백작가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헬리언 백작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로, 알프레드라는 자였다.
그는 카론과 시온을 위시한 메이켄의 간부들이 모두 모인 메이켄 남작의 집무실에 앉아서 긴장한 얼굴로 찻잔을 기울였다.
영지전은 끝났지만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홀로 적의 어린 시선을 받고 있으니 몹시 겁나는 것도 당연했다.
메이켄 남작이 말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벼,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하.”
억지로 웃은 집사 알프레드는 자리를 오래 끌기 불편했는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 서로 용건을 알고 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희 영주님을 풀어주십시오. 성의 표시는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
“성의 표시라…….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있소?”
“5천 브랑 정도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게 헬리언 가에서 생각하는 헬리언 백작의 값어치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시온이 카론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론. 5천 브랑이 적은 돈인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게 큰돈도 아니지. 내 월봉이 800브랑이니까. 저게 헬리언 백작의 몸값이라면 말도 안 되는 액수야.]
시온이 알기로 이 세계는 대륙공용화폐인 브랑(bran)으로 화폐단위가 통일되어 있었다. 4인 가족이 한 달을 날 수 있는 생활비가 200브랑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방금 알프레드가 제시한 금액은 찔러보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메이켄 남작도 난색을 표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대들의 성의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구려. 아무래도 우리가 헬리언 백작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소.”
“그, 그럼 남작님께선 어느 정도를 원하십니까?”
“아무리 못해도 50만 브랑은 되어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겠소?”
“50만 브랑이라니!”
알프레드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 그렇게 큰돈을……! 남작님께서는 저희 영주님을 풀어 줄 생각이 없으신 것 아닙니까?”
“이놈! 어디서 감히 언성을 높이는 거냐?”
카론이 검을 움켜쥐며 험악하게 소리치자 알프레드는 곧장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카론 경, 진정하고 물러서게. 아직 이야기 도중이라네.”
“예, 영주님.”
사실 카론의 이런 과민반응은 겁주기에 가까웠다.
알프레드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늙은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소드 익스퍼트 급 기사의 살벌한 기세를 눈앞에 두고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