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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19화)
Chapter 08 협상과 제안(3)


알프레드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50만 브랑은 무리입니다. 저희에게도 조금은 숨 쉴 구멍을 뚫어 주셔야지요, 남작님.”
“알프레드 집사, 착각하지 마시오. 그대들은 침략자요. 헬리언 영지에 대한 우리 영지민들의 분노가 아직까지도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요.”
“물론 그 점에 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과와 위로를 전해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당장 마련할 수 있는 자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들어 봅시다.”
“3만 브랑 정도라면 어떻게든…….”
“알프레드 집사, 그대는 감히 자신의 영주를 도마에 올리고 흥정을 하려고 드는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몸을 앞에 두고 장난치는 것인가?”
“오, 오해이십니다. 남작님. 제발 진정하시지요.”
“그대들이 준비할 수 있는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 도리는 없으나, 내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어 40만 브랑까지는 선처해 줄 용의가 있소.”
“40만 브랑이라니…….”
알프레드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확실히 메이켄 남작이 부른 값은 지나친 감이 있기는 하였다. 40만 브랑이라면 메이켄 성의 외벽을 새로 쌓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메이켄 남작가와는 달리 기사와 사병들이 대거 죽고 무기까지 죄다 빼앗긴 헬리언 백작가는 그 돈을 지불하고 나면 파산하게 될지도 몰랐다.
“남작님, 제발 사정 좀 봐주십시오. 그 돈을 지불을 하고 나면 저희 백작가는 파산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소? 현금으로 10만 브랑을 받고, 나머지는 각종 이권으로 대신하는 거요.”
“10만 브랑…….”
알프레드의 눈에 희망의 빛이 돌았다.
10만 브랑이라면 여기저기서 긁어모으면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듯했다.
“각종 이권이라 하시면?”
“일단 헬리언 백작가에서는 향후 오 년 동안 귀 댁의 소영주를 우리 영지에 보내야 하오. 나중에 다시 영지전이 발발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 말이오.”
“예. 그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 댁에서 볼모로 잡아두고 있는 타 영지의 소영주들이 있을 거요. 그들을 모두 원래 영지로 돌려보내 주시오. 그것으로 10만 브랑을 감해 주겠소.”
“그럼 나머지 20만 브랑은……?”
“그것은 우리 집사와 대신 상의하도록 하시오. 메이슨.”
“예, 영주님.”
메이켄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와 교대로 메이슨이 두꺼운 서류철을 들고 그의 맞은 자리에 앉았다.
“근 며칠간 헬리언 영지의 자금 흐름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았습니다. 많은 길드를 후원하고 각종 상권에도 개입을 하고 계시던데, 제가 보기엔 이 부분부터…….”
메이슨이 서류철을 펼치고 펜으로 쭉 그어나갔다.
“이 부분까지 양도를 해 주시면 20만 브랑을 절충할 수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그, 그건 헬리언 가의 자금줄을 틀어쥐겠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알프레드가 비명을 질렀다.
메이슨의 제안은 헬리언 영지의 자금 유입을 완전히 쥐락펴락하겠다는 소리였다.
메이슨이 말했다.
“이 부분을 승낙하지 않으시면 헬리언 백작은 돌려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말과 함께 사악하게 웃는다.
“차후엔 [듀란]의 길드 마스터와 함께 왕성에서 만나 뵙게 될지도 모릅니다.”
“헉!”
알프레드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어떻습니까. 아직도 선택의 여지가 필요하십니까?”
“……아, 아, 아닙니다.”
알프레드는 거의 시꺼멓게 죽은 얼굴로 서류에 사인을 했다.
전후 보상 관련 문제에 관해서도 여지없이 메이켄 영지의 압승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알프레드가 병자처럼 야윈 헬리언 백작을 데리고 황급히 마차에 올랐다. 메이켄의 간부들이 모두 나와 그 모습을 전송하였다.
“시온.”
헬리언 백작은 마차에 오르기 전, 딱 한 번 돌아봤다.
“뭐냐?”
“내가 했던 말, 잊지 마라. 곧 다시 볼 날이 있을 거다. 기대해라.”
“그래. 기대하지.”
헬리언 백작은 이를 갈며 시온을 노려보더니, 거칠게 마차에 올랐다. 곧 마차의 문이 닫히고, 창문에도 커튼이 쳐졌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이럇!”
툴툴툴툴―!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차는 금세 메이켄 성을 빠져나갔다.
“으하하하하하!”
그 뒷모습을 향한 메이켄 기사들의 환호성이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Chapter 09 이별(1)


다시 하루가 지났다.
시온은 메이켄 남작을 찾아가서 내일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메이켄 남작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자넨 참 갑작스럽군.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정말로 여기에 정착할 마음은 없는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길 바라고 있다네.”
“내 마음의 확신을 얻을 때, 다시 돌아오겠다. 그게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가. 자네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메이켄 남작은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신성교국까지 간다고 했지? 이 돈이면 부족하지는 않을 걸세.”
“고맙게 받겠다.”
받아서 살짝 열어 보니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금화는 보석 전문점에서 환전을 해야 쓸 수 있지만 개당 100브랑의 거금이었다. 무게로 보니 족히 5만 브랑은 될 것 같았다.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닌가?”
“자네 덕에 벌어들인 돈이야. 일부는 환원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시온은 두 번 묻지 않고 돈주머니를 품 안에 넣었다. 주는 것은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시온이 말했다.
“말도 준비해 주었으면 한다. 두 명은 탈 수 있을 정도의 건마로.”
“메이슨에게 말해 놓겠네.”
“그럼.”
용건을 마친 시온이 등 돌려 나가려고 할 때, 메이켄 남작이 그를 불러 세웠다.
“미리엔에겐 꼭 인사하고 가게.”
“……그러지.”
시온은 이번에야말로 남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을 나온 시온이 로비로 내려가자 마침 메이슨이 저택으로 들어오던 참이었다.
시온이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외출했었나?”
“시온님이시군요. 예. 잠시 나갔다 오는 길입니다.”
“그렇군. 계속 수고해라.”
“시온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담담히 그를 지나쳐 걸어가려던 시온이 멈춰 섰다.
메이슨이 조금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시온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지 않았습니까. 마침 대사도 치렀겠다,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이야기나 좀 나눴으면 합니다.”
“난 너와 할 이야기가 없는데.”
“하하. 너무 그러지 마시고요.”
메이슨의 눈은 다른 때와는 달리 제법 확고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시온은 의아한 듯 눈을 치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디서 할까.”
“별채로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시온은 얌전히 메이슨의 뒤를 따라갔다.
별채는 메이켄 남작 저택의 정원 안에 있는 건물이었다. 시온도 정원을 청소하면서 가끔 보긴 하였지만 막상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은 메이슨이 열쇠를 가지고 있고 그의 개인 공간으로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열지 않는다는 것이 하인들의 설명이었다.
메이슨은 시온을 그런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죠.”
그의 말에 사양 않고 들어가니 안은 넓은 공실이었다. 겉보기와 다를 바 없는 석재 건물에 먼지 한 점 없는 것이 꽤 세심하게 관리해 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굉장히 허한 느낌이었다.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차 한 잔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한 판 싸워보자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나?”
“너무 나쁘게 생각지는 말아주십시오. 악의가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을 잘도 믿겠군.”
“정말입니다. 저는 그저 시온님과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을 뿐입니다.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 한 수 배운다는 느낌으로 받아주십시오.”
메이슨은 외알 안경을 벗으며 그렇게 말했다.
시온이 씩 웃었다.
“좋지.”
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이 보통 집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예감이 확신이 된 것은 어쌔신의 침입 때 메이슨이 미리엔과 메이켄 남작의 방에 함께 있었던 때.
위급 상황에서 저택의 요인들을 근접해서 지키는 사람은 당연히 그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상황에 카론이 아니라 메이슨이 집무실에 들어가 있던 것이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시온님은 이미 알고 계셨군요.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나도 속을 뻔했다.”
“언제 아셨습니까?”
“어쌔신이 침입했을 때.”
“앗차…… 이런.”
한 방 먹었다는 듯 이마를 탁 친 메이슨이 씩 웃더니 주머니에서 검은 장갑을 꺼내어 착용했다.
“영주님과 카론 단장만 알고 있는 일이니 부디 함구해 주시길.”
고오오오.
단지 안경을 벗고 장갑을 낀 것뿐인데, 그의 기세가 일변하였다.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은 착시를 느끼게 했다.
시온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상당한 수준이군.”
“칠 분.”
“……?”
“제가 오러를 전개한 카론 단장을 쓰러뜨리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시온님은 삼 분이 채 안 걸리셨지요. 쓰러뜨린 게 아니라 항복을 받아낸 거긴 하지만요.”
“그래서?”
“격차를 느껴보고 싶습니다. 부디 상대해 주십시오.”
“좋다. 와라.”
메이슨이 웃었다.
“바로 갑니다.”
메이슨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시온은 눈앞으로 여러 개의 선들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스핑……!
푸스스스!
몹시 새된 소리가 나며 천장에서 자잘한 돌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부채처럼 확 펼쳐지는 하얀 선.
“와이어로군.”
“아무리 시온님이라도 거기에 닿으면 피가 좀 나실 겁니다―!”
눈 깜짝할 새 지척까지 접근한 메이슨이 그대로 몸을 낮추며 장저를 쳐올렸다.
파아아앙!
옷소매가 바람의 마찰에 쓸리는 소리만으로도 그 풍압을 느낄 수 있었다. 시온은 몸을 비틀어 어깨를 내주는 대신 메이슨의 미간에 박치기를 시도했다. 메이슨의 장저가 마치 뱀처럼 휘어 시온의 턱을 재차 노렸다.
할 수 없이 시온이 팔을 세워 막아내자, 그의 몸이 주르륵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