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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25화)
Chapter 11 [마할릭](2)


시온은 그 길로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말을 풀어 성을 나왔다. 라도네스 왕국 최전방을 지키는 경비 병사들이 레이첼이 내민 출입국 허가서를 면밀히 보더니 창을 세우며 ‘통과!’라고 외쳤다.
휘이이이이잉!
성을 빠져나온 순간 한 줄기 돌개바람이 크게 일어 시온의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
성 밖은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초토화될 최전방 국경 지대를 농지로 삼고 일구어 갈 사람이 있을 리 없기에 그 지대는 말 그대로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었다. 무성히 우거진 잡초며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다행히 말이 이동할 수 있을 만한 길은 나 있었지만 그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험한 들길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온이 말했다.
“레이첼, 궁금한 게 있다.”
“뭔데.”
“국가 간 교류를 할 때도 이 길을 통하나? 정기적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길이 이렇게까지 황폐화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설마. 높으신 분들은 워프게이트를 이용하지.”
“워프게이트?”
“그것도 몰라?”
레이첼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시온이 먼 타지에서 온 외국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문명이 다르고 습성이 다른 것은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였지만, 이처럼 부족한 상식을 보면 시온의 고향은 도대체 어느 정도로 낙후된 곳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레이첼이었다.
“각 국가 간에는 워프게이트가 있어. 국가 행사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이동도 워프게이트를 통해.”
“워프게이트라. 그걸 타면 이동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건가?”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어. 듣자니 그걸 쓰면 같은 마법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눈 깜짝할 새 이동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런 게 있었다면 왜 진즉에 말하지 않았지?”
“말해서 뭐하게? 그거 한 번 타는 데 드는 돈이 자그마치 1천 브랑이야. 두 사람이 타면 2천 브랑이고.”
“…어휴. 이런 바보 같으니.”
“뭐라고?”
레이첼이 쌍심지를 세웠다.
시온은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레이첼, 말 돌려라.”
“……?”
“성으로 돌아간다.”
“뭐? 어째서?”
“워프게이트를 탄다.”
“하?”
“그 만한 돈은 있다.”
“……진짜?”

레이첼은 시온의 말대로 얌전히 기수를 돌렸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장난치느냐며 화를 냈지만, 레이첼이 워프게이트를 이용할 거라고 하자 그들의 태도는 금세 살갑게 변했다.
워프게이트는 부자들의 특권이었다.
병사들은 부자와 친해지길 원했다. 부유한 사람과 가깝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들에게 청하지도 않은 안내를 받는 동안 시온은 겸사겸사 이 영지의 이름이 ‘린센 자작령’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본래 워프게이트는 아무 곳에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설령 타려고 마음먹는다 해도 장소가 안 좋으면 상당한 거리를 도보나 마보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린센 성 안에는 포르가스로 통하는 워프게이트가 있었다.
“워프게이트를 이런 외진 곳에다 설치한 이유가 있나?”
대답은 안내원을 자청한 병사가 했다.
“워프게이트는 거리가 멀면 멀수록 운임 및 유지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납니다. 때문에 워프게이트는 보통 국가 간 경계성에 만들어 두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런가? 한 번 탈 때마다 최변방까지 이동해야 한다면 상당히 불편하겠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국의 왕성과 반대쪽 경계성에도 워프게이트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몇 번만 갈아타면 유기적으로 쉽게 이동이 가능합니다.”
“그럼 갈아탈 때마다 운임료를 따로 내야 하나?”
“아닙니다. 처음 한 번만 내시면 사용증을 드리니 그것을 제시하시고 타시면 됩니다.”
“그렇군. 설명 감사한다.”
“뭘요. 헤헤.”
병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시온에게 눈빛을 보내며 손바닥을 비볐다.
시온이 픽 웃으며 그의 손바닥 위에 10브랑을 올려놓자 그의 표정이 기쁨에 물들었다.
“감사합니다!”
병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라졌다.
“말 몇 마디하고 10브랑을 벌었으니 좋기도 하겠지.”
레이첼이 은근히 비꼬았다. 빈곤한 유년기를 보낸 그녀는 사치와 낭비를 질색했다.
두 사람은 어느 새 에쉬아 신전 앞에 서 있었다.
워프게이트는 린센 자작령 안에서도 에쉬아 신전의 예배당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운임료는 신전에 헌금과 같은 형식으로 내면 된다고 했다. 시온은 그 절차대로 금화 20개를 헌금하고 레이첼과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워프게이트를 지키는 신관들이 몰려나와 시온과 레이첼을 공손하게 맞이했다.
대신관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신성교국으로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무슨 일로 가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저 개인적인 용무다.”
신관들은 시온의 무례한 말투에 불쾌한 낯빛이 되었지만 시온은 개의치 않았다. 신관들도 나서서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워프게이트의 이용자는 부호이고 신전의 잠재적인 주 고객이기 때문이다.
“그러시다면 캐묻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신성교국에서는 오직 교리를 따라 행동하셔야 하며 범죄를 저지르시면 교리에 의한 처벌을 받습니다. 살인과 강간은 동일하게 처벌하며 재판 없이 바로 화형입니다.”
“알겠다.”
“그러시면, 이 진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시온과 레이첼은 망설임 없이 워프게이트의 진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우선 포르가스 왕국의 국경 지대로 워프시켜 드릴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포르가스의 왕성으로, 왕성에서 다시 국경으로, 그리고 다시 신성교국의 국경으로 워프가 되시는 겁니다.”
“알고 있다. 설명은 오면서 거의 다 들었다.”
“예, 그럼.”
대신관이 한 걸음 물러서며 경전을 펼쳐 들었다. 워프게이트는 제작자가 정해 놓은 특수한 사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데, 신전에 지정된 사인은 대게 기도문이었다.
신관들이 경전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닥에 검은 선처럼 그려져 있던 워프게이트 마법진이 금빛으로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신기한 얼굴로 그것을 관찰했다.
워프는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미지의 것에 대한 미약한 공포와 원대한 호기심에 그녀는 마법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생소한 그였지만 워프게이트는 특별히 더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몸을 자유롭게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의 문. 그것은 언젠가 그를 다른 세계로 날려 보낸 디멘션게이트와 상당히 유사한 것이었으니까.
바로 그 때문이었다.
워프게이트에 시선을 빼앗겨 있느라 시온은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수십 개의 인기척을 제때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 한 번의 실책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슈가아아악!
빠각!
“에쉬아 님의 의지가…… 끅…!”
경전을 읽던 대신관이 말을 멈추고 숨을 삼키며 경련했다. 표정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린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의 가슴으로 비죽 튀어나온 한 자루 검끝이 보였다. 신선하고 따뜻한 피가 가득 묻은 검이었다.
그와 동시였다.
워프게이트를 작동시키기 위해 경전을 읽어가던 신관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신전에 난입한 검은 후드의 어쌔신들이 신관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아악!”
“안 돼!”
“컥!”
신관들이 무참히 참살당 하는 끔찍한 광경에 시온이 튀어나가려 했다. 그 팔을 레이첼이 붙들었다.
“놔라, 레이첼!”
“가면 안 돼! 워프게이트가 동작 중일 때 진에서 나가면 산산 조각나서 흩어지고 말아!”
워프게이트가 상용화된 지 이백 년이 채 안 되었다.
맨 처음 설치한 워프게이트를 시운전할 때, 신관이 작동 중인 워프게이트에서 나오려다가 온몸이 분자 단위로 나뉘어 사방팔방으로 워프되어 버린 일화는 너무도 유명한 것이었다. 워프게이트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레이첼도 알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시온이 혀를 차며 초조해했다.
기도문은 거의 마지막까지 읽어가던 참이었지만 워프게이트는 아직 작동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신관들은 거의 다 죽고 검은 후드의 어쌔신들이 속속 집결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비슷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시온은 바로 얼마 전에 자신과 싸우다 도주한 두 명의 후드를 알아보았다. 그들 중 누군가가 뒤를 밟은 것이 분명했다.
“레이첼, 내가 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건 알겠다. 그럼 저들은 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나?”
“그… 그것도 불가능해. 한 번 발동한 워프게이트의 마법진 안은 철저한 격리 공간이라고 알고 있어.”
“그렇다면 지금 당장 당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군.”
하지만 그런 안심도 잠시였다.
후드 중 하나가 롱 소드를 들고 다가오더니, 그대로 마법진 바깥의 지면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레이첼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안 돼. 진을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어!”
“그럼 어떻게 되지?”
“워프 지역이 랜덤이 돼. 수천 미터 상공일 수도 있고 깊은 해저일 수도 있어.”
그 사실을 알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숨을 삼키며 노려보고만 있는 동안, 마법진을 완전히 망가뜨린 후드가 숨을 붙여 놓은 신관 하나를 질질 끌고 왔다.
그리고 그 코앞에 경전을 들이밀었다.
“…….”
말은 하지 않았지만 뜻은 전해졌다. 경전을 마저 읽어서 워프게이트를 작동시키라는 뜻이다.
신관은 떨리는 눈으로 시온과 레이첼을 바라봤다. 하지만 당장 목에 겨누어진 칼이 더 무서운 것이 당연했다.
“……미안합니다.”
결국 신관은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다시 환하게 빛났다.
시온은 알 수 없는 빛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제 곧 사라질 거라고 알 수 있었다.
그전에, 시온이 말했다.
“네 로드와 헬리언 백작에게 전해라.”
“…….”
“내가 곧 약속을 지키러 찾아간다고.”

파아아아아아아앗!

이내, 시온과 레이첼이 마법진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온』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