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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24화)
Chapter 10 과거와 현재(3)
야심한 밤.
레이첼은 시온이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마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와의 인연도 그걸로 끝이 날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말로 마음에 안 드는 남자이긴 하지만 그가 메이켄에서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그와 있으면 최소한 안전하다는 의식은 들었다. 불가사의한 힘을 쓰는 시온과 같이 있으면 최소한 살해당할 위협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게 레이첼에게는 너무도 컸다.
술에 취해 방으로 올라가는 레이첼을 보고 카운터의 여관 주인이 음흉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레이첼과 시온이 부부 사이인 줄 알고 있었다.
남녀로 한방을 잡느라 레이첼이 그렇게 설명했다. 여자가 술에 취해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으니 좀 야한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리라.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애써 무시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온이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오나?”
레이첼은 숨을 삼켰다.
어두운 방 안. 창문으로 들어오는 푸른 달빛이 그의 등 뒤를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유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반응은 그녀로서도 처음이었다.
“…….”
“왜 그러지?”
“가, 가까이 오지 마!”
아마도 술기운 때문이리라.
꼭지가 돌 만큼 취해 버렸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에게서 애인의 자취를 더듬는 것이리라.
그런 건 싫었다.
용납할 수 없었다.
“뭐, 그러지.”
의아한 채 다가오려던 시온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레이첼은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이나 숨을 몰아쉰 끝에 겨우 진정했다.
레이첼이 변명하듯 말했다.
“별것 아니니까, 신경 쓸 것 없어.”
“몸이 아프면 포션을 써라. 짐 속에 여분이 있다.”
“필요 없어.”
냉담하게 대답한 레이첼이 침상으로 털썩 쓰러졌다. 너무 피곤했다. 모든 걸 잊고 오늘은 편히 잠들었으면 했다.
“레이첼.”
“왜.”
“……마라.”
마지막 말은 굉장히 희미한 울림이었기 때문에 레이첼에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끼익.
레이첼의 침상이 꺼지며 한 사람분의 체중이 실렸다.
시온이었다.
“울지 마라. 네가 우는 얼굴은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
막 잠에 빠져들려던 레이첼은 자신의 침상에 시온이 앉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몸을 일으키려고 고개를 든 순간, 시온이 그녀의 입술을 빼앗았다. 두 손으로 어깨를 누르고 밀어붙이는 난폭한 키스였다. 너무 놀란 레이첼은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버둥버둥.
“음……!”
반항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그녀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달라붙은 입술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시온의 혀가 레이첼의 벌어진 입안을 마음껏 누볐다.
잠시 후, 시온이 그녀에게서 얼굴을 떼어냈다.
“하아. 안아 줘…….”
레이첼이 안달하듯 시온의 목에 팔을 둘렀다. 시온도 사양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짧은 입맞춤 뒤 떨어진 시온의 입술이 그녀의 뺨, 턱선, 목으로 점점 내려갔다.
“아……! 아……!”
레이첼은 감전된 것처럼 흠칫거리며 몸을 떨었고, 이따금씩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좁은 방.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은 날이 밝을 때까지 쉬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다.
Chapter 11 [마할릭](1)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고 하기는 하였지만, 정말 아침밥만 먹고 바로 출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국경을 지나 포르가스 왕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평야 지대를 하루 정도 이동해야 한다. 그 곳은 몬스터와 맹금류들이 득시글거리는 위험 지대로, 무사히 지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여럿 있었다.
“레이첼, 너는 어떤 무기를 주로 쓰지?”
“그건 왜 물어?”
“앞으로 필요할 테니까. 전에 보니 대거를 쓰는 것 같던데.”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별로 무기에 구애받는 건 아니고, 날카롭고 단단한 건 뭐든지 써. 나뭇가지 하나만 있어도 사람은 죽일 수 있어.”
“그런가? 그럼 무기를 따로 살 필요는 없겠군.”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무기점을 그냥 지나쳤다.
벌써 레이첼의 가방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해서 거기다가 채워 넣은 것이다.
“그 가방, 무겁지 않나?”
“별로 안 무거워.”
“그래? 그럼 좀 더 사도 되겠군.”
“그만둬. 죽여 버린다.”
간밤에 정사를 치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레이첼이야 원래 남자와 자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여자였고, 시온도 그런 걸 굳이 내색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물론 조금쯤은 의식하고 있겠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서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은 두 사람 다 원하지 않았다.
시온이 레이첼의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레이첼, 식량을 그렇게 많이 살 필요가 있나?”
“1.5배 정도 넉넉하게 구입했어. 중간에 혹시라도 말이 죽거나 퍼지면 걸어가야 하니까. 거기선 음식은커녕 물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몬스터들 천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맞아. 그래서 야생동물은 거의 씨가 말랐지.”
“몬스터를 잡아먹으면 되잖나.”
“농담은 얼굴이면 충분해.”
“말이 심하다.”
시온은 실제로 몬스터를 잡아서 끼니를 때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져 미리엔과 만나기 전까지는 산속에서 헤맸는데, 그동안은 줄곧 몬스터의 고기를 먹으면서 살아왔다. 더구나 불을 피우면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들기 때문에 굽거나 조리할 수도 없었다. 손톱으로 털과 껍질만 대충 밀어내고 날고기를 우적우적 씹어 먹던 시온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레이첼은 그것을 웃기는 농담으로 치부했다.
“……?”
대로를 걷던 시온이 잠시 멈칫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시온은 금세 고개를 젓고는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포션을 몇 병 구입한 것으로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묵었던 여관으로 돌아가서 말을 가지고 출국을 하면 끝이었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레이첼이 옆으로 샜다.
“잠깐만 기다려.”
“어디 가는 거지?”
“어제 갔던 곳.”
레이첼이 향한 곳은 <와인하우스>였다. 어제도 분명 이 시간쯤에 영업을 하고 있었으니 오늘도 열려 있을 것이다.
술을 마실 생각은 아니었지만 왠지 떠나기 전에 바텐더의 얼굴을 한 번 더 봐 두고 싶었다. 그저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레이첼은 <와인하우스>의 앞에서 멈춰 섰다.
“어……?”
그러나 <와인하우스>는 닫혀 있었다. 의아한 일이었다. 어제 듣기로 바텐더는 늘 이 시간 전에 문을 연다고 말했었다.
“아무도 없군.”
어느새 따라온 시온이 <와인하우스> 간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그저 자신의 변덕에 의한 것일 뿐, 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때, 시온이 살짝 인상을 굳혔다.
“레이첼, 넌 분명 길드로 돌아가면 죽는다고 했었지?”
“…했는데. 그게 뭐?”
“그럼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길드에서 널 죽이러 올 가능성도 있나?”
“몰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레이첼은 어쌔신 길드 [듀란]의 일원이었지만 자의로 어쌔신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그들이 가르쳐 주지 않은 것도 많았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지.”
“뭐……?”
“나와.”
낮고 진중한 시온의 음성.
그에 <와인하우스> 뒤편에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세 명이 걸어 나왔다. 펑퍼짐한 로브라서 몸매는 알아볼 수 없지만 키는 셋 다 거의 완전히 동일했다.
후드가 얼굴까지 뒤덮고 있어 정면에서 마주 봐도 입술조차 보이지 않는 기괴한 차림이었다.
“무슨 볼일이냐?”
“…….”
후드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던 사람이 팔을 들었다. 로브 소매 사이로 앙상하게 마른 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손가락은 시온을 가리키고는 곧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시온이 씨익 웃었다.
“죽이겠다는 거군.”
“아……!”
레이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저들이 정말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듀란]에서 파견된 자들이라면 이건 자신의 문제였다.
저들과 싸운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레이첼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 도망갈 길을 찾았다. 그러자 시온이 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도망치지 마라. 저들이 다가 아니다.”
“뭐?”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앗!
후드 한 명이 품 안에서 대거를 꺼내는 동시에 던졌다. 그리고 세 명은 대거와 거의 다르지 않은 속도로 시온의 좌, 우, 그리고 전면을 점하며 쏜살같이 쇄도했다.
시온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방식은 그가 일전에 상대했던 [듀란]의 어쌔신들이 사용하던 전법과는 달랐다.
‘전법을 바꿨나?’
하지만 느긋하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창―! 세 자루의 대거가 정확히 시온의 눈과 양쪽 귀를 노렸다.
인간의 약하고도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는 깔끔한 일격!
“흥!”
시온은 좌우의 두 공격을 무시하고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가가가각―!
쿠우웅!
대거는 시온의 양어깨에 꽂혔으나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반면 시온의 정면에 서 있다가 그의 무릎에 안면을 찍힌 후드는 그대로 안면 함몰의 중상을 입고 달려들던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튕겨 나갔다. 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시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시체를 걷어차고 반대로 도약, 두 후드 사이로 착지하여 하나를 걷어차고 나머지 하나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파아아앗!!
그리곤 벽을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가히 탈인간적인 엄청난 힘이었다.
후드는 벽에 부딪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몸을 뒤집었다. 땅에 착지한 그는 죽은 동료의 몸에 무언가를 뿌리고는 그대로 도주를 시도했다.
시온은 쫓을지 죽일지를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레이첼을 여기에 두고 저들을 쫓을 수도 없고, 공연히 시체를 만들었다가 치안청에서 문제를 삼으면 출국이 불가능해지는 수가 있었다.
이 술집이 상당히 외진 곳에 있어 목격자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푸스스스스!
시온이 시체를 향해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시체가 마치 탄산음료 같은 소리를 내며 부글부글 끓더니 녹아 버렸다.
“뭐지? 시체가 멋대로 녹는군.”
“독이야.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할릭]과 일부 마이너 어쌔신 길드에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이렇게 시체를 녹인다고 들었어.”
“[듀란]은 아니라는 건가?”
“틀림없어. [듀란]은 이런 식은 아니야.”
말하면서 레이첼은 안도하는 한편 서운한 감정이 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듀란]이 아니라면 레이첼 너를 노린 건 아니었겠군.”
“그렇겠지. 아마.”
“그럼 나란 얘긴데……. 나한테는 어쌔신을 보낼 만한 사람이 한 명 있지.”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바로 최근에 아주 지독한 인연으로 맺어진 적 한 명이 생겨났다.
헬리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라면 다른 어쌔신 길드를 매수해서 시온을 죽이라고 청부하는 것 정도는 아주 간단한 일일 것이다.
“헬리언… 기대하라더니 이런 선물을 보낸 건가?”
“그 사람, 지독한 자라고 들었어.”
“잔인한 것 같기는 하더군.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나도 지지 않아.”
시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답례로 약속을 상기시켜 줘야겠지.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