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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23화)
Chapter 10 과거와 현재(2)


그녀의 인생은 어두웠다. 온통 어둠과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레이첼의 아버지는 도박을 하다가 큰 빚을 지고 열두 살이던 그녀를 술집에 팔았다. 어릴 땐 그저 심부름이나 청소를 하고 근근이 용돈도 받으며 살 수 있었지만, 열네 살 때 초경이 시작되자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럭저럭 잘해 주던 술집 주인이 악귀로 돌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끔찍하게 얻어맞고 밤새도록 강간을 당한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잠든 그의 목을 식칼로 난도질해 죽였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치안청에 찾아갔다.
이건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녀의 손에 죽은 술집 주인은 오래전부터 수배 중인 인신매매범이었다. 덕분에 크게 감형을 받아 사람을 죽였음에도 오 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레이첼은 달리 갈 곳이 없어 화류계에 몸을 던졌다.
그녀가 찾은 곳은 몸을 팔도록 강요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녀는 함께 잘 남자를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그 점에 만족했다. 그렇게 술집에서 삼 년을 일했고 손님으로 찾아온 어쌔신 길드 [듀란]의 마스터를 만났다.
그는 어째서인지 레이첼을 알고 있었다.
이 또한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레이첼이 죽인 술집 주인이 마스터의 표적이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바텐더와 손님으로 마주친 두 사람이지만 마스터는 어린 나이에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레이첼의 담력을 인정하여 길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거부권은 없었다. 이미 그의 얼굴을 봐 버린 이상 제안의 거부는 곧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 년간 혹독한 수련이 이어졌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고통을 참아내는 훈련이었다.
포션이라는 신의 축복은 그녀에겐 지옥 같은 악몽이었다.
몇 번이고 칼로 난도질을 당하고 포션으로 치료 받기를 되풀이한 끝에 그녀는 어떤 고문을 받아도 참아낼 수 있는 끈기와 인내를 배웠다. 다시 삼 개월 뒤에는 비로소 정식 어쌔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그랬는데.
“괜찮나? 안색이 안 좋군.”
“……큭!”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시온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크게 놀란 레이첼은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시온의 얼굴을 긁어 버렸다.
방위 본능에서 나온 반사적인 방어였지만 그녀는 현역 어쌔신이었다. 날카롭게 세운 손톱은 사람의 피부쯤은 간단히 찢을 수 있었다.
“아!”
공격해 놓고 놀란 레이첼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수그러들었다. 전혀 사람의 얼굴을 긁은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지?’
마치 쇳덩이를 때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피부를 찢기는커녕 오히려 손톱 끝이 약간 부러지고 얼얼하게 아파왔다.
“좋은 기습이었다.”
시온이 자신의 뺨에 손을 댔다.
“하지만 맨손으로 나를 어찌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아냐. 난 별로 당신을 공격하려던 게…….”
무심코 변명하던 레이첼은 시온의 얼굴이 그리 불쾌해 보이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시온에게 꽤나 허물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같이 깨달았다.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떠든 거지?’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
레이첼은 황급히 손을 거두고 고삐를 잡았다. 말은 굳이 통제하지 않아도 길을 따라 잘 가고 있었지만 딴청을 피우느라 애꿎은 말만 괴롭히는 것이다.
시온이 말했다.
“이야기해서 편해지는 게 있다면 말해도 된다. 너는 말하는 걸 꽤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닥쳐.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미안하군.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라서.”
“칫.”
레이첼은 잇소리를 내며 말 등을 연신 후려갈겼다.
이후 그녀는 꽤 오랫동안 말없이 말을 달렸다. 이 거북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어서 가라앉기만을 바라며.

본래 구멍 뚫린 둑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한 번 트인 말문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냉전은 다소 실없이 끝이 난 셈이었다.
레이첼은 굳이 시온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지만, 그 뒤로 서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 정도는 주고받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진전이 된 것이다.
들녘에서 불어온 살랑바람이 때 이른 오후의 열기를 식힐 때, 두 사람의 마차는 성 하나를 통과했다.
시온이 번화한 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경비가 꽤 삼엄하군.”
“국경이니까.”
“여긴 무슨 성이지?”
“몰라.”
레이첼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치안청에 들러 신분 확인을 받고, 그걸 들고 영주의 성에 가서 출입국 허가서를 떼야 했다. 그리고 다시 치안청으로 가서 관련 직인을 세 개를 더 받아야 비로소 출국할 수 있었다.
신분 확인증은 메이켄 남작이 준비해 준 것이 있어 문제될 것 없었지만 영주의 성과 치안청은 거의 반대편의 위치. 때문에 오가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다.
시온은 여전히 구경만 할 뿐 조금도 손을 보태주지 않았다. 혼자서 두 사람 분의 출입국 허가서를 뗀 레이첼은 피곤한 얼굴로 성을 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마차는 팔아야 돼.”
“어째서?”
“국경 지대를 지나야 하니까. 거긴 도로가 없어서 이 마차를 끌고 갔다간 오 분도 안 되서 반파될걸.”
“그럼 다른 마차를 새로 사야 하나?”
“그냥 말을 타고 가면 돼.”
레이첼은 흑마의 궁둥이를 두드렸다.
메이켄 남작이 선물한 흑마는 체구가 크고 털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명마였다. 시온과 레이첼이 함께 타고 가기에 충분했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머지는 맡기지.”
“어디 가?”
“여관에.”
“내가 팔아오라고?”
“흥정은 자신 없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제지?”
“내가 돈을 들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넌 그럴 사람이 아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뢰를 신뢰로 보답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
레이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거칠게 말고삐를 휘어잡았다.
“후회해도 난 몰라.”
“알아달라고 한 적 없다.”
레이첼은 마차를 끌고 시장 쪽으로 사라졌다.
말과 마차를 모두 합치면 400브랑 정도는 나올 것이다. 욕심이 날 수도 있는 돈이지만 시온은 그녀가 돈에 자존심을 파는 유형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오랜 시간을 지켜본 것은 아니었지만 예감이 그랬다. 그리고 그의 이런 예감은 빗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삼십 분이 조금 넘어 말만 끌고 터덜터덜 여관으로 돌아왔다.
식당에 있던 시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자, 레이첼은 거칠게 은화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120브랑. 급매물이라 흥정 못했어. 내 잘못은 아냐.”
“별로 상관없다.”
시온은 주머니를 열어 돈을 확인해 보고 그것을 다시 레이첼에게 건넸다.
“이 돈은 네가 보관해라.”
“이걸 내가 왜?”
“비상금 정도는 필요할 것 아닌가? 다시 달라고 안 하니까 필요한 데 써라.”
“됐어, 필요 없어.”
“훗!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몸은 정직하군.”
시온이 피식 웃었다.
거절하면서도 레이첼의 손이 어느새 은화 주머니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첼이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됐으니까 받아. 날 이겨먹으면 남는 게 있나? 고집 부리지 말고 받을 건 순순히 받는 게 좋아. 어차피 돈 말곤 너한테 뭘 줄 생각이 없다.”
“……칫!”
자존심이 상한 레이첼이 주머니를 들어 허리에 찼다.
그녀는 여자이니 시온과는 달리 필요한 물건이 여럿 있을 터였다. 일일이 배려해 주느니 알아서 하게끔 돈으로 주는 것이 나았다.
“내일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그때까진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하라고? 밖에 나가도 된다는 뜻이야?”
“내가 언제 나가지 말라고 한 적 있나?”
너무도 자연스럽게 되묻는 시온이었다.
레이첼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당신이 어찌 되건 알 바 아니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래?”
“고생 좀 하겠지.”
“단지 그것뿐?”
“달리 뭐가 필요한가?”
“……하아. 됐어.”
레이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방을 나갔다.
여행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줄곧 한 방을 썼다. 질렸다는 듯이 말하고 나갔지만 밖에서 용무를 끝마치고 나면 그녀는 다시 이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시온은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피곤하군.”

술집 <와인하우스>.
“여기 블루치리 한 잔.”
레이첼이 안경을 쓴 늙은 바텐더에게 말했다.
깨끗한 천으로 글라스를 닦고 있던 바텐터가 조용히 칵테일을 섞더니, 레이첼 쪽으로 내밀었다.
마셔 보니 생각보다 맛이 무척 괜찮았다.
“맛있군.”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행잔가?”
“비슷해.”
술집 안에는 레이첼과 바텐더뿐이었다.
딱히 장사가 안 되는 가게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시간이 점심과 저녁 사이의 어중간한 때일 뿐.
레이첼도 이런 시간에 영업을 개시하는 술집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들어와 본 것이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런 시간에도 손님이 오나?”
“가끔 아가씨 같은 고양이들이 찾아오지.”
홀짝.
레이첼은 평평한 글라스를 두 손으로 잡고 조금씩 기울이며 마셨다. 그녀 역시 바텐더 일을 했었지만 술에 센 건 아니었다. 몇 모금 마시자 목이 뜨거워지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바텐더가 말했다.
“블루치리는 독한 술이야. 가볍게 마시려면 트리니티를 추천하지.”
“별로 상관없어.”
홀짝.
레이첼은 계속 글라스를 기울였다.
술은 오랜만이었다. 어쌔신이 된 이후로는 한 번도 맛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냥 취하고 싶을 뿐이니까.”
“그럼 이걸 마셔 보게.”
바텐더가 레이첼의 앞으로 붉은 액체가 담긴 글라스를 밀었다. 상큼한 체리향이 났다.
“이런 거 주문한 적 없어.”
“서비스라네. 노스텔지아라는 술이야.”
“노스텔지아….”
“그리움이라는 뜻이지. 지금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술은 이것뿐일 거야.”
레이첼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기른 바텐더의 콧수염을 노려봤다.
“내가 뭘 그리워하는지 어떻게 알고?”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능력이 생긴다네.”
레이첼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마. 나도 바텐더였어.”
“이런. 그럼 안 속겠군.”
“하지만…… 그리운 맛이 나. 무척.”
레이첼은 반쯤 줄어든 노스텔지아 글라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찰랑이는 붉은 액체 속에 그 너머의 모습이 아스라이 비쳐 보였다.
바텐더가 부드럽게 웃었다.
“애인인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짝사랑?”
“아마도…….”
레이첼이 입술을 깨물었다.
발렌.
길고 긴 어쌔신 훈련을 받으면서도 꾹 참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되었던 이름.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억 속의 그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의 따스함을 사랑했었다.
‘그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꾹.
레이첼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아무리 감상에 젖어봐야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좀 더 취할 수 있는 술을 줘.”
“원한다면.”
이어 바텐더는 몇 잔을 더 섞었다.
레이첼은 오늘 밤만은 마음껏 취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