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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1권(22화)
Chapter 10 과거와 현재(1)
헬리언 백작령의 중심에 위치한 헬리언 저택.
그곳의 로비는 지금 피바다였다.
쑤아아아아!
본래 얼굴이 있어야 할 목의 단면에서 펌프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집사 알프레드였다. 헬리언 백작의 화풀이에 처참하게 희생된 것이다.
“쓰레기 같은 놈! 너의 무능함 때문에 난 40만 브랑이나 손해를 봤다.”
헬리언 백작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알프레드의 머리를 짓밟았다.
빠지직!
두개골에 균열지는 소리.
이윽고 늙어 주름진 알프레드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악!”
무심코 빨래를 들고 로비로 들어선 하녀 하나가 그 잔혹한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헬리언 백작이 휙 돌아보더니, 주저앉아 있는 하녀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누가 주인 앞에서 그렇게 경망스럽게 짖으라고 가르쳤지?”
“흐, 흐어어어……!”
헬리언 백작의 살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완전히 겁에 질린 하녀의 다리 사이로 뜨뜻한 액체가 줄줄 흘렀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오줌을 지린 것이다.
“…….”
그 모습을 본 헬리언 백작은 불현듯 욕정이 끓어올랐다. 그는 본래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마는 잔혹한 성정을 지닌 자였다. 여자를 쉽고 잔인하게 파괴하는 방법은 성적으로 능욕하는 것이다.
찌직! 찌이이익!
헬리언 백작은 그대로 하녀를 쓰러뜨리고 거칠게 옷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반쯤 혼이 나간 하녀의 여물지 않은 육체를 거칠게 범했다. 그녀의 비소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오줌 냄새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가 그를 더욱 자극했다.
“후후…….”
만족할 만큼 밀어붙이고 일어선 헬리언 백작은 고통에 실신해 버린 하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뚜둑!
하녀의 목에서 결코 나서는 안 될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집사와 하녀의 시체가 나뒹구는 가운데, 헬리언 백작은 알프레드의 목을 벨 때 썼던 검의 피를 한 차례 털어내고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헬리언 백작이 말했다.
“[듀란]은 이미 기대에 어긋나 나를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이번 영지전에서 내 발목까지 잡았다. 너희는 다르다고 무엇을 통해서 확인시켜 줄 거지, [마할릭]?”
“…….”
후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헬리언 백작은 그를 정면으로 보았지만 후드 안은 어둡기만 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훗! [마할릭]의 일원이라면 말을 할 수 없겠군. 이거 실례. 그럼 글은 쓸 줄 알겠지? 여기 종이와 펜을 줄 테니 한 번 적어 봐라.”
후드가 펜을 건네받더니, 종이에 유려한 필기체로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후후. 시범으로 원하는 표적을 하나 없애주겠다고? 그것도 1살식(殺式)으로? 그거 괜찮군. 누구라도 상관없나?”
끄덕.
후드가 한 차례 위아래로 움직였다.
“너의 그 과묵함이 마음에 들어. 내가 원하는 놈은 단 하나다. 바로 시온이라는 놈이지. 누군지 알고 있나?”
끄덕.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놈을 없애고 그 목을 잘라서 내 앞으로 가지고 와. 그럼 앞으로는 너희 [마할릭]을 후원하겠다.”
끄덕.
후드는 한 차례 더 끄덕인 뒤 유령처럼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그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은신술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크큭. 살아 있을 때 실컷 즐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놈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기꺼이 웃으면서 지켜봐 주마. 시온.”
한편.
시온은 마차에서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라도네스 왕국은 전국 각지로 통하는 발달된 도로를 가지고 있어 통행이 무척이나 용이했다. 이따금씩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보리밭을 감상하다 보면 잠이 절로 왔다.
‘기가 막혀. 이자는 도대체 지금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있기는 한 거야?’
레이첼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바로 손만 뻗으면 그를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죽일까 말까를 고민하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도 잠이 올까?
레이첼은 처음 메이켄 영지를 떠나올 때부터 반항의 의미로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시온은 더했다.
애초에 레이첼이 입을 열 필요도 없었던 것이, 시온은 메이켄 남작령을 벗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창 잘 뿐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날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면 벙어리가 아닐까 의심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참다 참다.
그게 칠 일이 넘어가고,
마침내 말하는 법을 까먹을 것 같아지자 결국 레이첼은 자신이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기에 그 목소리는 약간 조심스러웠다.
“당신, 이름은?”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그게 왜 궁금하지?”
“……!”
레이첼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분명히 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으면 그걸 빌미로 화를 내려고 했는데 즉답이 돌아오자 깜짝 놀라서 얼굴이 떨렸다.
“뭘 그렇게 놀라?”
“노,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이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부를 일도 없을 텐데.”
쿨 하게 대꾸하고 돌아눕는 시온.
레이첼은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동행자에게 이름도 안 가르쳐 준다는 게 말이 되는 처우인가?
“이봐. 이름을 모르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당신을 부를 방법이 없잖아.”
“지금처럼 불러라.”
“신성교국까진 석 달이 넘게 걸려. 그동안 계속 ‘이봐’라고 부르라고?”
“싫은가?”
“그야 당연…….”
무심코 분노를 터뜨리려던 레이첼은 멈칫거렸다.
가만있어 봐.
내가 왜 이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화를 내야 하는 거지?
어쩌면 이런 식으로 애를 태우게 만들어 길들이려는 책략일 수도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레이첼의 머리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됐어. 어차피 당신 이름 따윈 부를 일 없을 테니까.”
“시온이다.”
“뭐?”
“이름. 시온이라고.”
“……!”
시온은 그 말만을 하고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얄미웠다.
레이첼은 부아가 확 치밀어 올랐다.
‘뭐하자는 거야? 정말!’
두 사람의 냉전은 마을을 찾아 여관에 묵으면서도 계속되었다.
여관을 찾는 것도, 식사를 주문하는 것도, 목욕물을 준비하는 것도 전부 레이첼의 몫이었다. 시온은 그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돈 계산을 하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목욕을 했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엔 서로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 동행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다소 불편하고 무료하긴 하였지만 레이첼은 그에 큰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 안에서 시온의 인상은 최악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가 ‘내 것’을 운운한 순간부터 어쩌면 변태적인 행위를 강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시온은 여행에 필요한 최저한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은 오히려 다행이랄 수 있었다.
그 길고 긴 침묵이 깨진 건 15일 만이었다.
한낮.
마차 위에 누워서 농토를 바라보던 시온이 말했다.
“레이첼, 궁금한 게 있다.”
“내가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아니, 싫으면 됐다.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넘어가지.”
시온은 두 말 없이 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돌아누워 버렸다.
대답을 하든 말든 유감스러울 것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오히려 레이첼이 궁금해졌다.
“뭔데?”
“대답 안 할 거잖나?”
“대답할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 우선은 들어보고.”
시온이 피식 웃었다.
무척이나 도도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 섞인 호기심을 읽은 것이다.
“왜 도망치지 않지?”
“……?”
“마음만 먹으면 달아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날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따라다니는지 궁금하군.”
“당신이 그러라고 시켰잖아.”
“그건 네 진심에서 나온 대답이 아닐 테지.”
“다 안다는 듯이 얘기하지 마.”
불쾌하다는 듯 레이첼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가 시온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그로부터 오 분쯤 지난 뒤였다.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이야.”
“길드로 돌아가면 되지 않나?”
“뭐? 참 나. 메이켄에서 꽤 요직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문외한이군?”
“무슨 소리지?”
“임무에 실패하고 정보까지 발설한 내가 길드로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야. 어쌔신에겐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으니까.”
“나를 따라서 도망칠 속셈인가?”
“신성교국으로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테지만…… 한 번쯤 가 보고 싶을 뿐. 거기 사람들은 신과 통한다고 하니까.”
“프로 살인자답지 않은 감성이군.”
“훗! 어차피 실전 경험이라곤 두 번밖에 안 돼. 삼급 자격은 뒷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거니까. 어쌔신이 되기 전에 난 술집에서 일했었어.”
“창녀였나?”
“마음이 맞으면 같이 자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문적으로 남자를 상대하는 일은 아니었어. 어쨌든 그 일을 하다가 마스터를 만났지.”
레이첼은 말고삐를 잡은 채로 깊은 회한에 잠겼다.